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도문과 행장이란?
묘도문墓道文과 행장行狀이란? |
1. 묘도문墓道文 개요
묘도문墓道文은 신도비神道碑,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으로 구분하는데 돌아가신 조상의 성명 ·세계世系 ·행적, 출생 ·사망 ·장례의 연월일, 자손의 개황槪況 등을 기록하여, 2품 이상의 관직을 하신 분의 묘도墓道 즉 묘로 가는 길 입구에 세우는 비를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고 하며, 묘소 앞에 세우는 푯말이나 표돌, 표석을 묘표墓表 또는 묘갈명墓碣銘이라 하며, 그리고 돌아가신 사람의 이름·신분·행적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을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한다.
여기서 명銘이란? ‘새긴다(각야 刻也)’이다. 곧 명은 기물에 글을 새겨넣는다는 뜻을 지닌다. 묘도문에서 명은 훌륭한 덕과 착한 행실이 있거나 드높은 큰 공적이 있어 세상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표師表의 공적功績을 칭송稱頌하기 위해 글의 끄트머리에 명으로 마무릴 한다. 따라서 명이 포함되면 비명碑銘·갈명碣銘·지명誌銘이라 한다. 그러나 자식 또는 직계후손이 묘도문을 짓는 경우 명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禮誼라서 그때는 비문碑文·묘갈墓碣·묘지墓誌라 칭한다. 명에는 후손들이 지켜야 할 훈계 또는 망자의 역사적 평가 및 명을 쓰게 된 동기 등을 밝혀주는 병서幷序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행장行狀이란? 행行이 행동거지를 의미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행장은 돌아가신 분의 행실을 간명하게 써서 보는 사람에게 돌아가신 분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간단한 망자의 소개서이다. 행장은 가문家門의 행적을 기술하여 묘비명·묘지·묘갈명·연보 등을 작성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며, 증시贈諡의 대상이 되는 관인(정2품 이상)·공신功臣의 경우에는 시호諡號 상정의 토대가 되는 공적서인 것이다. 따라서 가문과 고인의 행적를 후손이 기록한 것을 가장家狀이라 하며, 시호 상정의 토대를 위해 당대 문인이 작성한 것을 시장諡狀이라 한다. 이를 통칭 행장行狀이라고 한다.
이 모두 조상祖上의 공덕功德을 널리 현양顯揚하고자 함이다. 여기서 가장家狀과 행장行狀, 그리고 묘도문墓道文은 신도비神道碑,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으로 구분하여 원문과 번역문을 선택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2. 묘도문墓道文
비갈문화碑碣文化는 그 연원淵源이 중국 고대古代로 올라가지만, 한자 문화권인 우리나라 또한 자연스럽게 비갈제도碑碣制度의 발달을 이루게 된다. 비갈碑碣이라는 문자는 비碑와 갈碣로 구별이 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표表, 명銘, 지誌, 서序 등 다양한 용어들이 쓰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비碑 또는 갈碣이란 글자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중국 한대漢代 이후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때까지만 해도 이를 각석刻石 또는 입석立石이라고 했다. 비갈碑碣이란 바로 이 각석刻石 또는 입석立石에 대한 새로운 명명命名으로 모난 것을 비碑라 하고, 둥근 것을 갈碣이라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것들을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混用하여 쓰다가, 차츰 나라에서 이에 대한 제도적인 규제規制를 가하면서 구분이 생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2-1 묘비명墓碑銘 또는 묘갈명墓碣銘 그리고 묘표墓表
비碑란 무엇인가? ‘네모나게 다듬은 돌기둥’이다. 《中文大辭典》 등에 의하면, 원래 비碑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발달해 왔다고 한다. ①“宮中之碑 識日景也”라 하여 궁중宮中의 뜰에 세웠던 ‘해시계 용 돌기둥’과, ②“廟中之碑 以麗牲也”라 하여 제사祭祀에 쓰는 우양牛羊 등의 ‘희생犧牲을 매어두는 사당祠堂의 돌 말뚝’과 ③“墓所之碑 以下棺也”라 하여 장사지낼 때 광중壙中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은 돌기둥을 세우고 도르래를 설치한 다음 밧줄을 걸어서‘하관下棺하던 녹로장치轆轤裝置’가 그것인데, 후대後代의 덕정비德政碑 등에 구멍이 남아 있는 것은 이 하관용下棺用 돌기둥의 구멍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이 기둥에 사자死者의 공덕功德 등을 새기는 풍습이 생겨서 이것이 비갈제도碑碣制度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 궁중 뜰의 푯돌이나 사당 안의 돌 말뚝 또한 모두 비碑라는 이름으로 발달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碣이란 무엇인가? ‘특립지석特立之石’ 곧 ‘우뚝하게 솟은 둥그스름한 돌기둥’이다. 원래 ‘갈’이란 발음은 고대의 중국어中國語에서 ‘우뚝 솟은 것’ 또는 솟대처럼 ‘우뚝하게 세운 것’을 가리키던 말로서, 옛날 중국인들은 나무로 세운 표지標識를 무엇이나 다 ‘갈(楬-푯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무덤 앞에 돌 푯말을 세우는 풍습風習이 생겨서, 이것이 곧 비갈碑碣의 뜻으로서 ‘갈碣’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처럼 연원淵源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별다른 구별 없이 혼용混用되어 오던 비碑와 갈碣이란 말이, 수당시대隋唐時代에 와서 관직官職과 연계連繫한 비갈제도碑碣制度의 법제화法制化가 실시되면서 비로소 그 사용에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5품관五品官 이상은 귀부(龜趺-거북받침)와 이수(螭首-용트림 비 머리)를 쓰게 하여 비碑라 하고, 6품관 이하는 방부(方趺-四角臺石)와 원수(圓首-둥근 비 머리)를 쓰게 하여 갈碣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그 높이와 넓이 등의 규정이 더욱 세밀화되어 왔다고 한다.
