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의 의미

본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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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본관의 의미: 풍양豐壤이란?

 

우리 조씨는 풍양豐壤이라는 본관을 쓰고 있다. 본관本貫은 우리의 시조 즉 시중공侍中公 휘 맹1)께서 출생하여 사셨던 곳의 지명을 의미한다. 현 지명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松陵 1리이며, 이곳에서 태어나 노년까지 사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세보世譜에 풍양 적성동赤城洞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 지명은 송릉 1리이며, 「적성골」이라는 지명은 시중공 묘소가 있는 산 밑 동네 명칭으로 아직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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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관적貫籍·본적本籍·성관姓貫·본·관향貫鄕·적관籍貫 등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며, 시조가 태어난 곳 또는 성의 발상지로 부계父系 계통의 친족 범위를 나타낸다.

 

본관이라는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는데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관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론이다. 본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적인 제도로서 시행된 것으로, 그 실시 시기는 지역적 편차가 있으나 995년(성종 14)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시 초기의 본관 제도는 지역사회 내부의 자체적 질서와 향촌사회를 조기 안정화를 위해 시행된 제도이다. 즉 기존의 지역공동체 관계를 이용하여 백성들이 현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대민對民 지배방식의 목적으로 시행된 제도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향촌사회에서 농민층의 붕괴 현상이 발생하고, 씨족의 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본관과 거주지의 분리 현상이 확산하였다. 따라서 살던 지역을 이탈한 양민들을 원래의 본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차라리 현재의 거주지에 적을 붙여서 수취收聚를 도모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었다. 이에 따라 본관 제도가 가지고 있던 향촌 사회의 통제기능은 약화하였고, 본관이 점차 혈통을 구분 짓는 혈연의식의 의미로 진화되었다.

 

사림士林이 등장하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예학禮學이 강화되며, 본관은 “동성동본은 백대지친百代之親2) 이라는 보다 관념적인 혈연의식을 나타내게 되고, 개인이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상징하는 심벌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풍양현은 대략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과 진접면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의 옛 고을의 명칭이다. 풍양이란 지명은 현재 남양주시 풍양보건소와 풍양초등학교, 풍양중학교 등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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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가신 분을 공경 차원에 諱字를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이 禮이지만, 시중공 이하는 편집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서 생략합니다.

2) 百代之親은 百 代에 걸친 친척을 의하는 말로,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가족 간의 깊은 유대와 연결을 상징한다. 여기서 百代는 말 그대로 百世를 이어지는 부계혈통의 집단을 의미하며 之親은 그 안에 이어지는 집단 모두가 친척 혈연관계임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