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간공 운흘
고독한 풍류객 석간공 휘 운흘(石磵公諱云仡) |
휘 운흘(諱云仡, 1332~1404)의 본관은 풍양豐壤 호는 석간石磵과 서하옹棲霞翁이다. 시중공 휘맹諱孟의 31대손이라 자찬自撰 묘지문에 기록되어 있지만, 조문趙門에서는 오기誤記로 13대손으로 수정하였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다.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를 거쳐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었다. 1361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있으면서 홍건적이 침입하자 남쪽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다음 해 2등 공신이 되었다. 1363년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이 되고 이어 전라·서해·양광·삼도 안렴사(全羅道·西海道·楊廣道三道按廉使)가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경상북도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 서하옹(石澗棲霞翁)이라 하며 출입할 때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기우도騎牛圖」글을 짓고,「석간가石磵歌」를 부르고 다녔다.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과 교우하면서 초연하게 신선神仙에 뜻을 두었다.
1377년(우왕 3)에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0년에는 광주廣州의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면서 해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 지내며 역도役徒들과 일하였다. 서해도 관찰사西海道觀察使로 임명되어서는 사람이 거주하는 섬의 토지와 어염을 오군장수五軍將帥와 팔도군관八道軍官에게 식읍으로 주어 국방에 대비케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1389년(창왕 1)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고, 1390년(공양왕 2)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신병身病으로 사직하고 광주 별장別莊으로 내려갔다. 다시 검교 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저서로는『석간집夕刊集』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편서編書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다음의 내용은 석간공石磵公 휘운흘諱云仡과 관련된 현재 남아 있는 사록「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및 각종 자료를 총망라하여 정리한 것이다.
1.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조운흘趙云仡은 한양부漢陽府 풍양현인豐壤縣人이다.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로 출발하여 여러 차례 합문사인閤門舍人이 되었다. 공민 10년(1361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제수되었고, 홍건적 난 때에 임금의 남행 피신을 호종하며 2등 공신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국자직강國子直講으로 옮겼다가 전라·서해·양광도 등 3개 도의 안찰사를 역임하였다.
조운흘이 전라도 안찰사按廉使로 재임할 때의 일이다. 평리評理 염지범廉之范 소실小室의 친정 오빠가 불순한 무리와 함께 태산인太山人 김언용金彦龍의 말馬을 훔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조운흘이 문초하여 증거를 찾고 자백을 받아 포목布木을 그 대가로 징수하였고, 그 두목을 사형시켰다. 이후 조운흘을 대신하여 김윤관金允琯이 부임하였다. 그는 염지범 무리의 청탁을 받고는 오히려 김언용에게 포목 500필을 징수하여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에 서리胥吏로 하여금 판결문獄辭을 가지고 김언용과 절도범을 압송하여 법사法司에 나가 그것을 진술토록 하였는데 절도범이 도중에 판결문을 절취竊取하여 도망쳐 염지범廉之范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김언용金彦龍은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고 결국 잡아 헌사憲司에 고발하였다. 헌사憲司에서는 염지범이 재상의 신분으로 도적을 비호庇護했다며 탄핵彈劾하였다. 그리고 도망간 염지범을 체포하여 장형杖刑에 처하고, 김윤관는 이 일로 제명되었다.
공민왕 23년(1374) 전법총랑典法摠郞을 사직하고, 상주尙州의 노음산露陰山 밑으로 낙향하여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란 자호自號를 짓고 미친 척하며 신분을 숨겼다. 출타할 때는 늘 소를 타고 다녔으며, 때론 집에 걸려있는 기우도騎牛圖1)를 찬양하는 글을 짓고 장단에 맞추어 석간가石磵歌를 부르는 등 이처럼 그의 의중意中을 드러내곤 하였다.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과 더불어 초연히 세속 밖의 교분을 쌓으며 상념想念에 젖었다.
우왕 3년(1377)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제수되어 같은 반열의 관료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군주君主가 학문을 등한시하고는 천하의 국가를 잘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학문을 위한 요체要諦는 별다르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궁리窮理하여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질 따름입니다. 따라서 선고先考이신 성왕聖王께서는 강관講官2)과 시학侍學3)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바른 수양修養을 위해 어두웠던 도학道學을 강론케 하여 밝혔으니 그 사려思慮가 깊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서연書筵에서 강학講學을 간혹 하시다마다 하시니 신臣 등은 마음속으로 전하殿下를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고先考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서연의 설치를 복원하고, 정직한 선비를 매일같이 좌우左右로 가까이 두고 다양한 정무政務를 음미하시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강론하고 익히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말 듣기를 낙樂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덕성德性을 함양하시어 지극한 이치理致에 이르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다.
관직을 거듭 옮기며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우왕 6년(1380)에 은퇴하기를 청원하고 광주廣州에 고원강촌古垣江村4)으로 물러나 기거한다. 그리고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이라는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스스로 원주院主라 칭하였는데, 누덕누덕 남루한 옷과 짚신을 신고서 인부들과 더불어 힘든 일을 같이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높은 벼슬의 달관達官인지를 알지 못했다.
우왕 14년(1388)에 다시 기용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옮기었다. 그때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각도에 안렴사按廉使는 품계品階가 낮아서 그 직을 능히 수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양부6)에서 위엄과 덕망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7)을 주어 보냈는데 조운흘은 서해도西海道 관찰사가 되었다. 임지任地로 떠나며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신이 듣건대 맛있는 미끼를 드리우면 반드시 큰 고기가 있고, 후한 상을 내리면 밑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헛된 은혜를 베풀어도 진실한 복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이 모두 지당한 말입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집집마다 부족함이 없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살아 안팎으로 걱정이 없을 때라도 위난危難을 생각해야 하는데 더욱이 우리나라는 바다가 왜놈의 땅과 가깝고 육지는 오랑캐의 땅과 연접連接되어 있으니 걱정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계는 서해西海로부터 양광도楊廣와 전라도全羅를 거쳐 경상도慶尙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거의 2천여리가 되는데, 바다 한가운데 사람이 거주할만한 섬으로는 대청도大靑·소청도小靑·교동도喬桐·강화江華·진도珍島·절영도絶影(부산광역시 영도구)·남해도南海·거제도巨濟 등 큰 섬이 20여 개 있고, 작은 섬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두 토양이 비옥하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채취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지금은 버려지고 자원으로 취급하지 아니하니 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마땅히 오군장수五軍將帥와 팔도군관八道軍官에게 각각 호부虎符와 금패金牌를 지급하되 각 천호千戶와 백호百戶에 이르기까지도 패면牌面7)을 주어서, 이에 크고 작은 해도海島를 그들의 식읍食邑8)으로 삼아 자손 대代까지 물려주게 된다면 장수將帥 자신의 부귀富貴 뿐만이 아니라 자손만대까지 의식衣食의 여유로움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백성 누군들 스스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많은 백성이 스스로 싸우려고 나간다면 전함戰艦도 저절로 갖추어지고, 군양식軍糧食 또한 스스로 가져와 유격병遊擊兵을 편성하여, 유사시 불의不意에 출격出擊을 할 수 있어 적들은 감히 넘보질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또한 백성들은 타오르는 불길에 휘날리는 연기를 보고 닭의 울음과 개 짖는 소리 들으며, 고기도 잡고 소금도 채취하며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국가는 배를 우회시킬 일도 없고, 조종祖宗의 토지는 오늘날보다는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니 원하건대 대신들과 상의하여 시행토록 하옵소서”하였으니 우왕禑王은 그 상소문을 도당都堂에 내려보내어 검토하게 하였다.
