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배향

서원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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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서원배향록書院配享錄

 

이 름

배향配享

주벽主壁

사 액

서원명

파 별

조종경趙宗敬

1681(숙종7)  

趙宗敬

 

안양호계서원虎溪書院

회양공韓平君派

조 정趙 靖

1635(인조13)

申 祐

 

의성속수서원涑水書院

護軍公派

조 익趙 翊

1635(인조13)

申 祐

 

의성속수서원涑水書院

護軍公派

조수륜趙守倫

1662(현종3)  

李山甫

서천건암서원建岩書院

회양공韓平君派

조광벽趙光璧

1702(숙종28)

朴彦誠

 

상주연악서원淵岳書院

護軍公派

조응록趙應祿

1856(고종7)  

趙應祿

 

부여낭산사朗山祠

회양공新里派

조방직趙邦直

1856(고종7)  

趙應祿

 

부여낭산사朗山祠

회양공新里派

조 박趙 璞

1766(영조42)

趙 璞

 

부여반산서원盤山書院

회양공東谷派

조 익趙 翼

1661(현종2)  

趙 翼

화성명고서원明皐書院

平章事公派

조 익趙 翼

1670(현종11)

趙 翼

 

아산도산서원道山書院

平章事公派

조 익趙 翼

1668(현종9)  

鄭夢周

개성숭양서원崇陽書院

平章事公派

조 익趙 翼

1694(숙종20)

趙光祖

 

정평망덕서원望德書院

平章事公派

조 속趙 涑

1685(숙종11)

李義健

강남수곡서원秀谷書院

회양공韓平君派

조 속趙 涑

1681(숙종7)  

趙宗敬

 

안양호계서원虎溪書院

회양공韓平君派

조 속趙 涑

1662(현종3)  

李山甫

서천건암서원建岩書院

회양공韓平君派

조견소趙見素

1766(영조42)

趙 璞

 

부여반산서원盤山書院

회양공東谷派

조성복趙聖復

1757(영조33)

趙 璞

 

부여반산서원盤山書院

회양공東谷派

조광형趙光亨

1742(영조18)

趙光亨

 

부여낭산사朗山祠

회양공新里派

조복양趙復陽

1713(숙종38)

趙 翼

화성명고서원明皐書院

平章事公派

조지겸趙持謙

1713(숙종38)

趙 翼

화성명고서원明皐書院

平章事公派

조상우趙相愚

1723(경종3)  

徐鳳翎

 

나주용강사龍岡祠

회양공淸橋派

조태징趙泰徵

1770(영조46)

趙泰徵

 

부여남산사南山祠

회양공淸橋派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기구이다. 서원의 기원이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 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그 후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조선의 서원은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중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갖고 있는데, 반하여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향촌 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사서오경으로 본원本原을 삼고, 소학·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독서의 순서는 일반적으로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춘추 등의 차례로 규정한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하는 강당과 원생 등이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西齋로 이루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이 있다. 이러한 서원 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 도참사상에 따라 수세·산세·야세를 보아 합당한 위치를 택하였다. 건물의 배치 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며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며, 남쪽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하고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