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중간보(무오보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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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문

범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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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ma01.png 풍양조씨세보 오중간서(豐壤趙氏世譜五重刊序)

 

우리 풍양조씨(豐壤趙氏)는 고려개국(高麗開國)과 때를 같이하여 득성(得姓)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조씨성(趙氏姓) 중(中)에서는 그 역사(歷史)가 가장 깊다. 이러한 계보(系譜)의 기록(記錄)이 어떻게 승전(承傳)되어왔느냐에 관(關)하여는 확실(確實)히 알 길이 없으나 창간보(創刊譜)의 서문(序文)에 의(依)하면 고려(高麗) 때에는 세가(世家)의 원파(源派)를 관가(官家)에서 관장기록(管掌記錄)한 흔적(痕迹)이 있고 또 보서(譜書) 中에는 제보(諸譜)를 고증(考證)으로 인용(引用)한 기록(記錄)이 있는 것을 보면 사가(私家)에는 가승(家乘)이나 파보(派譜)같은 기록(記錄)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간보사업(刊譜事業)이 성행(盛行)하기는 이조중엽(李朝中葉) 이후(以後)의 일이거니와 우리 세보(世譜)는 인조(仁祖) 때부터 남상(濫觴)되어 영조(英祖) 신해년(辛亥年)에 창간보(創刊譜)와 동경진년(同庚辰年)에 중간보(重刊譜)가 발간(發刊)되고 순조(純祖) 병술년(丙戌年)에 삼중간보(三重刊譜)와 고종 경자년(高宗庚子年)에 사중간보(四重刊譜)가 발간(發刊)되었다. 대개 족보(族譜)는 일세대(一世代)인 三十年만에 개간(改刊)함이 통례(通例)이기는 하나 반드시 지켜지지는 못한 것 같고 이번의 오중간보(五重刊譜)는 실(實)로 七十八年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국가(國家)와 민족적(民族的)인 수난(受難)도 많았고 근년(近年)에 들어서는 산업발전(産業發展)으로 인(因)한 인구이동(人口移動)도 극심(極甚)한 만큼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무난(無難)히 극복(克服)하고 보소(譜所)를 개설(開設)한 지 불과(不過) 二年만에 편집(編輯)과 교정(校正)을 완료(完了)하고 인쇄(印刷)에 회부(回附)하게 되었음은 실(實)로 감격적(感激的)인 성과(成果)로서 여러 종친(宗親)의 성의(誠意)와 주간제위(主幹諸位)의 노고(勞苦)에 심사(深謝)하는 바이다.

 

이 세상(世上)에서 문명국(文明國)이라면 족보류(族譜類)가 아주 없는 나라는 없을 것이나 우리나라 족보(族譜)가 세계(世系)에서 가장 발달(發達)되었다는 것은 이미 내려진 정평(定評)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우리 세보(世譜)가 예로부터 제가지최(諸家之最)라 일컬어지는 것은 어째서이겠는가. 이는 무엇보다도 사적(史的)인 안목(眼目)이 충실(充實)함일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전통(傳統)을 지켜나가기에 다 같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는 근본목적(根本目的)은 존조(尊祖)와 돈친(敦親)에 있는 것이니 우리는 모름지기 이에 각별(各別)한 성찰(省察)과 여행(勵行)이 있어야한다.

 

끝으로 이번에는 간보사업(刊譜事業)과 병행(並行)하여 역대(歷代)의 중요문헌(重要文獻)을 수집정리(蒐輯整理)하고 국역(國譯)을 곁들여 발간(發刊)하게 되었음은 또한 뜻깊은 일이다. 이는 세보(世譜)와 함께 우리 조선(祖先)의 사적(事蹟)을 아는데 귀중(貴重)한 전적(典籍)이 되리라 확신(確信)하면서 불문(不文)이나마 이를 서문(序文)으로 하는 바이다.

 

단기(檀紀) 4311年(西紀 1978) 무오(戊午) 8月  日

후손(後孫) 풍양조씨세보소(豐壤趙氏世譜所) 도유사(都有司) 정구(鼎九)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