조운흘의 임지任地인 주군州郡을 다스릴 때는 문란한 법강法綱을 바로잡고 해이한 풍기를 떨쳐 일으키며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웠다. 또한,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털끝만큼도 관대하지 않았으니 부내部內의 치안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신창辛昌 원년(1389)에 입궐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되었다가 이내 동지同知에 올랐다. 공양왕 3년(1390)에는 계림부윤雞林(慶州)府尹으로 나갔었고 본조(朝鮮朝)가 들어서며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사임하고 광주廣州의 별서別墅로 돌아왔다. 또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임명되었는데 검교는 당연히 녹봉祿俸을 받는 직이었는데 조운흘은 그것을 받지 않고 사임辭任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뜻을 세움에 기이奇異하면서도 질고質古하고, 신이 나서 놀 때는 지나칠 정도로 흥興에 겨웠다. 감히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머리를 조아리거나 거드럭거리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곧이곧대로 행동하였다. 작고하며 스스로 자술自述한 묘지문墓誌文은 다음과 같다.
“조운흘趙云仡은 본관이 풍양인豊壤人이니 고려高麗 태조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손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내외직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마치니 후손은 없다. 해와 달로 상여喪輿에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 제수祭需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였으니9),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人生의 모든 일이 끝났도다.”
趙云仡 漢陽府豊壤縣人 恭愍六年登第 調安東書記 累轉閤門舍人 十年 授刑部員外郞 紅賊之亂 從王南幸 錄功爲二等 明年 遷國子直講 歷全羅·西海·楊廣三道按廉使 其在全羅 評理廉之范妾兄與其黨 盜太山人金彦龍馬 云仡按驗 具服徵布 殺爲首者 會金允琯代云仡 聽之范屬 反徵彦龍布五百匹還之 令吏將獄辭 押彦龍及盜, 詣法司辨之 盜中路竊獄辭亡匿之范家 彦龍跡而得之 告憲司 憲司劾之范以宰相庇盜 捕之之范逃杖允琯除名 二十三年 以典法摠郞辭職 居尙州露陰山下 自號石磵棲霞翁 佯狂自晦 出入必騎牛 著騎牛圖贊·石磵歌 以見意 與慈恩僧宗林 爲方外交 超然有世外之想 辛禑三年 起授左諫議大夫 與同列上疏曰 “自古人君 未有不由學而能治天下國家者也 爲學之要無他 讀書窮理 誠意正心而已 是以 先考聖王 置講官侍學 使之講明道學 蒙以養正 其慮深矣 近來 書筵講學 或作或輟 臣等竊爲殿下惜也 願奉先考之遺訓 復設書筵 俾正直之士,日近左右 萬機之暇 講習經史 樂聞善道 涵養德性 以臻至理” 再轉判典校寺事 六年 乞退居廣州古垣江村 重營板橋·沙平兩院 自稱院主 敝衣草屨 與役徒同其勞 過者不知爲達官也 十四年 復起爲典理判書 遷密直提學 時 議按廉秩卑 不能擧職 選兩府有威望者 爲都觀察黜陟使 授敎書鈇鉞以遣 云仡爲西海道都觀察使 將行上書曰 “臣聞 芳餌之下 必有巨魚 重賞之下 必有良將 又曰行虛惠而受實福 斯言至矣 凡爲國者 當家給人足 內外無患之時 猶且思危 况我本朝 水近倭島 陸連胡地 不可不虞 國界自西海至楊廣·全羅至慶尙海道 幾二千餘里 有水中可居之洲曰 大靑·小靑·喬桐·江華·珍島·絶影·南海·巨濟等 大島二十 小島不可勝數 皆有沃壤魚鹽之利 今廢而不資 爲可嘆已 宜於五軍將帥·八道軍官 各給虎符金牌 其千戶·百戶 授以牌面 仍以大小海島爲其食邑 傳諸子孫 則不惟將帥一身之富 子孫萬世衣食有餘矣 人人誰不各自爲戰乎? 人人各自爲戰 則戰艦自備 兵糧自賫而爲遊兵 因出其不意擊之 則賊不敢窺覦 民得以富庶 烟火相望 雞犬相聞 民獲魚鹽之利 國無漕轉之虞 祖宗土地 復全於今日矣 願與大臣咨議施行” 禑下其書都堂 云仡觀察州郡 頓綱振紀 抑强扶弱 有犯法者 毫髮不貸 部內大治 辛昌元年 召拜簽書密直司事 俄陞同知 恭讓二年 出爲雞林府尹 入本朝 授江陵大都護府使 尋以病辭 歸于廣州別墅 又拜檢校政堂文學 檢校例受祿 云仡辭不受 爲人立志奇古 跌宕瑰偉 徑情直行 不肯隨時俯仰 將終 自述墓誌曰 “趙云仡本豊壤人 高麗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 恭愍代 興安君李仁復門下登科 歷仕中外 佩印五州 觀風四道 雖大無聲績 亦無塵陋 年七十三 病終廣州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峩嵯山南摩訶耶 孔子杏壇上 釋迦雙樹下 古今聖賢 豈有獨存者? 咄咄 人生事畢 『高麗史』 卷 一百十二, 列傳 二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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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검교檢校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의 졸기
태종실록 8권에는 “태종 4년 갑신년(1404) 12월 5일 검교 정당문학 조운흘이 졸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검교檢校10) 정당문학政堂文學11) 조운흘趙云仡이 졸卒하였다. 조운흘은 호號가 석간石磵이다. 그는 뜻을 세우는 것이 기걸奇傑하지만 순박하고, 호탕豪宕하고 대범하다. 또한, 한번 생각한 일은 곧이곧대로 행하지만 시속時俗에 민감하게 처신하거나 호락호락 굽히지도 않았다. 신축년辛丑年(1361, 공민왕10)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국경을 침범한 외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巡行할 때 조정의 신하들 다수가 도망치고 도피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였으나, 조운흘은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 호종扈從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삼등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상 잇속에는 아무 욕심이 없었으며, 초연히 세상 밖의 일만 생각했다.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 봄 전법사총랑典法司摠郞이었으나 관직을 물러나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아래서 살았다. 거짓으로 미친 척도 하고 스스로 어리석게 행동하며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기우도騎牛圖12)를 찬양하는 글을 짓고 장단에 맞추어 석간가石磵歌를 부르며13) 그의 의중意中을 드러내곤 했다. 정사년丁巳年(1377, 우왕3)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다시 기용되어, 거듭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옮겼지만, 그가 선호하는 바는 아니었다.