글자를 새긴 무덤의 석물石物 중 가장 단순한 것이 표석表石이다. 표석이란 “아무개의 무덤”이란 간단한 표지標識만 있을 뿐 음기陰記가 없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묘표墓表인데, 음기陰記는 있으나 명銘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다 명銘을 붙이면 비명碑銘이 되고 갈명碣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비碑, 갈碣, 표表가 모두 뚜렷한 구별 없이 혼용되어 왔는데, 법제法制에 의하여 비碑와 갈碣이 구분되면서 자연 묘표墓表는 직위職位의 고하高下나 관작官爵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두루 쓰이는 말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차츰 명銘이 없는 묘문墓文에 대한 지칭指稱으로 정착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명銘이란 무엇인가? 조상의 훌륭한 공덕功德이나 자손들이 길이 지켜야 할 교훈敎訓 등을 오래오래 전하기 위하여 금석金石에다 새긴 글이다. 솥이나 종鍾에 새긴 것이 종정명鐘鼎銘이요, 그릇이나 물건에다 새긴 것이 기물명器物銘이요, 무덤에 새긴 것이 묘명墓銘이다. 명銘은 모두 운문韻文으로 되어있으며, 글의 길이가 짧다. 아직 인문人文이 조야粗野하던 시대에 길고 장황張皇한 문장을 짓고 새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또 이를 운어화韻語化해서 강독講讀이 아니라 노래 부르게 함으로써 그 전파傳播와 전승傳承이 쉽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명銘이요, 잠箴이요, 찬贊이요, 송頌이다. 어떤 묘문墓文에서는 명銘을 사辭, 계系, 송頌, 찬贊 등의 이름들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인류 최초의 문학 형태文學形態가 운문韻文으로 된 노랫말이 아니던가?
그러나 차츰 인문人文이 발달하면서 명銘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명銘 앞에다 다시 길게 붙인 것이 이른바 서序라는 것이다. 서序란 앞머리의 기술記述, 또는 서술敍述이란 뜻이다. 서序에는 망자亡者의 성명姓名, 자호字號, 관향貫鄕, 선덕先德, 가계家系, 생졸生卒, 향수享壽, 천자天資), 관작官爵, 학덕學德, 품행品行, 공업功業, 사적事蹟, 배필配匹, 자손子孫, 장일葬日, 장지葬地, 증시贈諡 등이 두루 포함된다. 이 서序와 명銘을 합쳐서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 또는 ‘묘비명병서(墓碑銘幷序)’라고 하며, 이를 간단히 줄여서 명이 빠진 묘도문을 비문碑文, 갈문碣文 또는 묘비문墓碑文, 묘갈문墓碣文이라 한다.
2-2 신도비명神道碑銘
무덤에 세운 것이 묘표墓表, 묘갈墓碣, 묘비墓碑라면, 무덤으로 가는 길, 곧 신도神道에 세운 것이 이른바 신도비神道碑이다. 무덤을 쓰고 나면 그 무덤으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하며, 그렇게 닦은 길을 묘도墓道, 신도神道, 수도隧道라 한다. 이 신도神道에 세운 돌기둥에다 새긴 글, 곧 서序와 명銘을 합쳐서 이름하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라고 하는데, 명銘이 없는 경우에는 신도표神道表 또는 신도비神道碑라고도 하였다. 무덤은 대개 산언덕으로 올라가 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가까운 길가에 세워서 조상의 공덕功德을 더욱 널리 현양顯揚하고자 하는 것이 이 신도비神道碑라는 제도制度의 본래 뜻이라 하겠다. 그리고 흔히 감여가堪輿家의 설에 따라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법도法度라고 하나, 산세山勢와 좌향坐向, 기존 도로와의 연접連接 관계 등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東文選》등에 고려시대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나오기는 하지만 실물은 보기 어렵고 대개 3품관 이상에게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조 때에는 종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도록 법제화法制化되어 있었다고 각종 사전辭典과 족보族譜 관련 인쇄물 등에 두루 나와 있다. 신도비神道碑의 건립 기준은 원칙적으로 행직行職 정2품 이상이다. 그러나 증직贈職을 기준한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어떻든 미관말직微官末職이든 상민常民, 천민賤民이든 신도神道에 세우면 신도비神道碑이고 무덤 앞에 세우면 묘비墓碑, 묘갈墓碣이다. 묘비나 신도비는 세운 장소에 따른 구별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관직官職의 고하高下에 따른 구별이 아니다. 다만 당시의 규제법령規制法令에 대한 위반違反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신도비神道碑란 말이 ‘고관高官의 비석碑石’이란 뜻으로 관용慣用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2-3 묘지명墓誌銘
무덤의 석물石物에는 또 지석誌石이란 것이 있다. 비갈문碑碣文과 비슷한 내용을 돌에 새기거나 도편陶片에 구워서 광중壙中에 묻는 것으로서, 광지壙誌라고도 하며, 그 새긴 글을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 또는 ‘묘지명墓誌銘’이라고 하는데, 명銘이 없으면 그냥 묘지墓誌라 한다.
