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문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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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초계문신록抄啟文臣錄

 

이 름

직 위

시 대

파별派別

추 천

조득영趙得永

일곡日谷

이조판서

정조

회양공한평군파

좌의정채제공蔡濟恭 

조만원趙萬元

 

형조판서

정조

평장사공파

영의정홍낙성洪樂性 

조정화趙庭和

 

병조참판

정조

회양공청교파

영의정이병모李秉模 

조종영趙鐘永

북해北海

이조판서

정조

회양공한평군파

영의정이병모李秉模 

조연창趙然昌

성산星山

이조판서

현종

회양공청교파

영의정권돈인權敦仁 

조희철趙熙哲

 

이조참판

현종

평장사공파

영의정권돈인權敦仁 

조연흥趙然興

 

이조참판

현종

회양공청교파

영의정정원용鄭元容 

 

초계문신抄啟文臣이란?

조선 후기에 규장각에 특별히 마련된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들로 정조가 즉위 직후 규장각를 설립한 것은 역대 국왕 및 본인의 영정과 저술, 친필 등을 보관한다는 점을 표방하였지만, 정치적으로 세력 기반을 강화하고 문화적으로는 이념과 정책의 연구를 진흥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장치로서, 재능 있고 젊은 인물들을 의정부에서 선발해 국왕에게 보고抄啓한 후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하게 한 것이다. 이 제도는 조선 전기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운영 방식은《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에 규정되어 있다.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상신相臣이 선발하여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되, 1개월에 2회의 구술고사(講)와 1회의 필답고사(製)로 성과를 평가하였다.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여 채점하기도 하였다. 40세가 되면 졸업시켜 익힌 바를 국정에 적용하게 하였다. 1781년(정조5)부터 1800년까지 10차에 걸쳐 138인이 선발되었고, 1847년(헌종13)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56인을 선발하였으나 후대로 잇지는 못했다. 정조 때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