신유년辛酉年(1381) 광주廣州에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물러나 기거하며, 자은승慈恩僧 종림宗林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고,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 자칭 원주院主라 하였다. 누덕누덕 남루한 옷과 짚신을 신고서 인부들과 더불어 힘든 일을 같이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높은 벼슬의 달관達官인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무진년戊辰年(1388)에 기용되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그때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각도에 안렴사按廉使는 품계品階가 낮아서 그 직을 능히 수행할 수가 없다고 하여, 양부兩府14)의 관원 중에서 위엄과 덕망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15)을 주어 보냈는데 조운흘이 서해도 도관찰출척사西海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그는 문란한 법강法綱을 바로잡고 해이한 풍기를 떨쳐 일으키며 사납고 억센 이들은 억누르고 약한 사람은 도우며,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털끝만치도 용서하지 아니하며 관할 지역을 잘 다스렸다. 그 후에 소환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발탁되었다.
임신년壬申年(1392, 태조1) 가을에 태상왕(太上王: 朝鮮太祖)이 즉위하여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제수되었다. 그는 은혜와 사랑이 있었으니 강릉부의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16)을 세웠다. 계유년癸酉年(1393) 가을에 병으로 사임하니,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조운흘은 물러나 광주廣州의 한적한 별채에 거처하였는데, 당시 검교檢校는 관례에 따라 녹봉을 받았지만, 조운흘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정승 조준趙浚은 조운흘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교유가 있던 친구였다. 그는 내방객 전송하는 일로 한강漢江을 지나다가 같은 반열의 재상과 더불어 술과 음식은 물론 악공樂工과 기녀妓女를 거느리고 석간을 찾았다. 조운흘은 승려들이 입는 회색 빛깔의 옷과 대껍질 삿갓을 쓰고 지팡이의 부축을 받으며 문까지 나와 정중히 읍揖하며 맞이했다. 그리고는 모정茅亭으로 영접을 하여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울리며 술을 권하니 조운흘은 짐짓 귀머거리인 양 못 들은 척하며, 눈을 감고 꼿꼿이 앉아 큰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니 두 번에 걸쳐 독경 소리가 울렸다. 그는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리낌이 없는 몸가짐이었다. 이에 조준이 민망스럽게 사과하기를“선생께서는 이를 싫어하시는군요.”하였다. 그는 풍악을 멈추어라! 명하고 이내 차茶만 마시곤 되돌아갔다. 그가 세속을 희롱하며 스스로 고고하게 행동하기를 이와 같았다.
병이 깊어지자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불현듯이 날개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해탈이라도 하듯이 앉은 채로 졸卒하였다. 그 묘지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은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니, 고려왕 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다.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17)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는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고원성古垣城에서 운명殞命하니, 후손이 없다. 해와 달 하여금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 제수祭需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였으니18),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라고 하였다.
○壬申/檢校政堂趙云仡卒 云仡號石磵 立志奇古 跌宕瑰偉 (經)〔徑〕情直行 不肯隨時俯仰 至正辛丑 高麗 恭愍王避寇南巡 朝臣多竄匿苟活 云仡以刑部員外郞從之 事平 錄功爲三等 恬於勢利 超然有世外之想 洪武甲寅春 以典法摠郞棄官 退居尙州 露陰山下 佯狂自晦 出入必騎牛 著《騎牛讃》,《石磵歌》以見意 以見意 丁巳 起拜左司議大夫 再轉判典校寺事 非其好也 辛酉 退居廣州 古垣江村 與慈恩僧宗林爲方外交 重創板橋 沙平兩院 自稱院主 敝衣草屨 與役徒同其勞 過者不知其爲達官也 戊辰 起爲密直提學 時 朝議以各道按廉使秩卑 不能擧職 選兩府有威望者 爲都觀察黜陟使 授敎書鉞斧遣之 云仡爲西海道 頓綱振紀 抑强扶弱 有犯法者 毫髮不貸 部內以治 召拜簽書密直司事 壬申秋 太上卽位 除江陵大都護府使 有惠愛 府人爲立生祠 癸酉秋 以病辭 拜檢校政堂文學 云仡退居廣州別墅 時檢校例受祿 云仡辭不受 政丞趙浚與云仡有舊 因送客過漢江 與同列宰相 率妓樂齎酒饌 往訪之 云仡緇衣箬笠 扶杖出門長揖 迎至茅亭 坐定 浚張樂置酒 云仡佯聾不聞 閉目危坐 高聲唱南無阿彌陀佛者再 傍若無人 浚謝曰 "先生厭是矣” 命止樂 啜茶而還 其玩世自高類此 及病 自作墓誌 翛然坐化 其誌曰: 資憲政堂文學趙云仡 豐壤縣人 高麗 王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 恭愍王代興安君 李仁復門下 登科 歷仕中外 佩印五州 觀風四道 雖大無聲跡 亦無塵陋 年七十三 病終廣州 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 峨嵯山南摩訶耶 孔子杏壇上 釋迦雙樹下 古今聖賢 豈有獨存者! 咄咄人生事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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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간공石磵公이 남기 문학과 행적
(1)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석간石磵 은 1374, 1381, 1393년에 세 번에 걸쳐서 벼슬을 그만둔다. 공민왕 23년(1374) 봄에 상주尙州의 노음산露陰山 밑으로 낙향하여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란 자호自號를 짓고 미친 척하며 신분을 숨긴다. 출타할 때는 늘 소를 타고 다녔으며, 때론 집에 걸려있는 기우도騎牛圖를 찬양하는 글을 짓고 장단에 맞추어 석간가石磵歌를 부르는 등 이처럼 그의 성정은 호방豪放하고 기걸奇傑한 인물이었다.
