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묘 복원 상소문

시조묘 복원 상소문

글자작게 글자크기 글자크게

ma01.png 시조묘 복원 상소문(請復始祖墳疏)

포저 익(浦渚 翼)1) 상소문

 

인조 8년(1630) 5월 20일에 부호군 조수이趙守彛, 선공첨정 조영중趙瑩中, 행부호군 조즙趙濈, 부제학 조익趙翼, 부호군 조유정趙惟精, 사간 조방직趙邦直, 전현감 조흡趙潝, 정랑 조직趙溭, 동몽교관 조기원趙基遠, 별제 조확趙㴶 현학 조민趙珉, 조보양趙普陽, 조복양趙復陽 등은 상소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신 등의 시조始祖인 조맹趙孟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관직이 상주국上柱國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공훈을 인정받아 통합삼한 벽상 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는데, 묘소가 풍양현豐壤縣에 있습니다. 이는 대개 시조가 본래 풍양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그 뒤로 자손들이 풍양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조宣祖朝에 공빈恭嬪이 갑자기 서거하자, 묘산墓山을 찾은 끝에 시조의 묘소 뒤쪽의 같은 기슭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당시에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창서鄭昌瑞가 왕명을 받들고 가서 장례에 대한 일을 살펴보던 중에 신 등의 시조인 조맹의 무덤 앞 표석標石이 땅에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관함官銜과 성명을 확인한 뒤에 돌아와 아뢰었더니, 선조宣祖께서 “조맹은 나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듣건대, 공빈의 선조 역시 풍양조씨豐壤趙氏의 외손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풍양조씨가조맹 이래로 지금까지 7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의관衣冠의 가문으로 전해 내려온 만큼, 나라 안의 세족世族 가운데 풍양조씨의 외손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고도 하겠습니다.

 

이 산이 일단 공빈恭嬪2)  의 묘산이 된 뒤에 조맹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났는데, 선신先臣인 사예司藝 조정추趙廷樞가 당시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재직하면서 상소하여 진달하자, 선조宣祖께서 그 묘소를 봉분封墳한 그대로 놔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광해光海 때에 이르러 공빈을 추존追尊하여 그 묘소를 능陵으로 승격시켰는데, 당시에 봉능도감封陵都監이 능 안의 분묘는 관례상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아뢰자, 광해가 지관地官인 이의신李懿信과 신의申誼 등에게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그대로 놔두어도 해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시조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론이 일어나자, 광해가 다시 대신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에게 의론하도록 하였는데, 이덕형이 의론을 올리기를 “타문에서 혹 이야기하는 말을 들어 보면, 조맹은 바로 고려 초기의 재상으로서 나라 안의 귀한 문벌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대수代數는 비록 멀다 할지라도 그의 외손이 되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당초에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할 적에도 그 계파系派가 멀리 조맹과 관계된다는 이유로 피혐避嫌3)  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의 진위眞僞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평평하게 만든 묘소를 꼭 파낼 것까지는 없고, 단지 나무를 심어서 산의 형세를 꾸미게만 해도 무방할 듯하다.”라고 하였으므로, 조맹의 분묘가 파헤쳐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시에는 보첩譜牒이 모두 있었는데 난리를 당한 뒤로 흩어져 없어졌고, 다행히 남아있는 것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외손들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상고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첩에, 조계령趙季鴒의 아들이 염휘炎暉이고, 염휘炎暉의 사위가 원의元顗이고, 원의의 사위가 변안열邊安烈이라는 기록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원씨元氏와 변씨邊氏의 족보族譜를 구해서 찾아보았더니, 대체로 세 가문의 족보가 서로 부합되었는데, 조염휘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서 우부대언 겸 좌상시右副代言兼左常侍였고, 원의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서 판추밀원判樞密院 상호군上護軍이었고, 변안열은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영삼사사領三司事요 또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안열의 묘소도 풍양에 있는데, 평시에 자손이 세운 그 비석의 음기陰記에 내외손의 명단이 완전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 음기를 가져다가 확인해 보니, 바로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 13)에 세운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기재된 후손들을 보건대 부사府使 변영청邊永淸과 병사兵使 변협邊協 등 30여 인이 있었고, 외손으로는 영의정 홍섬洪暹, 부원군府院君 박응순朴應順, 광천군廣川君 수기壽麒, 하원군河原君 정鋥, 좌찬성左贊成 정대년鄭大年, 하릉군河陵君 인鏻,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예조판서禮曹判書 홍담洪曇, 동지돈녕同知敦寧 심봉원沈逢源, 대사헌大司憲 백인걸白仁傑,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유수留守 심의겸沈義謙 및 이원익李元翼, 한효윤韓孝胤 등 200여 인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조염휘의 손서孫壻인 변안열 일파一派의 자손만 해도 이처럼 번성하였으니, 만약 보첩이 완전히 보존되어 조맹 이하 대대의 자손들을 모두 상고해 볼 수 있다면, 나라 안의 명족名族 중에 그의 외손이 아닌 경우는 필시 드물 것이요, 그 후손이 된 것이 중첩되는 경우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공빈恭嬪의 분묘가 국가의 능이 아니게 되었으니, 조맹의 분묘도 평평하게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기에, 신들이 상의해서 그 분묘의 형태를 원상으로 복구하려고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산이 예전에 국가의 능이었던 만큼 지금 능이 취소되었다 하더라도 이 분묘를 복구하면서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시조 조맹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천세千歲의 대공大功을 세우고서 700여 년 동안 국가의 대족大族의 중조衆祖가 된 것과, 선왕先王께서 그 분묘를 봉분한 상태 그대로 놔두도록 예전에 명하셨던 일과, 지금은 또 국가의 능이라는 혐의 때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 된 점 등을 굽어살펴 주소서. 그리하여 흙을 쌓아 봉분하는 일을 특별히 허락하시어 후세에 길이 알아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의 다행은 없겠습니다. 신들은 지극히 격동되고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 상신한 상소문인 계啓는 해당 부서인 예조에 내려보냈다. -

