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왕후
신정익황후조씨神貞翼皇后趙氏 |
신정왕후神貞王后는 1808년(순조 8) 12월 6일 두포荳浦 쌍호정雙湖亭 자택에서 아버지 석애공石厓公 만영萬永과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태어난다. 증조모인 홍씨 부인이 은진송씨가 임신 중에 호랑이와 관련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출생하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며, 상서로운 광채가 집을 에워싸고 새벽녘과 같이 밝으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는 탄생 비화가 전해지고 있다. 왕후의 효성孝誠과 형제간에 우의友誼는 타고난 것이어서 부모님이 식사를 아니 하시면 저녁때까지 감히 먼저 먹지 않았으며, 동기간同氣間에 우애가 깊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고 늘 솔선수범하였다. 비복婢僕들의 어려운 살림을 보면 꼭 베풀어 주었다고도 한다.
1819년(순조19) 순조純祖께서 효명세자孝明世子인 익종翼宗1) 의배필을 간택揀擇하였는데, 왕후는 12세로 선발에 응하여 10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冊封되며 가례嘉禮를 올리니 험난한 왕후의 길에 들어섰다. 왕후가 된 이후에는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를 받들어 모심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일까지 질박하고 성실하게 임하니 두 분께서 효부孝婦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1827년(순조27) 순조는 건강 악화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미리 정치적 분위기를 익히게 하려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실시한다. 그리고 동궁의 요속僚屬들을 배치하여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세력 육성을 꾀한다. 왕후 역시 소리 없는 내조로 온 힘을 다하였다. 그해 7월에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憲宗이 태어났는데 가르쳐 이끎이 의방지훈義方之訓이었으니 학문을 권장하고 덕행을 권면勸勉함이 성군聖君을 만들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1830년(순조30)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22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그는 젊은 세자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며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시도했던 준비된 미래의 권력이었다. 외척인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아버지 순조의 뜻을 담기 위해 19세의 어린 나이지만 혼신渾身의 힘을 쏟았던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은 성군의 자질을 갖춘 분이었다. 대리청정 초기에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정치세력도 재편한다. 최측근들을 이조·병조·호조· 혜청 등 인사와 경제를 담당하는 관서官署에 포진시킨다. 또 새로운 인재 육성에도 관심을 두어 과거 시험의 폐단을 엄금嚴禁하고, 응제應製, 강講, 제술製述 등의 시험 횟수를 늘렸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군영의 군관과 군병에 대한 시재試才를 꾸준히 시행하고, 군사 훈련을 겸한 능행陵幸도 1년에 평균 2회 정도를 거행했다. 오래된 민은民隱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다시 활성화하여 백성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효명세자는 다른 한편으로 조부 정조대왕正祖大王과 마찬가지로 궁궐의 영건營建에도 힘을 기울였다. 상세하게 세부 묘사를 한 동궐도東闕圖2) 를 만들고, 연경당演慶堂3) 등 창건에도 힘을 쏟았다. 연경당에 익종翼宗의초상화를 모셔 놓았던 것도 이와 무간하진 않은 듯하다.
효명세자의 두드러진 점은 이뿐 아니다. 짧은 생애生涯에도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뛰어나 남다른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400편이 넘는 시詩를 지었다. 『경헌집敬軒集』등 다수의 문집을 남겼다. 궁중무용인 정재무呈才舞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연회와 관련된 예술이라 평가된다. 그가 청정聽政한 3년 동안, 순조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등 해마다 부왕父王과 모후母后를 위해 큰 연회를 자주열었다. 효명세자는 이런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직접 만들었다.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은 궁중무용인 정재무呈才舞4) 를 다수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조선말까지 전해지는 53수의 정재무 중 절반인 26수를 직접 창작하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대규모의 궁중 연회를 거행하는 데 주력한 까닭은 효심의 발로와 정치적 포석이라고 한다. 세자는 유교의 근본인 예악禮樂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려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효명세자는 그 포부를 펼치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정조를 빼닮은 왕세자, 정조처럼 백성을 아끼고 사회제도를 바꿔보려는 의지가 강한 성군의 자질을 갖춘 세자였는데 그가 펼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순조께서는“청명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며 사랑스러운 아들을 자랑했지만, 조선의 국운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감수성이 뛰어났던 효명세자가 어느 여름날 궁궐의 한가로움을 노래한 시 한 수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 천진스럽기만 하다.