석간공의 칠언절구七言絶句〈송춘일별인送春日別人〉은『동문선東文選』권22에 수록되어 있다. 시작詩作 시기는 상주로 낙향할 때의 작품으로 추측해 본다.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는 선비의 애틋한 마음을 춘풍春風에 실어 보내고 있다. 귀양 길의 상심想心을 묘사한 시작詩作으로 해석도 하지만 석간공石磵公은 귀양살이를 한 일이 없는 분이다. 오히려 벼슬살이가 싫어 어느 봄날 미친 척하며 노음산露陰山으로 도망가는 감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석간공에게는 벼슬살이가 곧 귀양살이 나락과 같은 곳이었다. 쇠락해 가는 조정을 탈출하여 누룽이 소를 타고 유유자적이 그에게는 최상의 낙이樂易 함이다. 오래 머문들 사소한 일에 시비하며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모습만 연출할 따름이다. 이 시에서‘송인送人’역시 떠나는 본인을 지칭한 것이다.
가는 봄날 그도 떠나다 / 送春日別人
귀양살이 벼슬에 마음이 상해 눈물을 머금누나 / 謫宦傷心涕淚揮
가는 사람 감싸고 되돌아왔다간 가는 봄이여 / 送人兼復送春歸
꽃바람아 머물 생각이랑 말고 어서 가거라 / 春風好去無留意
오래 있어 본들 인간의 시비만 배우리니 / 久在人閒學是非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시화집 『東人詩話』에서는 문순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송춘음送春吟〉과 대비하며 ‘이공李公은 봄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고 조공趙公은 봄 더러 어서 가라 재촉하였으니 각각의 시상詩想은 다르지만 노련하고 힘차며 뛰어난 절조節操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봄을 보내며 읊다 / 送春吟 문순文順 이규보李奎報
봄이 저물어가니 곧 보내긴 해야겠지만 / 春向晩送將歸
아득하고 머나 멀리 어디로 가려나 / 杳杳悠悠適何處
흩어진 진홍빛 꽃을 거둬갈 뿐 아니라 / 不唯收拾花紅歸
인간의 청춘마저 빼앗아 가누나 / 兼取人顔渥丹去
- 中略 -
봄바람아 어서 가거라 돌아보지 말아라 / 好去春風莫回首
인간과 박정한 건 너뿐이로다 / 與人薄情誰似汝
李文順送春詩曰 春向晩送將歸 杳杳悠悠適何處 不惟收拾花紅歸 兼取人間渥丹去 好去靑春莫回首 與人薄情誰似汝 趙石澗云仡送春詩 謫宦傷心涕淚揮 送春兼復送人歸 春風好去無留意 久在人間學是非 李則惜春歸 趙則勸春歸 各有意態老健奇節 東人詩話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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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공이 상주 땅을 밟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다음 내용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저술한 『동사강목東史綱目』제14하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했다.
“석간공石澗公의 장인丈人은 상주인尙州人 김득배金得培(1312-1362)이다. 호는 난계蘭溪이며, 문과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오른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이다. 그러나 ‘홍건적의 난’때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 살해사건에 연유되어 상주에서 효수梟首되었다. 죽기 전 김득배는 상주 선산先山의 부근에 숨어 있었는데 아내와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석간공은 장모에게 말하기를“사실대로 말을 하여 고초를 당하지 마소서”하니 한참을 견디다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 이후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억울한 누명은 벗겨지고,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위 시詩에서‘체루涕淚’는 장인丈人을 지켜주지 못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회한悔恨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실 참여와 은둔 사이를 고민하다가 상주尙州 땅을 밟은 한 지식인知識人이 자연을 벗 삼아 온갖 상념想念을 떨쳐 버리려는 오뇌懊惱가 이 시작詩作에 묻어 있는 듯하다.
선조 시대의 시인이자 양명陽明학자인 영의정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은 지지地志를 열람하다가 우연히 노음산露陰山을 발견한다. 그곳이 바로 공민왕 23년(1374) 어느 봄날 석간공이 낙향하여 거짓 미치광이 행세하며 우거했던 곳이다. 노수신은 석간공의 기걸奇傑했던 백여 년 전 모습을 회상하며 시 한 수에 운율을 맞춰 읊었다. 그 시가『소재집蘇齋集』에 실려있는〈노음산을 품으며懷露陰山〉이다.
노음산19)이 어느 쯤에 있는고 / 何許露陰山
상주 서쪽으로 십 리쯤이던가 / 州西十里間
누룽이 소를 탔던 석간20)의 모습은 / 騎牛石磵逕
늘 한가로이 같이했던 달나라에 있나 / 惟有月同閑
(2)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서거정徐居正의『필원잡기筆苑雜記』은 조선이 건국되며 망국의 설움을 달래던 신진 사대부들의 갈등을 묘사한 한 단면의 내용이다. 석간공은 신유년辛酉年(1381)에 아차산 아래 광나루 강마을(고원성古垣城, 현 몽촌토성)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계유년癸酉年(1393)에는 또다시 병을 핑계로 강릉부사를 그만두지만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에 제수가 된다. 공은 몽촌으로 되돌아와 한적한 별채 초막에 은신한다. 검교는 실질적 사무가 없는 명예직이라 그런지 몰라도 국가가 주는 녹봉도 거절하며, 허름한 삼베옷에 갈대 삿갓을 쓰고 누룽이를 타곤 유유자적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누리었다. 그 무렵 태종 1년(1401) 영의정부사 조준趙浚과 좌정승인 김사형金士衡이 또다시 찾아와 벼슬을 권했다. 사가의『필원잡기』에 나오는 석간공의 기록은 이 시기에 남긴 사적이다.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고 훌륭하여 두드러지게 뛰어났다. 세속과 더불어 머리를 숙여 헤프게 앙모仰慕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말엽에 어지러워짐을 보곤 청맹靑盲21)이라 핑계를 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본조에 들어와 계림부윤鷄林府尹(공양왕 2년, 1390)과 강릉부윤江陵府尹(태조 1년, 1392)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질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광주廣州 고원촌古垣村에 살아야 할 곳을 정하고, 종적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좌의정左議政인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이 한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석간공은 소매가 넓은 베적삼을 입고 갈대로 만든 삿갓을 쓴 채로 읍하며 나가 마주 대했다. 그러나 한마디 말은 없었다. 상락이 이에 “고집 센 이 늙은이야! 그 순박함이 이 같으니 어이할꼬?” 서둘러 어거馭車하는 자에게 명하여 수레를 돌렸다.
