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묘 수난사
시조묘(始祖墓)의 수난사 |
우리의 시조인 시중공 묘소가 평장平葬이 되어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기가 막힐 왕조王朝의 횡포가 있었으니 그 사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조宣祖 10년에 후궁인 공빈恭嬪 김씨가 죽는다. 재색이 출중했던 그녀는 선조의 총애를 받으며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가 어머니와 이별한 것은 세 살 때였다. 그 당시 조정은 공빈 김씨의 장지를 풍양현 적성동에 있는 우리 시중공 묘소로부터 30보쯤 뒤쪽으로 정한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었다. 전직공파의 사예공司藝公 정추廷樞는 장지가 시중공의 묘소와 너무 가깝다며 상소上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선조는, “공빈의 선대가 조씨의 외손이니 그대로 장사지내라!!" 명한다.
그 후 광해는 선조에 이어 조선조 15대 임금이 된다. 왕위에 오른 뒤 광해는 생모인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묘호墓號를 성릉成陵으로 올리며, 바로 30보 앞에 있는 시중공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한다.
광해 3년 5월 11일 경술庚戌, 봉릉도감封陵都監이 아뢰기를
“ - 축약 -신들의 의견은 오직 한시바삐 옮기도록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손들을 찾아 물어서 그들에게 하여금 즉시 옮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종원 중에는 삼척부사 조희보趙希輔, 홍문관교리 조즙趙濈, 전수찬 조익趙翼, 예빈시참봉 조수이趙守彝, 진사 조척趙滌 뿐이라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3년(1611년) 편에 기록되어 있다.광해가 다시 전교하기를 “알았다. 조맹의 무덤을 옮길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다시 상지관相地官과 더불어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지관 김여견金汝堅이 이에 답하기를“ - 축약 - 조맹 묘가 신혈(神穴; 공빈의 묘혈을 의미함) 아래로 30여보에 있는데 그사이에는 또한 조그마한 둥그런 봉우리가 막고 있고, 거의 800여년이 되어감에 따라 무덤의 형체가 없어지고 해골도 이미 흙이 되었을 것이니 재앙과 복으로 따져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축약 - ”하였다.
영의정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은 역시 “조맹은 고려 초의 재상이며 문벌 가문으로 내외 손 또한 많으며 공빈도 원파遠派로 관련이 있으니 평평해진 무덤은 파낼 것 없이 나무를 심어 치산만 하는 것도 무방하다.” 하니 이원익李元翼, 윤승훈尹承勳 등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 이후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봉능도감제조가 묘소를 와보고 파낼지 조속히 결정할 것을 주청하니 왕(광해3년, 1611년)은 이장하지 말라고 평장平葬을 하라고 명한다. 그렇게 시중공 묘소의 봉분은 파손되고, 평토平土로 광해 시대에 방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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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즉위 16년 만에 서인들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폐위가 된다. 따라서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었던 김씨도 공빈으로 다시 추삭되며, 성릉成陵이라는 능호도 역시 혁파된다. 그러나 시중공 묘는 여전히 봉분도 표석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많은 종원이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단합된 힘을 과시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 8년(1630년) 5월 20일 포저공 익(浦渚公 翼)이 글을 짓고, 한풍군 수이(漢豐君 守彛) 등 13명의 “청개봉분소請改封墳疎”명으로 상소를 한다.상소문에서 포저공은 공빈의 묘가 이제는 국능國陵이 아니니 조맹의 묘가 평장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복원시킬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간곡히 호소한다.
인조는 그 문건을 예조에 내려보내 처리하라고 하니 곧 예조로부터 복원해도 된다는 회답을 받는다. 그 회답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능호陵號가 혁파되었으니 사리事理 상으로도 마땅히 그 땅을 원상회복하여 묘의 형태를 되찾도록 해야 할 것이며, 조정에 여쭈어 의논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사안事案입니다.”라고 이다.포저공 익을 비롯한 4인 등은 인조 8년(1630년) 전국에 있는 종원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복원에 따른 경비협조를 요청한다. 이러한 변고를 겪으면서도 우리의 시조이신 시중공 휘 맹은 아직도 천마산 적성골에 고려 개국공신의 품위를 잃지 않고 위풍당당이 있으시다. 이것 또한 후손들의 큰 홍복洪福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는 시조묘 경변곡절, 조선왕조실록에서 본 곡절, 사신 척(士新 滌, 1573 ~1616)의 시조묘 봉변 알림문, 포저 익(浦渚 翼, 1579~1655)의 시조묘 복원 상소문, 판서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시조묘 복원 예조 회답문, 익·척·정(翼·滌·靖) 등의 시조묘 복원 출물 통지문, 포저 익의 묘소복원 때 제문 들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