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시중공 이야기

시조 시중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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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시조 시중공 휘  이야기

 

우리 시조 시중공(始祖 侍中公) 휘諱 맹孟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후손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이전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우리나라는 셀 수 없는 많은 외침으로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추측하건대 우리 집안에서도 대대로 내려오던 고문서 및 가첩家牒 등도 그 혼란의 시대 대부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1610년 왕비로 추존을 하여 공성왕후라 칭하고, 석물은 왕비능에 준하게 수축했으며, 능호를 성능成陵이라 명하였다. 그 앞자락에 있는 시중공 묘소는 이로 인해 봉분이 깎여 없어지고 평장平葬이 되는 봉변을 당한다. 1629년(광해군15년) 광해군의 폐위되며 그녀도 빈으로 되돌아간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종친들은 그 무렵 세계世系 및 가문 보존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원상회복을 위한 상소 등을 위해 잦은 모임과 연락이 있었던 것 같다.

 

시중공에 관한 이야기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활발하게 기록된다. 그러나 대부분이 문헌 고증에 의한 역사적인 자료보다는 풍양현을 중심으로 한 마을 촌로들의 구전 및 설화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고려의 건국이 936년이고, 인조가 1622년 집권하므로, 650여 년전 일들을 추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장에서는 묘비와 설화를 중심으로 시중공의 역사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 1587 ~1638)의 묘비명, 포저 익(浦渚 翼, 1579~1655)의 묘비음기, 송곡 복양(松谷 復陽, 1609~1671)의 묘표음기를 남겼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시중공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운애 수익(雲厓 守翼; 1565~1607)의 탄생설화, 화천 즙(花川 濈, 1568 ~1631)의 왕건과 만남의 설화(1), 창강 속(滄江 涑, 1595~1668)의 왕건과 만남의 설화(2) 등의 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