석간공은 날마다 소를 타고 정금원鄭金院과 광진원廣津院을 왕래하면서 길가는 나그네를 돕기도 하며 베풂에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누런 소를 타고 청산은 이웃하건만 / 騎黃牛傍靑山
그 마음도 몸도 거칠디거칠구나 / 麤麤22)乎其神彩
삼베 한 필의 값어치도 되지 못하리 / 一匹布也不直
趙石磵 云仡 自少奇偉卓犖 不與世低仰 麗季見世亂 托靑盲不仕 入本朝 尹鷄林江陵二府 未幾托病卜居廣州地古垣村 韜晦不見 一日左相上洛金公士衡 歷訪欲勸之一仕 石磵穿濶袖布衫 頂葦笠長揖 不交一語 上洛曰 崛强是老 古態如之何 命駕而還 石磵日騎牛徃來鄭金廣津二院 施濟行旅 嘗自吟曰 騎黃牛傍靑山 麤麤乎其神彩 一疋布也不直 四佳亭 徐居正 筆苑雜記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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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4년 편』에 나오는 석간공의 졸기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어느 날 영의정부사 조준趙浚(1346-1405)은 한강을 지나다가 같은 반열의 재상과 더불어 술과 음식은 물론 악공樂工과 기녀妓女를 거느리고 몽촌 초막에 기거하는 석간石磵을 찾는다. 공은 승려들이 입는 회색빛의 옷과 대껍질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집고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이에 조준은 데리고 간 악공들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고 기녀에게 술을 따르라 했지만, 석간공은 귀머거리인 양 못 들은 척하며, 눈을 감고 꼿꼿이 앉아 “나무아미타불!” 하며 독경만 울렸다. 이에 송당松堂 조준은 겸연쩍게“선생께서는 이를 싫어하는군요” 하며, 이내 풍악을 거두곤 차를 마시며 다음의 시를 남겼다. 관직에 나오라며 간청하는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송당집松堂集』에 전해지고 있다.
석간 조석간의 서당에 쓰다 / 題趙石磵書堂
서재가 작아 크기가 한 두斗나 되려나 / 書室小如斗
쑥대로 바람과 햇살 가리니 / 蓬蒿蔽風日
온 천하보다 넓구먼 / 寬於一天下
사방 벽에는 도서23) 가득하고 / 四壁圖書積
용맹함은 남양의 용24) 같네 / 矯矯南陽龍
허름한 베옷 입고 한가로이 지내건만 / 高臥擁短褐
모든 사람이 한 번 천거되길 바라는데 / 蒼生望一起
고관 알길 머리털만큼이나 생각하려나 / 軒冕等毛髮
- 중간 생략 -
현명한 군주는 어진 인재 등용이 급하니 / 明主用賢急
고집스럽게 한가로이 외면만 하지 마소서 / 愼莫堅高臥
다음 시는 석간石磵이 지은 시에 송강이 차운次韻을 한 것이다. 송당松堂은 이 시에서 본인 역시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려 했지만, 때를 놓쳐 수치스럽다며 속세를 떠난 자연과 함께하는 석간을 부러워하는 서정적인 내용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석간 조 선생의 시운을 빌려 / 次趙石磵先生韻
달 밝은 밤 양강25)에 물 출렁이고 / 明月楊江水
광제루 망루에 솔솔바람 나부끼는데 / 松風廣濟樓
고결한 선비는 대은26)이 되었네 / 高人成大隱
산천초목에는 초가을 찾아들고 / 泉石又新秋
구름 나부끼자 용은 수렁에 숨었네 / 雲斷龍泥蟄
날 어두워지자 학들은 들판에 모여들고 / 天昏鶴野愁
내 일찍이 백로와 맹세했지만27) / 余曾盟白鳥
때를 늦추며 감싸던 수치만 키웠네 / 濡滯起包羞
석간공은 아차산 아래 광나루 강마을(몽촌토성)에 머물면서 틈틈이 수확한 과일 등을 송강에게 보내준 듯하다. 여기에서는 답시答詩 형식으로 수박을 보내준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후렴 2구는 개국초 왕자의 난 등 어지러운 시국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석간 조선생이 수박을 보내와 멀리서나마 시로써 감사를 드린다. / 石磵趙先生寄西瓜以詩遙謝
옥 그릇에 흐르는 감미로운 진액 / 玉斗流瓊液
처사 댁에서 보내 왔군요 / 來從處士家
해마다 흙먼지 이는 세상에 머물며 / 年年塵土下
소평의 오이28)를 대하니 부끄럽구려 / 羞對邵平瓜
다음 시는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강나루의 옛집을 지나며 석간공石磵公을 회상하고 있다. 그와는 백여 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어 살아생전 마주친 적은 없다. 그런 사가께서 고원촌古垣村 옛집 터를 지나다‘해와 달을 옥구슬로 삼고 청풍명월을 제수로 삼았다.’라는 석간의 인정人情에 갈 길을 멈춘다. 그러곤 시詩 한 수를 『사가집四佳集』에 남긴다.
고원촌 조석간의 옛집을 지나며 / 過古垣村趙石磵故居
고원촌에는 벌써 석양이 비끼었지만 / 古垣村裏已斜陽
석간石磵이 살던 터에는 초목만이 무성하고 / 石磵遺居草樹荒
그 인물 영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人物英雄今底處
빈터엔 주인도 자손도 없다는 말인가! / 田園無主子孫亡
석간공의〈금강산을 유람하다遊金剛山〉라는 작품은 『동문선』 22권에 있다. 이 시의 발표연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인 점을 고려한다면 1차 잠행인 갑인년(1374) 상주尙州의 노음산露陰山 밑으로 낙향할 때 또는 2차 잠행 신유년(1381) 광주廣州에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물러나 기거할 무렵 중 하나이다. 나이로 본다면 1차 잠행 시 나이는 42세, 2차는 49세이다. 2차 잠행 시 공의 나이는 49세를 훌쩍 넘었으니 유람하기엔 호락호락한 나이는 아니다.
이 작품은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공의 평소 행동이 기걸奇傑하지만 순박한 모습을 여실히 내비치고 있다. 또한, 목가적 시풍詩風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을 유람하다 / 遊金剛山
빗속의 금강산 협곡을 유람하려는데 / 金剛山下雨中遊
흰 바위는 구름에 가려 봉우린 보이지도 않네 / 白石入雲山無頭
다시금 산속 몽천사에 머물려 하니 / 更宿山中夢泉寺
깜깜밤중 솔바람이 쏴쏴! 뚜드리네 / 松風半夜鳴颼颼
(3) 용재慵齋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다음 내용은 성현의 용재총화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고려의 재신宰臣 조운흘趙云仡은 시국이 어지럽게 될 것이라 알고서, 환란을 피하려고 꾀를 내어 거짓으로 미치광이 노릇을 하였다. 일찍이 서해도 관찰사(우왕 14년, 1388)가 되어서는 언제나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했다. 공公과 서로 친한 수령 한 사람이 있었는데, 창밖에서 와서 “조운흘!”하며 독경하듯 외쳤다. 공은“자네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라고 물으니, 수령은“공의 염불은 성불成佛하기 위함이요, 내가 독경하듯 공을 부르는 것 나 또한 공과 같이 되고자 함이요!” 서로 마주 보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또한 청맹靑盲 질병을 얻었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며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첩이 공의 아들과 사통하며 수작질을 그것도 면전面前에서 하니, 공이 안색을 들어내지 않기를 수년이나 그러했다. 무도한 짓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돌연 눈을 비비며“나의 눈병이 다 낫구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첩을 데리고 강가에 뱃놀이가서 그 죄를 꾸짖고서 강에 던져버렸다. 그가 살았던 별채 마을은 지금의 강나루津廣 밑이다.