묘지에는 죽은 사람의 성명·관계官階·경력·사적·생몰 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墓地의 주소 등을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지만,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부터 청자나 백자에 써서 구운 것 등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묘소 석물墓所石物의 문자文字를 통틀어 묘문墓文, 구묘문丘墓文, 묘도문자墓道文字라고 한다. 이상의 여러 설명說明은 대개 원래의 개념과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 그것이 반드시 그렇게 지켜져 왔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외 문자文字와 관련 없는 묘소의 석물石物에 혼유석魂遊石, 석상床石,향로석香爐石, 석등石燈 장명등長明燈, 석주石柱 망주석望柱石, 석인石人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석수石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무덤을 위한 시설물들도 다양하고 현란絢爛한 편이다.
행장行狀이란? |
행장行狀, 시장諡狀, 가장家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죽은 자의 이력과 행적을 기록한 글로써 연보年譜라고도 한다. 행장이 언제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는가는 불분명하다.
행장은 諡號·碑銘·墓誌銘 작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고려에서 시호를 내리는 일을 관장하던 전의시(典儀寺)가 목종穆宗 대에 그 기능과 직제가 정립된 것으로 보아, 행장은 늦어도 목종 대 이전부터 작성되었다고 추측된다. 이후 행장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계승되었고, 유학의 발전 및 유교 문화의 융성과 함께 보편화되었다.
행장의 내용은 작성시대와 작성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고려·조선 시대의 행장을 보면 대개 ① 행장인의 관직, ② 성명, ③ 본관·가계, ④ 출생년, ⑤ 성장·수학 과정, ⑥ 출사로出仕路·역관歷官·행적·공적, ⑦ 졸년, ⑧ 장지, ⑨ 부인·부인가계, ⑩ 성품, ⑪ 자손, ⑫ 행장 작성자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행장은 위로는 왕·대신·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유학에 이르는 인물 모두가 작성의 대상이 되었다. 행장의 작성자는 행장인行狀人의 기호·지위·학행·재행 등과 관련되어 다소 차이가 있었다. 행장인 자신이 평소에 행장을 지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는가 하면, 왕명에 따라 문장에 능한 관인이 작성하거나, 행장인의 자손의 청탁에 따라 친구나 문인文人 또는 자손들이 작성하기도 했다. 이중 조선 후기에 들어 종2품 이하 관인官人은 물론 유학幼學도 문집文集의 간행이 성행했고, 그 문집에는 문집의 저자와 그 후손의 연보年譜나 행장을 수록했는데 대개 교우 또는 문인의 행장을 작성했다.
행장은 한 가문의 행적을 기술한 가장(家狀)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졸기, 비명·묘지·묘갈명·연보 등을 작성하는 데 기초가 되었고, 증시贈諡의 대상이 되는 관인官人(정2품 이상)·공신功臣(친공신親功臣)의 경우에는 시호諡號 상정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친구나 문인들이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자손들이 작성한 고인故人의 연보年譜 또는 행적을 가장家狀이라고 하며, 시호 상정에 토대가 되는 왕명에 따라 당대 문인이 작성한 고인의 행적 및 공적 등을 시장諡狀이라고 한다.
행장은 해당 인물에 관한 가계·출사로·역관·치적·공적·교우 관계 등이 종합적으로 기록된 일대기이므로 해당 인물의 구체적인 행적을 연구하는 기초자료가 된다. 행장은 각 개인 문집文集의 말미末尾, 족보族譜의 초두初頭에 부록으로 넣는 경우가 많다. 조선 초의 행장은 행장 본래의 체재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행장은 상소의 시말始末, 사건의 배경, 그 의론議論과 행동거지의 철학적 배경, 이단異端을 배격하는 이유까지 기록하고 있다. 어떤 행장은 책 한권 분량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송나라의 황간黃幹이 주자朱子의 행장을 40여 장 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