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묘비명

글자작게 글자크기 글자크게

ma01.png 시중공 휘(諱) (孟) 묘비명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계곡 장유(谿谷張維)1) 지음

 

고려국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문하시중평장사 조공 묘비명

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 병서

 

고려조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趙公이야말로 풍양조씨豐壤趙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그 묘소가 풍양현豐壤縣 적성동赤城洞 신향申向의 언덕에 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대대로 초부樵夫와 목자牧者의 출입을 엄금하면서 지켜온 지 어언 6백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10년에 이르러 공빈 김씨(恭嬪金氏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의 생모)가 죽자 공의 식묘食墓 뒤쪽 30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호소하자, 소경왕이 이르기를,

 

“공빈의 선조로 말하면 실로 조씨에서 나왔다.[趙之自出]2)  

하였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지 34년이 지난 광해光海 2년에 낳아 준 어미를 추융追隆하면서 공빈을 높여 후后로 하고 그 묘소를 성릉成陵으로 부르게 하는 한편, 근처에 있는 분묘墳墓들을 모두 파내어 없애 버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공의 묘소 역시 당연히 그 대상 중에 포함이 되었는데, 당시에 대신이 말하기를,

 

“오래된 묘소를 파내어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봉분만 깎아 버려 평지처럼 만들면 충분하다.”

 

하자, 광해가 그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공의 묘소가 완전히 평지로 변하여 후손들이 성묘할 길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원통한 생각을 품어 온 것이 14년이나 되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금상今上이 대위大位에 오르셨는데, 그 뒤 8년이 지난 숭정崇楨 경오년(1630, 인조 8)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성릉成陵을 이미 혁제革除한 만큼 신의 선조 모某의 묘소에 예전대로 봉분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모일에 자손들이 모두 묘소 아래에 모여 글을 지어 고한 뒤 묘역을 열어 보니 광중壙中의 네 모퉁이를 완연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에 마침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벽돌로 석계石階를 조성하는 등 완전히 옛날 제도대로 복구하였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 이구동성으로 모두 말하기를,

 

“생각건대 아조我祖를 이곳에 모신 지 6백여 년이 지난 때에 봉분을 헐게 되었고 훼손된 지 20년 만에 다시 복구하게 되었다. 대저 6백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까지 후손들이 그 묘소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흔치가 않은 법이요, 게다가 일단 훼손되었다가 곧바로 복구되는 경우로 말하면 더더욱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아조의 덕업德業이 성대하여 신명神明이 말 없는 가운데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비석을 세워 그 자취를 기록함으로써 영원히 전해지도록 해야만 하겠다.”

 

하고는, 나 역시 외손의 대열에 속한다고 하여 나에게 비명을 쓰도록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원래 이름은 암巖으로 풍양에서 살았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은 처음부터 전야田野에 은둔하면서 출세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 급기야 고려 태조太祖가 일어남에 미쳐 한번 보고는 마음이 계합契合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누차 공적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의 호를 받은 뒤 관직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저 고려 태조야말로 영무英武한 분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고 그에 맞는 임무를 적절하게 부여하였으므로 현능賢能한 인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었다. 그런데 공이 초야에서 솟구쳐 나와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되었으니, 한 세상에 명성을 떨치는 위인偉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세대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징험할 만한 문적文籍도 없어 상세한 사업事業 내용이나 생몰년대 및 배필, 자손들을 모두 상고해 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단지 보첩譜諜에 기재된 내용을 의거하고 노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참작하여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 다음 명시銘詩를 붙이는 바이다. 내외의 여러 후손 가운데 저명하게 된 이들은 비 뒷면에 기록되어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빛나는 고려 태조/ 於赫麗祖