공은 사평원沙平院29) 주인이기를 자청하였는데 마을 사람들과 벗 모임을 결성하고 늘 서로 만나 음주飮酒를 하며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잡담하며 여흥餘興을 즐기니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정자亭子의 평상平床에 앉아 있는데, 조정朝廷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는 자 여러 명이 도강渡江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석간공은 시 한 수를 읊조인다.
본 대로 느낀 대로 / 卽事
한나절 무렵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 柴門日午喚人開
숲속 정자까지 걸어 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 步出林亭坐石苔
간밤의 산속 비바람 모질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엔 꽃잎 띄워 오누나 / 滿溪流水泛花來
高麗宰臣趙云仡 知時將亂 謀欲避患 乃詐爲狂誕 嘗爲西海道觀察使 每念阿彌陁佛 有一守令與公相友者 亦來窓外 念趙云仡 公曰汝何以稱我名 守令曰 令公念佛欲成佛 吾之念令公欲爲令公耳 相視大笑 又詐得靑盲疾 辭職居家 其妾與公之子相私 每戱於前 公不露形色者數年 及亂定 忽揩目曰 吾疾愈矣 率其妾遊於江上 數其罪而投之 其所居鄕墅 在今津廣下 公求爲沙平院主 興鄕人結侶 每於飮會相與雜坐 詼諧戱謔 無所不至 一日坐亭上 朝臣貶斥者多渡江 公作詩曰 柴門日午喚人開 步出林亭坐石苔 昨夜山中風雨惡 滿溪流水泛花來 慵齋 成俔 慵齋叢話(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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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광해 3년(1611)에 성소惺所 허균許筠이 편찬한『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성수시화惺叟詩話 편에서 용재 성현成俔의『용재총화慵齋叢話』에 수록된 한시 한편을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때 이미 관직이 현달顯達하였지만, 늘그막에는 미친 척하며 세상을 즐겨 지내면서 사평원沙坪院에 주인이기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당여黨與들이 길에 줄지어 외지로 유배 가는 것을 보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이하 시 부문은 중복을 피해 번역은 생략한다.
趙石磵云仡 在前朝已達官 暮年佯狂玩世 求爲沙坪院主 一日見林廉黨與流于外者相繼于道 作詩曰 柴門日午喚人開 步出林亭坐石苔 昨夜山中風雨惡 滿溪流水泛花來 惺所覆瓿稿卷之二十五 說部四/ 惺叟詩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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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나오는 간지가 기사년(1389)이라 한 것으로 보아 아래 작품은 그해 초봄 서해도 도관찰출척사西海道都觀察黜陟使로 있을 때의 시작詩作 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진년(1390)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우왕을 폐하고 최영崔瑩을 죽였으며, 그다음 해에 창왕을 폐하고 우왕과 창왕이 동시에 처형되며 고려의 권문세족은 몰락한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석간공은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무상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역성혁명의 적극적인 참여보다는 현실 도피적 빈궁한 삶을 선택을 한다.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 않으려는 의지가 작품 속에서 역력히 묻어난다.
제 구월산 소암(題九月山 小庵) 조운흘(趙云仡)
산속에는 무진년에 내린 눈이 아직도 쌓여있지만 /山中猶在戊辰雪
기사년 봄 버들강아지 이미 눈 터뜨렸네 /柳眼初開己已春
세상사 번영과 쇠망 나는 이미 다 보았거늘 /世上榮枯吾已見
이 한 몸 가난하고 궁색한들 한스러움 있지 않다네 /此身無恨付窮貧
(4) 홍장설화紅粧說話
경포대에서 경포 해변으로 가는 길에 좌측으로 조선 후기에 지었다는 누정樓亭 형식의 방해정放海亭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도로 우측으로 호숫가에 경포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홍장암紅粧巖이 있다. 홍장암은 방해정 앞에 이가원李家園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지칭한다. 이 이름은 석간공石磵公 조운흘趙云仡이 부기府妓 홍장紅粧을 아끼고 추모하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관동 안렴사關東按廉使30) 박신(朴信, 1362~1444)31)은 관동지방을 순시하며 출중한 미모를 지닌 강릉 기생 홍장紅粧에 깊은 사랑에 빠진 사연이 깃들어 있다. 「홍장설화紅粧說話」는 바로 박신과 홍장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이 설화는 조선 후기까지 대대로 전해지며 성리학자인 신후담(愼後聃, 1702~1761)에 의해 「홍담전紅粧傳」이라는 소설까지 탄생되었다.
다음 내용은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율기육조律己六條 칙궁飭躬에 수록된 것이다.
조운흘 호는 석간石磵 강릉부사로 있으면서 빈객들과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백성을 번거롭게 괴롭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청백하다고 일컫는다. 하루는 부府의 기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서로 희롱하며 웃으므로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한 기생이 대답하기를“소첩이 꿈에 주관主官을 모시고 잤는데, 이제 친구들과 함께 해몽解夢을 해보았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공이 붓을 찾아 들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마음이 영서靈犀32)같아 뜻이 통했지만 / 心似靈犀意已通
비단이불 함께하기 쉽지 않구나 / 不須容易錦衾同
태수太守33)의 풍정風情이 박하다 이르지 말라 / 莫言太守風情薄
예쁜 여인의 길몽吉夢 속에 먼저 머물렀으니 / 先入佳兒吉夢中
趙云仡爲江陵府使 號石澗 不喜接賓客 不煩擾民間 至今以淸白稱之 一日府妓在席上 相戲笑 公問其故 一妓答云 妾夢侍官寢 今與諸伴解夢耳 公卽索筆題曰 心似靈犀意已通 不須容易錦衾同 莫言太守 風情薄 先入佳兒吉夢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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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朴信이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는데 강원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을 때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정이 자못 두터웠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자 부윤府尹 조운흘이 거짓으로, “홍장은 이미 죽었습니다.” 하니 박신은 슬퍼하여 어쩔 줄 몰랐다. 강릉부에 경포대鏡浦臺가 있는데 부윤이 안렴사를 청하여 나가 놀면서 은밀하게 홍장에게 하여금 곱게 단장하고 고운 의복 차려입게 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놀잇배 한 척을 마련하고, 눈썹과 수염이 허연 백발의 관인 한 사람을 골라 넓고 큰 치렁치렁한 옷자락의 의관을 단장시키고 홍장과 함께 배에 태웠다. 또 배에는 고운 빛깔의 액자를 걸고 그 위에 제목을 달아 시를 지었다.