하늘 끝 뭉게구름 오색의 햇살은 길기만 하며/ 天際炎雲夏日長
그림 같은 짙은 해그림자 붉은 담장에 이르니/ 濃陰如畫到紅墻
바람도 쉬려고 섬돌에 이루면 매미도 반겨 울고/ 玉階風息蟬鳴好
꽃잎 떨어지자 나비는 날아 내 평상平床을 얼찐거린다/ 花蝶飛飛入我床
영조, 정조가 검소했듯이 효명세자도 역시 절제력이 돋보인다. 식사 중에 밥알을 떨어뜨리면 주워 먹었고 비단옷도 멀리했다 한다. 세손(헌종憲宗)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자 "어린아이에게 어찌 비단옷을 입히는가. 나도 입지 않는다. 빨리 다른 것으로 입히라”라 하며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한 세자 부군께서 승하하였으니 신정왕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는가! 제때 식사도 거르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우시니 주변 분들이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다 한다. 그러나 동동憧憧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능한 한 본인의 슬픔은 감추며 양전兩殿을 위로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니 그 슬픔은 가슴 한구석 한으로 맺혔을 것이다.
1834년(순조34)년 순조純祖가 승하하자 이해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아들 헌종憲宗은 즉위한다. 그러나 정상적 집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따라서 신정왕후는 순조의 어머니이고 왕대비가 되니 수렴청정을 주도해야 했다. 그러나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妃)가 계셨다. 순조의 친정親政 길이 열린 것은 7년 후의 일이었다. 순조는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민생고民生苦가 가시지 않았고, 이양선異樣船 출몰 등으로 민심마저 흉흉하였다. 왕실의 비극은 야속하게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1849년 헌종마저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後嗣도 없이 승하한다. 조선왕조 몰락을 알리는 시그널이기도 했다.
1849년 철종哲宗은 19세의 나이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 대왕대비와 가까운 당내 간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순조, 헌종에 이어 철종까지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왕비王妃 삼대를 배출하며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절정에 달한다.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하며 진주·함흥·전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난다. 한편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虐政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되었고,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失勢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뜻 한번 펼치지도 못하고 병사病死한다.
1863년(철종14) 12월 철종이 승하하자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왕의 계승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1857년(철종8)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별세하며 대왕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르기를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으로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대왕대비는 하교를 내렸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이면에는 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익종비翼宗妃인 신정왕후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이때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은 세도의 화를 피하려고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했다고 한다.
흥선군이 불교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대부분 흥선군이 먼저 사찰을 중창하면 왕후와 상궁들 왕실 여성들이 뒤이어 사찰에 후원에 동참하는 형식이다. 신정왕후 조씨 일가의 후원으로 서울 보문사普門寺의 중창이 이루어졌을 때는 흥선군이 시주로 동참했다. 흥선군은 스스로 불교에 신앙적으로 의지하는 한편, 신정왕후와 불교를 통해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었다.
철종은 헌종에 이어 즉위를 했으나 순원왕후의 지시로 순조의 아들로 입적했다. 익종은 물론 헌종도 배제가 되었다. 이에 신정왕후는 명으로 효명세자 즉 익종을 계승하게 고종高宗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이는 철종을 자기 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던 순원왕후의 결정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한 듯도 하다. 신정왕후는 조선 후기왕조 계통도를 정조→순조→익종→고종으로 이어지게 하여 철종을 배제한다. 어떻든 친자인 헌종과 더불어 양자인 고종을 왕위를 잇게 하여 효명세자의 정통성과 산정왕후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고종高宗이 입후入后되며 신정왕후는 왕통으로 당당히 국왕의 어머니가 되고, 흥선군은 국왕의 생부生父이다. 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고종의 즉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인 안동김씨安東金氏에 맞서기 위해 정치적으로 신정왕후와 흥선군을 더욱 협력하게 했다. 당시 고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이에 신정왕후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는 제도를 통해 국정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신정왕후는 고종 즉위와 동시에 1866년(고종3) 2월 13일까지 약 2년간 수렴청정을 한다.
