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과 시중공의 만남 설화
왕건王建과 시중공 휘諱 맹孟의 만남 설화 |
제우시사적際遇時事蹟(1)
후손 승지承旨 화천 즙花川濈1) 기록
세상에 전해지는 말이지만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신라新羅를 정벌하다가 영해지방寧海地方 에서 크게 패전하고, 모든 장수와 함께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데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왕업王業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풍양현 사람인 조암趙巖을 만나 상의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여조(麗祖; 왕건을 지칭함)가 마침내 몸소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돌아와 정승政丞으로 삼으니 그 당시 연세가 70여살 이었다.』고 한다.
즙濈이 세상 보는 안목이 있는 정우복鄭愚伏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際遇時事蹟(1) 世傳 麗太祖征新羅 大敗於寧海地 與諸將憩于嶺上 諸將曰 事巳急矣 必邀豐壤趙巖相議王業可成 麗祖遂身徃請來拜爲相 年七十餘 濈 親聞於鄭愚伏 經世云 右後孫 承旨濈 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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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시사적際遇時事蹟(2)
후손 승지承旨 화천 즙(花川濈)3) 기록
공公의 최초의 이름은 파회(破回; 바우 또는 바위의 이두 문자)이니 방언으로는 바위이다. 초기에는 풍양현豐壤縣에서 살았다. 어느 날 마을의 농부들과 더불어 들에서 김을 매는데 고려태조의 행군行軍이 고개를 넘어왔다. 공은 그 깃발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태조가 밭머리에 다가와 밭에 떨어진 신짝이 매우 큰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구의 신인가?」
「조趙바위의 신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 보고 싶으니 불러오도록 하여라!」
「바위는 덩치는 크지만 실은 겁쟁이입니다. 언제나 관인官人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늘 풀숲으로 달려가 숨었다가는 멀리 지나간 후에야 나옵니다. 더욱이나 대왕大王께서 여기 계시는데 어찌 나오려 하겠습니까?」
「그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가서 만나야겠다.」
「저기 보이는 오두막집이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필시 집에 있지는 않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집 뒤에 있는 바위 굴속으로 가 보십시오.」 하였다. 과연 태조가 찾아가서 만난 곳은 바위 굴속이었다
그리고 태조께서는 함께 대화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시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입히었다. 공은 자태姿態가 웅위(雄偉; 씩씩하고 뛰어남)하고 수염이 미호(美好; 모습이 아름다운)였다. 의관衣冠을 새롭게 갈아입고 병기兵器를 옆에 쥐고 말을 타고 나오니 엄연한 장군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배(羅拜; 여럿이 죽 늘어서서 함께 절함)를 하였다. 그 길로 태조를 따라 남쪽 지방 정벌에 나섰으며, 여러 번의 공훈을 세웠다.
際遇時事蹟(2) 公初名破回 方言巖 初居豐壤縣 與里中田夫耘於野 高麗太祖行軍踰嶺 公望見旗旄走還于家 太祖來見田頭破屨大 太祖問于田夫曰 此誰人屨耶對曰 趙破回屨也 太祖曰 吾欲見此人 可招來 田夫曰 破回形貌雖大實㥘夫 每見官人行必走草中過遠然後出 今大王在此豈肯出來 太祖曰 其家安在吾當自徃 田夫曰 彼第幾小屋是也 雖然必不在家 願大王徃見其屋後石窟中 太祖尋徃果得之石窟中 與語大喜解衣衣之 公姿相雄偉鬚髥美好 衣冠一新 持兵乘馬而出 儼然一將軍也 鄕之田夫皆羅拜 從太祖南征屢著功伐
右後孫掌令涑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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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덕화(德和), 호는 화천(花川).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6년에 주서가 되며 사서·부수찬·장령·동부승지·영해부사 등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나다.
2)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
3)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그림은 매(梅), 죽(竹), 산수와 더불어 수묵 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으며,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또한 청빈하여 칭송받았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