신라 태평성대 시대의 늙은 안상安詳34)이 / 新羅聖代老安詳
천년 세월의 그 풍류 아직도 못 잊어 / 千載風流尙未忘
사화使華35)께서 경포에 노닌다는 말 듣고 / 聞說使華游鏡浦
난주蘭舟36)에 다시 홍장紅粧 싣고 왔소이다 / 蘭舟聊復載紅粧
하였다. 천천히 노를 저으며 포구浦口로 들어와서 호숫가를 배회하는데 풍악 소리 맑고 그윽하여 마치 공중에 있는듯하였다. 부윤(府尹; 石磵 趙云仡)37)이 안찰사(按察使; 朴信)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옛 신선神仙이 놀던 발자취가 있다. 산 정상에는 차茶를 끓이던 부엌이 있고, 수십 리 되는 곳에 한송정寒松亭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으며, 그곳에 사선비(四仙碑; 安詳·永郎·述郞·南石)가 있다. 지금도 신선들이 그사이를 오고 가고 하므로,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사람들이 혹 볼 수도 있다. 다만 멀리서는 바라볼 수 있어도 가까이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였다. 박신朴信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처럼 아름답고 풍경은 유달리 뛰어난데 마땅히 홍장이 죽었다는 정황情況은 없구려!” 하며 눈시울에 눈물이 가득히 젖었다. 잠시 후 배는 순풍에 밀려 일순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배를 정박하려고 노를 젓는데 그 모습이 심술궂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배 안에 홍장紅粧 기생의 가냘픈 몸매의 아리따움은 노래와 춤으로 사뿐사뿐 너울거렸다. 박신은 깜짝 놀라“이는 분명 신선神仙 속에 있는 사람이구나!” 하며 자세히 보니! 바로 기생 홍장이었다. 한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이같이 매우 흐뭇하게 연회를 파했다.
朴信少有時譽 按江原 愛江陵妓紅糚 情頗珍重 秩滿將還 府尹趙云仡詿云 糚已仙去 朴悼念不自聊 府有鏡浦臺 尹邀廉使出游 密令紅糚 靚飾豔服 別具畫船 選一老官人鬚眉皓白 衣冠褒偉 載紅糚 又揭彩額 題詩其上曰 新羅聖代老安詳 千載風流尙未忘 聞說使華游鏡浦 蘭舟聊復載紅糚 徐徐擊楫入浦口 徘徊洲渚間 絲管淸圓 如在空中 尹語廉使曰‘此地有古仙遺跡,山頂有茶竈 距此數十里有寒松亭 亭亦有四仙碑 至今仙曹神侶往來其間 花朝月夕 人或見之 但可望不可近也’ 朴曰‘山川如此,風景殊異,適無情況!’涕淚盈睫 俄而舟行順風 一瞥直前 老人艤船相棹 形貌詭奇 船中紅妓歌舞綽約蹁躚 朴駭愕曰‘必神仙中人’ 熟視乃紅粧也 一座抵掌大笑 極懽而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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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박신은 이런 시 한 수를 보내왔다.
젊어서 절(節)을 갖고38) 관동에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 少年持節按關東
경포의 흥겨웠던 여흥 꿈속에나 나타나려나 / 鏡浦淸游入夢中
경포호에 난주蘭舟 또 띄워 놀고 싶어도 / 臺下蘭舟思又泛,
쇠잔한 늙은이라고 홍장이 비웃을까 저어하네 / 却嫌紅粧笑衰翁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칙궁飭躬에서 “술을 금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성악聲樂을 물리치며, 공손하고 단엄端嚴하기를 대제大祭39) 받들 듯하며, 유흥에 빠져 정사政事를 어지럽히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며,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자세를 밝히면서 박신朴信의 처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본디 색에 빠져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며 질타를 한다. 그에 반해 석간공은 백성을 번거롭게 괴롭히지 않는 청백한 목민관이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상관上官을 놀려준 것은 잘못이라며, 양비론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목민관의 몸가짐을 논하고 있다.
5. 맺는말
석간공 휘운흘(石磵公 諱云仡)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자신이 갖춘 재능을 한껏 펼쳐보지도 못하고, 고뇌의 삶을 살다간 한 시대의 풍류객이었다.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신선神仙 같은 여유로움이 있어 권력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았다. 고려 말년에는 혼탁한 세상에서 청맹靑盲 질병을 얻었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며 벼슬을 내던졌다. 조선에 들어서는 계림과 강릉 두 곳의 부윤을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있다 핑계하고 광주로 돌아와 은거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찬 묘지명을 짓고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후손이 없다. 해와 달 하여금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 제수祭需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낸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였으니,40)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
라고 하였다. 문장에도 능하고 경사經史도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에도 뛰어났었다. 민생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문학적인 재능도 뛰어났던 분이시다. 풍류를 즐겼으며, 그 정취를 잊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고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고, 이때 「기우도騎牛圖」·「찬석간가贊石磵歌」등의 작품을 지었다는 기록에서 그 참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강릉 홍장紅粧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훼방꾼을 자처한 신선神仙 같은 장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선생이 차운次韻 한 시詩로 석간공石磵公 인물의 면면面面을 대신한다.
내가 서하옹棲霞翁41) 을 사랑함에는 / 我愛棲霞翁
언제나 마음씨 밝고 청렴하며 / 心源常皎潔
마치 저 천 길의 파도처럼 / 有如天丈波
넓고도 넓고 매우 맑고 맑아서라 / 汪汪甚澄澈
미원薇垣42) 에서 바른말로 대적할 때는 / 薇垣抗直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지 / 遺失無毫髮
만년晩年 좌선坐禪에 심취하며 / 晩節托逃禪
돌아와 벼슬을 던져버리곤 / 歸來棄簪紱
앞에 나서고 은둔할 때를 알고 있으니 / 行藏合時宜
속세 벗어나려는 그 마음! 또 달아나려나 / 物外情更逸
야속하도다! 부여잡을 길 없으니 / 邈哉不可攀
고개 들어 구름에 달 가는 허공만 엿볼 뿐이네 / 矯首望雲月
<註> |
1) ‘騎牛’는 동아시아 예술에서 도가적 사유를 상징하는 ‘無爲自然’ 등을 뜻한다. 옛 사대부들은 <騎牛圖>를 걸어두고 세상의 질서와 정의가 무너지면 물러나 지조를 지킨다는 隱逸과 여유의 기상을 길렀으며, 김홍도는 <仙人騎牛圖>에서 자신을‘땅 위의 신선’이라 지칭했다. 이렇듯 속세를 떠나갈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정신적인 은일과 자 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기우정신(騎牛精神)”이다. 철농 이기우 기념전 <騎牛精神: 기우정신>
2) 임금이나 세자가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할 때 경서 등을 강론하는 문관(文官). 대개 집현전(集賢殿)의 학사나 홍문관(弘文館)·성균관(成均館)의 유신(儒臣) 등이 여기에 임명되었다.