 

 

 

[원문]

 

請復始祖墳疏

庚午五月二十日 副護軍趙守彛 繕工僉正趙瑩中 中行副護軍趙濈 副提學趙翼 副護軍趙惟精 司諫趙邦直 前縣監趙潝 正郎趙溭 童蒙敎官趙基遠 別提趙㴶 玄學趙珉 趙普陽 趙復陽 等上疏 伏以臣等始祖趙孟 佐高麗太祖 官至上柱國 三重大匡 門下侍中 平章事 賜勳爲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而墓在豐壤縣 蓋本豐壤人 而子孫因以豐壤爲本 宣祖朝恭嬪卒逝 擇山得其墓後同麓葬焉 其時濟用監正鄭昌瑞承命往視葬事 得臣等始祖孟墓前標石仆在地 見其官銜姓名 還以啓 宣祖謂趙孟於我亦外祖也 臣等竊聞恭嬪之先 亦係豐壤外裔云 蓋豐壤之趙 自趙孟以來至今七百餘年爲衣冠族 國中世族 鮮有不爲其外裔者也 此山旣爲恭嬪墓山 趙孟墓有夷之之議 先臣司藝趙廷 樞其時爲承文博士 上疏陳之 宣祖命封其墓 至光海時 追尊恭嬪 陞墓爲陵 其時封陵都監啓陵內墳墓 例當遷移 光海問于地官 李懿信 申誼等對以於地理存之無害 遂平其墳 又議于大臣領議政李德馨 議云 外間或云趙孟乃麗初宰相 國中貴閥 代係雖遠 多是其外裔 當初玄宮奉安時 亦以其干係遠派而不避云 此言未知眞贗 果若此言 不必發已夷之土 而但種樹木以飾山形 亦恐不妨 以是趙孟墓得不拔 平時譜牒具在 亂後散失 幸而存者亦不全 其外裔之蕃 無從而考 而獨臣等所有譜 載趙季 鴒子炎暉 炎暉女壻元顗 顗女壻邊安烈 臣等求得元氏 邊氏族譜 蓋三譜相符 而趙炎暉 正順大夫 右副代言兼左常侍 元顗 銀靑光祿大夫 判樞密院 上護軍 邊安烈 三重大匡 門下贊成事 領三司事 原川府院君云 而邊安烈墓亦在豐壤 平時子孫爲立碑 內外孫備錄於其陰記 臣等取見其陰記 乃萬曆庚辰年所立 距今五十年矣 其所載姓孫 府使邊永淸 兵使邊協等三十餘人 外孫則領議致洪暹 府院君朴應順 廣川君壽麒 河原君鋥 左贊成鄭大年 河陵君鏻 礪城君宋寅 禮曹判書洪曇 同知敦寧沈逢源 大司憲白仁傑 大司憲朴應男 留守沈義謙及李元翼 韓孝胤等二百餘人云 趙炎暉孫壻邊安烈一派 子孫之盛乃如是 若譜牒具存 使備考趙孟以下世世子孫 則國中名族 其不爲外孫者必少 而其爲後裔重疊者亦必多矣 今者恭嬪墓不爲國陵 趙孟墓無夷之之理 臣等相議欲復其墳形 第念此山曾爲國陵 今陵雖罷 復此墓 不可不上聞 伏願聖明俯察臣等始祖孟有統合三韓千歲之大功 而爲七百餘年國中大族之衆祖 先王嘗命封其墓 而今又無壓於國陵之嫌 特許封植之 使後世有所識焉 不勝幸甚 臣等無任激切屛營之至

 

 

 <>

  1) 조선 선조·인조·효종 때 문신·학자(1579~1655).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 시호 문효(文孝), 문과급제, 예조판서, 좌의정 등. 경학(經學)·예학(禮學)에 밝으며,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였다. 저서에《浦渚集》,《浦渚遺書》,《朱書要類》,《家禮鄕宜》 등이 있다. .

  2) 광해군(光海君)의 생모로 성은 김씨인데, 선조(宣祖) 10년에 죽어서,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는 조맹의 무덤 뒤쪽 30보쯤 되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 뒤 광해군 2년에 공빈을 추숭(追崇)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그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그 휘호(徽號)가 취소되었으므로, 포저가 시조의 묘소를 원상 복구할 목적으로 이 소를 올린 것이다.

  3) 헌사(憲司)에서 논핵하는 사건에 관련된 벼슬아치가 벼슬에 나가는 것을 피하던 일.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