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공파

금주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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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금주공파錦州公派

 

금주공錦州公 휘임諱袵은 여말 신돈辛旽 등의 혼란스러운 정치로 벼슬길의 뜻을 끊고는 후진 육성에만 힘썼다. 고려가 망하자 더욱이 자취를 거두며 한적한 양주楊州 땅에서 산수山水를 즐기며 은거하였다. 홍무관 교리인 이종문李鍾文은 명銘을 지어 이렇게 노래하였다.

오직 공公의 덕행은 /惟公惟德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였도다 /惟忠與孝

집터 같은 도끼 모양인데 /若堂若斧1)

공이 묻히신 분묘墳墓라네 /惟公之墓

공교롭게도 때를 못 만났으나 /生丁不辰

기자箕子의 바른 삶 같았으며 /箕子2)明夷3)

백이伯夷·숙제叔齊와 같은 고고한 절개였네 /西山4)孤節

은둔의 길 여유롭기만 하네 /衡泌5)委蛇

내 몇 마디의 명銘을 지어 /我銘數句

묘소에 표시하여 /庸表泉隧6)

초동목수樵童牧牧7)에게 당부하노니 /詔乃樵牧

무너뜨려도 부수어도 아니 된다 /勿隤勿弛

금주공파錦州公派의 묘도문墓道文은 4점이 있다. 좀 더 상세히 분류하면 비명碑銘과 유허비명遺墟碑銘 각 1점, 묘표墓表 2점, 유사遺事 1점이 있다. 총 유사 포함하여 5점이다. 금주공께서 백이·숙제와 같이 고고한 절개로 은둔의 길을 걸어서일까 많은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하였다.

 

 ☞ 묘도문

 ◦신도비神道碑(2점)

금주공휘임비명〈錦州公諱袵碑銘〉홍문관교리 이종문李鍾文 근찬

금주공휘임유허비명〈錦州公諱袵遺墟碑銘〉17대손十七代孫 동세東世 근찬

 

 ◦묘표墓表(2점)  

나주나씨〈羅州羅氏錦州公袵配〉19대손十九代孫 남수南遂 근찬

수사공휘길통〈水使公諱吉通〉16대손十六代孫 동세東世 근기

 

 ◦유사遺事(1점)

금탄공휘길통〈琴灘公諱光玹〉병진해화록丙辰海禍錄  금재신간錦齋新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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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묘소의 터는 사람이 사는 집터(堂)와 같이 펑퍼짐하고, 봉우리는 도끼 모양과 같다는 데에서 묘소를 당부(堂斧)라고도 한다.

 2) 중국 고대 은(殷)의 이상적인 명현. 이름은 서여(叙余), 또는 수유(須臾)이다.

 3) 괘(卦) 이름. 밝은 것이 어둠으로 가려 있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이 못난 임금을 만나 해를 입는 괘이다.

 4)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다.〔伯夷聖之淸者也〕”라는 말이 있다.

 5) 학자가 은거하는 곳을 말한다. 《시경》〈형문(衡門)〉에 “누추한 집 그 아래 쉬고 노닐 수 있으며, 졸졸 흐르는 냇물에서 굶주림을 잊고 즐길 수 있도다.〔衡門之下 可以棲遲 泌之洋洋 可以樂飢〕”라고 하였다.

 6) 시체를 묻는 광중(壙中)을 이르는 말이다.

 7) 땔나무하는 아이와 소먹이는 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