산령각 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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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령각중건기山靈閣重建記
양주시의 동쪽 천마산天摩山 아래에 견성암見聖巖이라는 암굴巖窟 하나가 있다. 그리고 암굴 앞에는 견성암見聖菴이라는 암자菴子가 있다. 그 암굴과 암자 사이에 산령각山靈閣이라는 편扁1) 즉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한 채 있다. 이는 곧 우리 시조 시중공侍中公의 영정각影幀閣으로 후손 동윤東潤2) 이 쓴 것이다.
공公의 최초의 이름은 파회破回였으니 우리나라 말로는 바위巖라 한다. 신라에서 고려로 국운이 교체될 무렵이었다. 공은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으며, 이곳에 숨어 덕업德業을 쌓고 있었다. 이에 고려 태조가 창업하게 되자 공의 지혜로운 능력을 알고 친이 찾아와 이 암굴에서 만났다 하여 견성見聖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공은 태조의 남정南征에 종군從軍하여 여러 차례의 전공戰功을 세움으로써 고려의 사직社稷 정립에 이바지하였다. 태조는 맹孟이라 사명賜名 3) 하였고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루었으니 풍양조씨豐壤趙氏의 득성得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공이 돌아가시고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고개 넘어 2km 정도 되는 곳에 장사를 지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 덕업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구杖屨 4) 가 있는 곳에 절과 전각을 짓고 승려僧侶가 거주하며 수호하게 하였으니 1000년 전 일이다. 년 대가 이미 오래되고 증거로 삼을 만한 문헌文獻도 없어 그 창건과 개수改修에 관한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조선조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는 공의 후예가 되므로 수렴청정할 때에 국모國母의 명령으로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그 뒤로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건물이 비바람에 시달려 거의 퇴락할 우려가 컸다. 여러 자손이 이를 걱정하여 지난 4월 서울에 있는 화수회에서 모두 모여 중건할 것을 논의하니 그 뜻이 일치하였다. 이에 함께 계획을 세우고 재력을 모아 족조族祖 성구成九씨에게 위임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4월 22일에 착공하여 7월 7일에 준공하였다. 그리하여 각閣의 모습이 아름답고 단청丹靑이 새로워졌으니 모두 말하기를 “아름답다.” 하였다. 공사를 끝마치고 나서 종중宗中의 의견이 “대연大衍이도 이 공사에 참여했다.” 하여 중건기重建記를쓰라고 한다.
마음속으로 생각건대, 공은 안으로는 경세제민經世濟民 할 책략策略을 품고 있으면서도 암혈巖穴5) 로 도피하여 스스로 회장晦藏 즉 재주나 학식을 드러내지 않고 어리석기 그지없었으니 일개 촌부村夫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를 만나게 되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의기투합하여 통합삼한統合三韓의 공을 세우고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루었다. 돌이켜보건대 당시에는 문헌 구비가 자유롭지 못하여 조정朝廷에 근무할 때의 사적과 동정을 상세히 알 수 없으니 자못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한치의 비단만 보아도 칠양七襄 6) 의 채색彩色을 말할 수 있고, 한 점의 고기 맛만 보아도 온 솥의 국 맛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 덕을 닦을지어다.”하였으니 모든 후손 된 자들은 각별하게 심신心身을 다스리고 덕업을 힘써 닦아 선조先祖를 더럽히지 말 것이며, 또한 이 산령각山靈閣을 수시로 보수하여 영원히 먼 후일까지 보존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경행慶幸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중건기重建記로 가름한다.
1955년 8월 일
후손 풍양조씨화수회장 대연 경기
山靈閣重建記 楊州治東 天摩山下 有一巖窟曰見聖巖 巖窟之前 有一僧舍曰見聖菴 菴窟之間有一閣扁曰山靈閣 卽我始祖侍中公之影幀閣 而後孫東潤所書也 公初諱破回方言稱巖當 羅麗運替之時 不求聞達於世 隱居養德於斯 高麗太祖方創業垂統 知公賢能親訪而遇之於比巖窟中 故見聖之名所以得也 從太祖南征 屢著功伐以定麗社 太祖賜名孟 官至門下侍中平章事 豐壤之趙得姓自此始焉 公歿 葬于西南踰一崗五里許地 後人追慕其德業 就其杖屨之所立寺建閣 而使居僧護之此 則千年前事也 年代旣遠 文獻無徵 其刱建與改修之顚末無以得詳 而惟朝鮮朝 神貞翼皇后爲公之后裔 故垂簾聽政時 以國母之命大加修理矣 爾後歲且百年 棟宇不免爲風雨所侵灑幾乎有頹落之盧 遠近諸裔爲是恐懼去四月日齊會于京花樹會義以重建 衆意歸一 乃合謀鳩財委任于 族祖成九氏俾敦其事 始以四月二十二日訖以七月七日於是乎 閣貌輪奐丹雘一新 咸曰美哉 役旣畢宗意 謂大衍亦參是役俾爲之記 窃惟 公內懷經濟之策屛 處巖穴之間 自晦如愚無異一田夫 而已及遇麗祖契合魚水 旣樹統合三韓之功 致位宰相 顧當時文或不備 立朝事行未得詳傳殊爲可恨 然尺錦而可以說七襄之彩 一臠而可以知全鼎之味矣 詩曰 無念爾祖聿修厥德 凡爲後孫者 另治心身 勉修德業 無忝先祖 又使此閣隨時 嗣葺得保於永久之後 何幸如之是爲記 佛紀二千四百八十九年 乙未仲秋 後孫 豐壤趙氏花樹會長 大衍 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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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편액(扁額)의 약자로서 현판(懸板)이라는 뜻이다.
2) 호는 혜석(惠石, 1871-1923), 본관은 풍양(豊穰)이며, 부친은 영하(寧夏)이다. 조동윤은 1886년에 동몽교관을 지내고, 이듬해인 1887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 응교를 거쳐 군부협판 · 의정부찬정 · 육군법원장 등을 지냈으며, 1904년 시종무관장이 되었고, 1908년 동궁 무관장에 이르렀다.
3) 공이 많은 신하(臣下)에게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거나 그 이름을 칭한다.
4) 지팡이와 신의 뜻으로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이다. 즉 시중공이 살던 곳이다.
5) 바위에 뚫린 굴이다.
6) 칠양(七襄)은 직녀성(織女星)이 하루에 일곱 번 자리를 옮긴다는 뜻인데 “칠양의 채색”은 직녀(織女)가 짜낸 좋은 비단이라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