제왕 될 부서符瑞3)쥐고 천명 응할 때/ 握符應期

우리의 시중 어른/ 維時侍中

실로 협찬하였도다/ 實左右之

상주국 품계 성큼 올라/ 勳躋柱國

삼공三公의 반열 자리하고/ 位列台司

우뚝 원훈元勳되어/ 倬爲元臣

육태사六太師4)와 어깨 겨뤘도다/ 齊六太師

적성동 묘역은/ 赤城之塋

사후의 안식처라/ 降魄攸依

나무들 울창이 우거진 채/ 鬱彼松檟

대대로 출입 금했어라/ 蕘牧遠違

육백여 년 세월 지나/ 歷祀六百

묘소가 훼손되며/ 堂封見夷

봉분마저 없어지자/ 丘壠殘滅

부노父老들 비탄에 잠겼도다/ 父老傷悲

하늘의 뜻 정해지면 반드시 이기는 법/ 天定必勝

난정亂政 뒤엎으며/ 反乎覆而

성군聖君이 폐단 개혁함에/ 聖作革僞

후손들 일제히 상소하여 청했다네/ 雲仍齊辭

광중壙中을 열어 보니/ 有窅其宮

완연한 네 모퉁이/ 周以阿陲

봉분하고 비 세우고/ 旣封旣樹

훌륭한 모습 되찾았지/ 隆然而巍

아 우리 시중 어른/ 於維侍中

그 덕업 휘황하니/ 德業光輝

유허遺墟와 묘소 자리한 곳/ 墟墓所在

백세토록 공경 받아야 하리/ 百代永祗

훼손된 뒤에 복구되어/ 旣隳而復

더더욱 공고해졌는데/ 鞏固益彌

공의 많은 손자들/ 公多孫子

본손本孫 지손支孫은 물론이요/ 有本有支

나아가 외손까지 /延及外裔

금관조복金冠朝服 착용하고/ 佩服金緋

성묘하고 제祭 올리며/ 來展來薦

법도를 어기지 말지어다/ 勿替式時

높은 산 가파른 언덕/ 豐岑巀嶭

강물은 출렁출렁/ 其水瀰瀰

공적 기록한 빗돌 위에/ 伐石紀烈

이 명시 붙이노라/ 陳此銘詩

 

 

[원문]

 

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幷序

 

麗朝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 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 實爲豐壤趙氏之鼻祖 墓在豐壤縣之赤城洞申向之原 後裔之居其鄕者 世禁樵牧 歷六百有餘歲 至我昭敬王之十年 恭嬪金氏卒 卜葬食墓後三十步許 公之裔孫若干人 上疏訟之 昭敬王曰 恭嬪之先 實趙之自出 其葬之又三十有四歲 爲光海之二年 追隆所生 尊恭嬪爲后 號其墓爲成陵 凡墳墓之在近者 皆發去之 公墓當在發中 會大臣言墓久不可發 剗其封而夷之足矣 光海從之 自是公之墓 蕩爲平地 後孫無所展省 銜痛茹冤者 十有四年 而爲天啓癸亥 今上踐阼又八年 爲崇禎庚午 公之裔孫若干人 上疏言成陵旣已革除 臣祖某之墓 宜復舊封 許之 是歲十月某日 諸孫畢會墓下 爲文以告 開其兆域 則竁壙四隅 宛然可識 遂築而封之 甃石成砌 悉如舊制 訖事退 咸一口言曰 惟我祖藏此地 歷六百餘年而隳 隳二十年而復 夫經六百年之久 而後人識其墓者希矣 旣隳而旋復者滋希矣 此殆我祖德業之盛 神明默祐以致此也 宜樹石紀蹟 昭示永世 謂維亦忝外裔 俾爲之銘 謹按公初諱巖 豐壤人 世傳公始隱田野 不求聞於世 及麗祖起 一見契合 賜名孟 屢著功伐 賜壁上功臣號 官至侍中 夫以麗祖之英武 知人善任 賢能景附 而公崛起田間 致位宰相 爲開國勳臣 非名世之偉人 能如是乎 世代久遠 載籍無徵 其事業之詳及生卒妃匹子姓 皆不可攷 獨据譜諜所載 參以耆老流傳 略敍如右 而係以銘詩 其內外諸孫之表著者 記于其陰 其銘曰 於赫麗祖 握符應期 維時侍中 實左右之 勳躋柱國 位列台司 倬爲元臣 齊六太師 赤城之塋 降魄攸依 鬱彼松檟 蕘牧遠違 歷祀六百 堂封見夷 丘壟殘滅 父老傷悲 天定必勝 反乎覆而 聖作革僞 雲仍齊辭 有窅其宮 周以阿陲 旣封旣樹 隆然而巍 於維侍中 德業光輝 墟墓所在 百代永祗 旣隳而復 鞏固益彌 公多孫子 有本有支 延及外裔 佩服金緋 來展來薦 勿替式時 豐岑嶻嶭 其水瀰瀰 伐石紀烈 陳此銘詩

 

甲戊十月十一日 竪于墓左

外後孫朝鮮國資憲大夫左參贊大提學靖社功臣新豐君 張維撰

錦陽尉 朴瀰篆

前掌令 李袨書

 

 

<>

 1) 조선시대 16대 인조(仁祖) 때의 명신ㆍ학자. 자(字)는 지국(持國), 호(號)는 계곡(谿谷). 본은 덕수(德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대사간ㆍ대사성을 지내고, 정묘호란 때 강화로 임금을 수행해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름. 천문ㆍ지리ㆍ의술ㆍ병서ㆍ그림ㆍ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많은 저서를 남김.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저서로는 계곡만필(谿谷漫筆), 계곡집(谿谷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등이 있다.

 2) 조씨 가문의 여성이 공빈 김씨의 가문으로 출가했음을 의미한다. 주(周) 나라에서 큰딸을 호공(胡公)에게 출가시키면서 진(陳) 나라의 제후로 봉한 것과 관련, “진 나라는 우리 주 나라에서 나왔다.[則我周之自出]”는 말이 나온 데에서 비롯되었다. 《春秋左傳 襄公 25年》

 3) 제왕의 상징물로 표현하였다.

 4)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태사(太師)를 증직 받은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知謙), 유검필(庾黔弼), 최응(崔凝) 등 6인을 가리킨다. 《大東韻府群玉 卷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