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핏줄
우리는 한 핏줄? |
- 관향貫鄕이 같은 조씨趙氏 간에 혼인(三貫趙氏勿相婚嫁議) -
임천林川 구보舊譜 두 개 본관本貫을 고찰하여 보건대 이르기를 「풍양豐壤·한양漢陽·양주楊州의 조씨는 같은 근원根源에서 분파되었다 1).」하였으니 이것은 추측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풍양·한양·양주는 본래부터 한 고을이었다2). 그러므로 우리 풍양조씨가 조선 중기에 봉작封爵3)을 받을 때 더러 한양漢陽으로 훈호勳號를 받았고 시권試券4)에는 간혹 양주楊州로 본관本貫을 쓰기도 하였으니, 이런 사례로 보아도 세 조씨趙氏의 관향貫鄕 또한 어찌 근원이 같지 아니하다 할 수 있겠는가?
창령(昌寧)의 로상(路上)·로하(路下) 성씨(成氏)5)가 처음에는 자신들이 이르기를 「원류源流가 같지 않다.」 하여 남자는 장가가고 여자가 시집왔는데 그 이후에 먼 윗대의 비문碑文이 발견되어 하나의 족보로 통합하였다. 그러하다면 우리 풍양조씨가 한양이나 양주조씨와 혹시라도 장가들고 시집을 온다면 예의禮義와 법도法道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는 풍양·한양·양주 조씨는 절대로 서로 혼인婚姻하는 것을 금禁하여 성씨成氏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三貫趙氏勿相婚嫁議 按林川舊譜兩本 云 豐壤漢陽楊州之趙一源而分派 此似臆料之說 然豐壤漢陽楊州本自一州 故我豐壤趙氏當國朝中葉封爵 或以漢陽爲號試券 或以楊州書貫以 此觀之三鄕之趙 亦安知不爲一源也 昌寧路上路下成氏 始自謂源流之不同 男婚女嫁矣 追後得遠代碑文 而合爲一譜 顧我豐壤趙氏 與漢陽楊州之趙若或婚嫁 則得不有悖於禮經乎 今後則豐壤漢陽楊州趙氏 切勿相與婚娶 以存成氏之戒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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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풍양조씨(豐壤趙氏), 한양조씨(漢陽趙氏), 양주조씨(楊州趙氏)는 한 근원이다. 즉 한 조상이다. 이는 예로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곤 있지만 확실한 문헌적 근거는 없는 말이다. 우리 풍양조씨 시조 시중공(侍中公) 휘맹(諱孟)은 고려 개국공신이니 신라말 고려초의 인물이고, 한양조씨 시조 첨의중서공(僉議中書公) 휘지수(諱之壽)는 조선조 태조의 손주사위인 양경공(良敬公) 휘연(諱涓)의 5대조이니 고려 말엽이며, 양주조씨의 시조 증판중추공(贈判中樞公 ) 휘잠(諱岑)은 조선초기의 인물인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증조이니 또한 고려말에 속하는 분이다. 따라서 문헌으로 입증할만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으니 동조지손(同祖之孫)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2)풍양·한양·양주는 본래 한 고을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면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진접면과 서울의 동단(東端) 일부)은 고려 때에 한양령현(漢陽領縣)이라 하였고, 조선 세종 때에 양주의 속현(屬縣)으로 되었으며, 한양(현 서울)은 고려 초에 양주로 개명(改名)된 적이 있다. 양주(楊州郡)는 고려 때는 그 부치(府治)가 한양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 때에 정도(定都)하고 나서 동촌 대동리(東村 大洞里)로 옮겼었으니 모두 동일한 지역이다.
3) 봉작(封爵)에 있어서 더러는 한양으로 훈호(勳號)를 받았다는 뜻은 봉작은 공신들에게 봉군(封君)함을 의미한다. 이 봉군은 대상자의 본관(本貫) 중에 두자 또는 한자씩을 넣어서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풍양조씨의 경우 풍양군(豐壤君; 세훈(世勛)과 경(儆)), 풍안군(豐安君; 흡(潝)), 풍원군(豐原君; 현명(顯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중기의 봉군 중에는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 한평군(漢平君; 익정(益貞)), 한풍군(漢豐君; 안국(安國)) 등으로 한양에 한(漢)자를 써서 한 것도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 풍양이 아닌 조씨로서 이와 비슷한 예를 하나 들자면 세종 때 우의정인 조연(趙涓)의 본관이 한양인데 실록에는 양주로 되어있으니 이런 것들이 착오인지 어떤 관련성이 있어서인지 고증할 수는 없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4) 시권(試券)에는 간혹 양주로 본관을 썼다. 시권은 과거를 볼 때의 답안지인데 답안자의 성명을 표기하는 곳에 반드시 본관을 썼다. 그런데 우리 풍양조씨로서 양주라고 쓴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확인은 불가하다. 그러나 우리 선대문헌에도 본관을 쓸 때 양주의 풍양이라 쓴 것이 더러 있는 것으로 보아 이해가 가기도 한다.
5) 창령(昌寧)의 로상·로하(路上·路下) 성씨(成氏)는 곧 성송국(成松國)의 큰아들 공필(公弼)의 자손을 로상 성씨라 하고 작은아들 한필(漢弼)의 자손을 로하 성씨라 하는데 길을 가운데에 두고 위아래 살았기에 이름을 上과 下로 구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