신정왕후는 주로 차대次對와 소견召見을 통해 발을 치고 신하들과 대면하였다. 특히 신정왕후는 수렴청정 기간에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사회적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경복궁景福宮 중건은 익종翼宗과 헌종憲宗 두 성조께서 이루지 못한 유지였다. 과거시험의 사회적 폐단과 서얼허통庶孽許通의 문제를 개선하려 하였다. 국가 기강 확립을 위해 고질적인 병폐인 장오죄贓汚罪5) 를 엄히 처분하고 형정刑政의 시행을 엄격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신정왕후가 추진한 정책의 상당 부분은 앞에서 언급된 남편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 청정기에 추진했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신정왕후는 경복궁景福宮 중건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1865년(고종 2)「조선왕조실록」에 대왕대비의 경복궁 중건을 명한 전교傳敎 내용이다.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 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한 것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볼 수 있거니와 정령政令과 시책이 다 바른 것에서 나와 팔도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복을 받은 것도 이 궁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 중간 생략 -
익종翼宗께서 정사를 대리하면서도 여러 번 옛 대궐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개연히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고, 헌종憲宗께서도 그 뜻을 이어 여러 번 공사하려다가 역시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효명세자 대리청정 기간에 동궐도東闕圖를 제작하였고 헌종 재위 기간에 궁궐지宮闕志를 편찬한 바 있다. 게다가 신정왕후의 조부 가정공 진관(柯汀公 鎭寬)은 1804년(순조 4)에 인정전 영건도감 제조에 차임差任된 바 있으며, 부친 석애공 만영(石厓公 萬永)은 1831년(순조 31) 서궐 영건도감 제조, 1834년(순조 34) 창덕궁 영건도감 당상을 역임했다. 이렇게 신정왕후의 조부와 부친도 궁궐 역사役事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정왕후가 궁궐 영건(宮闕營建)에 깊은 관심은 부군인 익종의 영향이 컸지만, 친정 조·부모님의 궁궐 역사도 일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왕대비는 1866년 4월 경복궁 연건도감 설치를 명하고 도제조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으로 삼았다. 그리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실질적 권한인 총괄책임을 맡겨 경복궁 연건공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 강화를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백전當百錢6)과 원납전願納錢7)으로 경제구조를 흐려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한 부작용도 일면 있었다.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 공사가 진행되면서 조선 건국의 정체성도 강조하는 일련의 조처가 내려진다. 조선조 개국의 설계자인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복권이다. 건국의 국가경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 정착시킨 개국 공신인 삼봉의 복권復權 명분은 경복궁 전각명칭 작명에 대한 찬양이었다. 정도전이 증시贈諡와 훈봉勳封으로 조선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중건의 의미는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제사도 치르게 한다.
이렇듯 신정왕후가 수렴청정 기간 왕실의 권위 강화와 그동안 추진되었던 정치·사회적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쇄신정책 추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 역시 선왕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효명세자의 개혁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하였다. 신정왕후는 남편 효명세자가 국왕으로서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요절한 응어리진 한이 있다. 고종은 이를 풀어 들이기 위해서도 국정쇄신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고종이 가례를 준비하며,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가 초간택 직후 친정체제親政體制가 선언된다. 신정왕후가 급하게 철렴撤簾을 결정한 배경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등 불안한 국제정세도 일조하였다. 그 이후로 신정왕후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고종의 친정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어떤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하지를 않았다.
신정왕후의 정치적 기반은 고조부高祖父인 학당공 상경(鶴塘公 尙絅, 1681~1746) 때에 마련되었다. 김창협金昌協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10년에 문과급제하여 대사헌·경기도 관찰사에 이루고, 형조·공조·이조판서·우참찬을 역임한다. 판돈녕부사·한성부 판윤을 끝으로 사망하며 노론의 중심인물이다.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아들은 3자三子를 두니 돈暾·엄曮·정晸으로 모두 문과 급제한다. 이중 증조부는 영호공 엄(永湖公 曮, 1719~1777)으로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 아니라 경륜도 뛰어났다. 경상도 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대사간·한성부우윤, 예조·공조의 참판 및 공조·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조부는 가정공 진관(柯汀公 鎭寬, 1739~1808)이다. 문과 구현시 장원이 되어, 전라도관찰사·병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두루 거쳐 1800년(순조 즉위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아들은 만영萬永·원영原永·인영寅永이 있다.
석애공 만영(石厓公 萬永, 1776~1846)이 바로 신정왕후의 아버지가 된다. 문과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1819년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때 그의 딸이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으로 책봉되었다. 뒤이어 이조참의·대사성·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 예조·이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호위·어영·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불안한 왕실을 보호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 아들의 앞선 죽음 등으로 말년 편한 삶은 아니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며,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이다.
