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군공 사충

호군공 사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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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경북 상주군 낙동면  

사진설명: 호군공 휘 사충 설단

우리 조씨(趙氏)의 전직공(殿直公 : 之藺)파는 세보상(世譜上)으로 볼 때, 매우 고단하게 이어져 오다가 고려 말기(高麗末期)에 이르러서야 분파(分派)하게 되는데 먼저 대언공(代言公 : 諱 炎暉)의 아들 세대(世代)에서 3파로 갈라진다. 대언공은 4남 1녀를 두시었다.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派祖)의 휘는 사충(思忠)이요, 봉선대부(奉善大夫)에 천우위 중령 호군(千牛衛 中領 護軍)이시다. 봉선대부는 위계가 종 4품이고 천우위는 중앙군(中央軍)인 육위(六衛 : 左右衛ㆍ神虎衛ㆍ興威衛ㆍ金吾衛ㆍ千牛衛ㆍ監門衛)중에서 의장(儀仗)을 담당하던 군대조직의 하나이며, 중령은 오늘날과 같은 장교 계급이 아니라 그 부대를 구성하는 편제(編制)의 한 단위이며, 호군은 그 영(領)의 지휘관 중 하나이다.

 

우리 조씨(趙氏)의 본관이 풍양(豐壤)이고, 고려시대 역대 선조의 거주지(居住地)는 그 관직으로 보아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심한 분산(分散)을 보게 된다. 호군공파(護軍公派)의 상주이거(尙州移居)와 회양공파(淮陽公派)의 임천(林川 : 現 扶餘)ㆍ춘천(春川)으로의 분산 거주(分散居住)가 바로 그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변화를 기록한 명확한 기록이 없는 한, 필연적으로 그럴싸한 설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설화의 줄거리는 대개 인간의 소박한 욕망이나, 기복사상(祈福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흥미 본위로 엮어지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다.

“호군공의 셋째 아우인 회양공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은 분이었다. 일찍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답사하여 상주(尙州)와 임천(林川 : 德林)에 명당자리를 하나씩 잡아놓고 돌아왔다. 형님이 물으니, ‘상주는 장차 부(富)가 많이 날 자리이고, 임천은 장차 귀(貴)가 많이 날 자리입니다.’라고 본대로 답변하였다. 형님이 생각할 때 ‘아무래도 아우가 거꾸로 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끝에 ‘내가 상주로 가겠다’고 하였으므로 호군공은 상주로 가시고, 회양공은 임천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호군공 이하 여러 대 자손들의 비문(碑文)을 보면 한결같이 처음으로 상주에 사신 것(始居 尙州)은 호군공이 아니라, 그 자제인 상의공(商議公 : 崇)으로 되어 있으니, 위의 설화는 신빙성이 없는 호사가들의 꾸민 이야기일 가능성이 짙은 것이라 하겠다. 한편 호군공의 묘소는 실전되었으므로 상주 비란리(飛鸞里)의 상의공 묘소 옆에 설단(設壇)하고 세일제(歲一祭)를 받들어 오고 있음을 부기한다.

 

우리 가문이 이 때 이처럼 분산하게 된 까닭을 가화(家禍)를 들어 말하기도 한다. 곧 “호군공의 둘째 아우인 상서공(尙書公 : 思恭)이 신돈(辛旽)을 제거하기 위한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도리어 화(禍)를 당하고 말았는데, 한 가문이 이로 인하여 분산되었다”는 것이다. 전부터 그런 이야기가 전하여 내려온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문장으로 쓰여진 것은 조선 헌종(憲宗) 때에 영의정을 지낸 운석공(雲石公 : 寅永)이 만락재공(晩樂齋公, 錫龍 : 承旨)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인용한 것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호군공과 재종간(再從間)인 석간공(石磵公 : 云)의 배위가 상주김씨(尙州金氏)이고 석간공이 한 때는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밑에서 거주한 사실이 있음을 볼 때, 혹시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억측만으로 단정 할 수는 없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