3)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두었던 동궁(東宮)의 벼슬이다.
4) ‘고원강촌(古垣江村)’은 옛날에 흙으로 쌓은 담장이나 성루가 있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몽촌토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5)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추밀원(樞密院), 또는 그 후신인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문하부와 밀직사를 가리킨다.
6) 부월(斧鉞)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도끼와 작은 도끼이다.
7) 패면(牌面)은 각종 패(牌)의 넓은 면을 말하나 간혹 고시(告示)하는 의미를 갖는다. 고시문은 목패(木牌) 거죽에 붙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군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8) 식읍은 고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시행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하나이다. 고대국가가 주변 소국을 정복하거나 자발적으로 신속(臣屬)하도록 회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피정복 지역·신속 지역의 민호(民戶)를 헤아려(식읍민) 공로자(식읍주)에게 수여하는 제도이다.
9) 모두 죽은 것을 가리킨다. 행단은 공자의 묘(廟) 앞에 있는 단으로, 공자가 이 단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라쌍수는 사라수(沙羅樹), 쌍수(雙樹), 쌍림(雙林)이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가 《열반경(涅槃經)》을 설(說)하고 입적(入寂)한 곳이다.
10) 고려 말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관직명 앞에 붙인 말로, 검교각신(檢校閣臣)·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11) 고려와 조선시대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관직으로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관하던 문하부의 정2품관으로 정원 2명을 두었는데,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의정부로 개편하면서 의정부문학(議政府文學)으로 개칭되었다.
12) 앞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참조
13) 『조선왕조실록』에는 “著《騎牛讃》,《石磵歌》以見意”로 되어있으나 『高麗史 列傳』에는 “著騎牛圖贊·石磵歌 以見意”로 되어있어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14) 앞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참조
15) 앞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참조
16)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의 공적(功績)을 백성(百姓)들이 고맙게 여겨 그 사람 생시(生時)에 그를 위하고자 모시던 사당(祠堂)을 지칭한다.
17) 조운흘은 전라도, 서해도(西海道), 양광도(楊廣道) 3곳의 안렴사를 지냈는데, 나머지 한 곳은 어디인지 미상이다. 《高麗史 趙云仡列傳》
18) 앞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참조
19) 상주(尙州)에서 서쪽으로 10리쯤에 있는데, 서로악(西露岳)이라고도 한다. 북석악(北石岳), 남연악(南淵岳)과 함께 상산삼악(商山三岳)이라고도 일컫는다.
20) 석간(石磵)은 고려 말 조선 초 문신(1332 – 1404)인 조운흘(趙云仡)의 호(號)이다.
21) 눈이 겉보기에는 멀쩡하면서도 점점 보이지 않아 나중에는 실명(失明)하게 되는 병증. 흑맹(黑盲)이라고도 한다.
22) 추(麤)는 불교적 용어로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비적정(非寂靜) 즉 마음도 몸도 번뇌와 괴로움으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23) 그림, 글씨, 책(冊)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24) 촉한의 서서(徐庶)가 일찍이 유비(劉備)를 만나 자기 친구인 남양(南陽)의 제갈량(諸葛亮)을 천거하면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이다.”라고 했던 데서, 바로 제갈량을 가리킨다.
25) 양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양강이라고 지칭한다. 혹 양화강(楊花江)을 가리키기도 한다.
26) 대은은 속세(俗世)를 초월(超越)하여 조금도 속(俗)된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는 은자(隱者)이다.
27) 백조와 맹세란 바로 백로와 서로 벗이 되어 수향(水鄕)에서 살겠다는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28) 소평(邵平)은 진(秦)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는데,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평민의 신분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에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했던바, 그 오이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동릉과(東陵瓜)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소평의 오이에 빗대어 말한 것이지만 석간이 보낸 수박을 가리킨다.
29) 고려 말에 조운흘(趙云仡)이 은퇴하여 세운 마을 공동체인 원(院) 지금의 강남구 신사동 부근이다.
30) 고려 때의 지방 장관. 안찰사(按察使)를 고친 이름. 조선조 초기에도 지방 장관으로서 태조 2년에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쳤다.
31) 고려ㆍ조선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설봉(雪峰), 본관은 운봉(雲峯)이고, 시호는 혜숙(惠肅)이다. 고려 우왕(禑王) 때 예조ㆍ형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조선조에서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32) 신령스러운 물소. 그 뿔은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어서 양쪽이 통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의사가 모르는 사이에 소통하여 투합(投合)한다는 비유로 쓰인다.
33) 지방관의 별칭. 여기서는 조운흘을 가리킨다.
34) 세칭 사선(四仙) 중의 한 사람으로 안상(安詳)·영랑(永郎)·술랑(述郞)·남석(南石)이 있다. 모두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으로 관동지방을 유람한 적이 있다. 退溪先生文集 攷證卷之八/ 別集詩 鏡浦臺 편에 나온다
35) 사절(使節)과 같은 뜻으로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임무(任務)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강원도 안찰사(按察使) 박신(朴信)을 가리킨다.
36) 목란(木蘭)으로 만든 아름다운 배로 다른 배보다 잘 꾸민 유람선을 일컽는다.
37) 이곳부터는 다산(茶山)이 삭제한 부분이 있어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江原道 江原大都護府을 참고하였다.
38) 절(節)은 임금의 신분을 대표하는 신표(信標)이다. 따라서 여기서 지절(持節)은 안찰사(按察使) 사령(辭令)을 받았다는 뜻이다.
39)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종묘(宗廟)ㆍ사직(社稷)ㆍ영녕전(永寧殿)에서 지내던 큰 제사(祭祀)이다.
40) 앞의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의 조운흘전(趙云仡傳) 참조
41) 공민왕 23년(1374) 전법총랑(典法摠郞)을 사직하고,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밑으로 낙향하여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란 자호(自號)를 짓고 미친 척하며 신분을 숨겼다. 서하옹(棲霞翁)은 조운흘을 지칭한 것이다.
42) 원(元)나라 때 중서성(中書省)의 별칭이며, 고려에서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조선조는 사간원(司諫院)을 지칭한다. 석간공을 일찍이 중서문하성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지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