신정왕후는 도봉산 자락에 있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만장사’라는 절터에 별장을 새로 짓고 말년을 보냈다. 치열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발 물러나 안식을 찾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1890년(고종 27년) 4월 83세의 나이로 경복궁景福宮 흥복전興福殿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신다. 1899년 익종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자 신정왕후도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함께 추존된다. 물재공 강하(勿齋公康夏)가 찬撰한 행장은 황후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후비后妃의 덕德으로는 주周나라의 임사任姒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었고 송宋나라의 선인태후宣仁太后도 “여인 중의 요순堯舜”칭송을 받았다. 왕후께서는 임사任姒와 같이 성聖으로 요순堯舜처럼 정사政事를 실행하여 공功은 사직社稷에 남고 그 혜택은 백성에 미쳤다. 이로써 억만년의 원대한 계획을 남기고, 길게 편안하고 융숭한 봉양奉養을 받으며 하수(遐壽: 오랜 삶)를 누리셨다. 성군 자손들의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더욱 도타웠으니“하늘은 순천順天한 사람을 돕고 길吉한 사람을 보우保佑한다.”라는 이치를 여기에서 검증할 수 있다.
뭇 신하들의 주청奏請을 기다릴 것도 없이 수렴청정을 단호하게 철폐撤廢하였으니 그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은 송宋나라의 선인태후宣仁太后가 따를 바가 아니다. 아아! 성대하도다.
自古后妃之德 莫盛於周之任姒8)而宋宣仁太后 宣仁太后9)有女中堯舜之稱 后以任姒之聖 行堯舜之政 功存社稷 澤及斯民 以詒燕謀10)於億萬斯年 而養隆長樂 享有遐齡 聖子神孫 誠孝彌篤 助順佑吉 之理斯可徵矣 至於不待羣臣之請 而勇撤儀鸞11)光明正大 又非宣仁所能及也 嗚呼盛哉
<註> |
1) 익종(翼宗)은 조선 시대의 24대 임금 헌종의 부친이며 추존왕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로 더 알려져 있다.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1세에 관례를 치렀고 같은 해에 신정왕후와 혼인하였다. 외척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뜻에 따라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2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2)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상세하게 그린 궁중회화로 199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3) 궁궐의 후원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안채·안행랑채·바깥행랑채 반빗간·서재·후원·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춘 주택건축이다. 실제 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 및 집 전체를 가리키는 당호(堂號)이다.
4) 고려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여령이나 무동이, 지방 관아에서 기녀들이 공연했던 악가무의 종합예술로서 정재라는 용어의 첫 번째 뜻은 ‘재주를 보인다’는 광의의 의미로 쓰였다. 『석보상절(釋譜詳節)』(1447)에 “정재는 재주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니, 놀이하여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정재라 한다”라는 용례가 있다. 두 번째 뜻은 헌기(獻技), 즉 춤뿐만 아니라 모든 재예(才藝)를 드린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차츰 궁중무의 대명사처럼 사용하였다.
5) 관리가 관청 소유의 물품을 사적으로 취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거나 뇌물을 받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구하는 행위에 관한 죄다.
6) 1866년(고종 3) 11월에 주조되어 6개월여 동안 유통되었던 화폐로 경복궁 중건을 위해 흥선대원군 주도로 모양과 중량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으나, 상평통보보다 100배의 명목 가치로 통용시키기 위해 주조되었다.
7)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 중수를 위하여 강제로 거둔 기부금이다.
8) 周之任姒 = 주(周)나라의 태임(太妊)과 태사(太姒). 태임은 주나라의 왕계(王季)의 비(妃)이고, 문왕(文王)의 모후(母后), 태사는 문왕의 비(妃)이고 무왕(武王)의 모후(母后)인데 모두 불세출(不世出)의 현후(賢后)였다.
9) 宣仁太后 =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비(妃)요, 신종(神宗)의 모후(母后), 9년간을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는데 여자 중에 요순(堯舜)이라는 말을 들었다.
10) 燕謀 = 자손이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대한 계책. 연익지모(燕翼之謀)
11) 儀鸞 = 거동하는 난새. 즉 왕후의 수렴청정을 지칭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