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왕후
효순왕후조씨孝純王后趙氏 |
효순왕후孝純王后는 제21대 영조英祖의 장남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妃이다. 본관은 풍양豐壤, 아버지는 풍양조씨 좌의정 학암공 문명(鶴巖公 文命), 어머니는 완흥부부인完興府夫人 전주이씨이다. 1727년(영조 3) 13세에 4살 어린 효장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世子嬪이 되었다.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고 1751년(영조 27)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순왕후는 1715년(숙종 41)에 출생하였으며, 13세의 어린 나이로 가례를 올렸지만, 다음 해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홀로 세자빈 생활을 하였다. 1735년(영조 11)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영조는 세자빈 조씨를 더 이상 빈궁의 자리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세조 때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잃고 홀로 된 수빈 한씨(粹嬪 韓氏: 소혜왕후)의 고사에 따라 세자가 없는 세자빈으로 현빈賢嬪이라는 호칭를 내렸다. 빈궁의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위치만큼은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영조英祖는 효순왕후孝純王后가 죽자 묘지문墓誌文을 직접 찬撰하였다. 왕은 장남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운명하였을 때 애처롭기 그지없는 며느리 효순왕후의 그때 모습을 묘지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아! 슬프도다. 가례嘉禮를 치른 그 이듬해 동짓달 16일에 효장세자가 일찍 죽었으니 예전인들 어찌 청상과부靑孀寡婦가 없으랴마는 빈嬪과 같은 사람이 있었던가. 출상出喪하던 날에 자리에 누운 채로 통곡만 하면서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도 아니했다. 내가 간곡하게 위로하니 빈은 울면서 말하기를“앞으로 후사後嗣가 없게 되었으니 살아 무엇하오리까.” 하므로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빈을 위로했다. 대왕대비의 권유로 비록 억지로 먹기는 하였으나 상중喪中에 집례執禮는 어른들과 다름없이 참여했다. 다섯 때 올리는 제전祭奠을 몸소 보살피며 항상 꿋꿋한 자태로 삼년상三年喪을 치렀으니 당초에 상상이나 했던 일이겠는가! 더욱이 지극히 원통함은 상중喪中에 가계加笄 즉 비녀를 꽂은 것이다.
빈嬪은 성격이 순박하고,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은 담담하고 온화한 편이었다. 그러나 확고한 마음가짐과 일 처리는 그 말끔함이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숙부 귀록공 현명(歸鹿公 顯命)이 정승이 되자 늘 안타깝게 생각하여 해임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였고 다시 임명되면 미간을 찌뿌렸다. 영조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상에서 누군들 시아비 없고 며느리 없을까마는 나와 빈嬪과 같은 사이는 없을 것이다. 구부舅父 간에 서로를 위하여 알아주길 25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마음을 알아주던 사랑스러운 효부를 여의었으니 앞으로 추모의 회포와 서러운 마음을 누구와 이야길 나누고 회포를 푼단 말인가?
하고 많은 날의 효성孝誠은 붓으로 다 기록하기 어렵고 대략적인 것만을 말한다. 언제나 자신이 먹는 밥상에 반찬은 두어 그릇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마저도 들쭉날쭉한 것이었다. 내가 즐겨 먹는 것은 차마 먹지를 않았다. - 중간 생략 -
하루에 밥은 겨우 한 끼니에 불과하고, 드는 것 역시 몇 술에 불과하였다. 먹는 것은 오직 내 밥상 남겨진 음식이었다. 내가 많이 먹으면 기쁘게 생각하여 좀 먹었지만, 젓가락으로 몇 가지에 불과했다. 내가 수저를 놓으면 안타깝게 생각하여 본자료인도 먹지 않곤 내가 잘 먹는 밤을 삶았었다. 작고하던 날에도 삶은 밤이 그대로 소반에 있었음은 내 상床에 올리려다가 그만 병이 위독하여서 하지 못한 것이니 아! 이런 일이 슬프도다.
효순왕후는 돌아가시는 해에 더욱더 영조英祖에게 지극한 효심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조가 거동이라도 하여 먼 곳에 나가 자고 오는 날이면 걱정을 하며 옷을 풀지도 못하고 앉아 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효순현빈孝純賢嬪이며,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묘에 합장되었다. 정조正祖 즉위 후에 남편이 진종眞宗으로 추존되고 효순왕후孝純王后가 되었다.
효순왕후孝純王后의 계통系統은 풍양豐壤에서 나왔으니 11대조는 부사府使로서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인 신愼이니 태종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은사恩師로서 수총군守塚軍을 명급命給하였다. 고조는 증판서贈判書 민珉이고, 증조는 증좌찬성贈左贊成 상정相鼎이니 예조판서禮曹判書 형珩이 친부가 된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로서 증영의정인 풍흥부원군豐興府院君 인수仁壽이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문하에 있었다. 아버지는 분무공신奮武功臣으로서 좌의정인 풍릉부원군豐陵府院君 문충공文忠公 문명文命이고, 어머니는 정경부인 이씨李氏이니 양령대군 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참판贈叅判인 상백相伯의 여女이다.
영릉(永陵 :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은 진종(眞宗 : 孝章世子)과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 : 豐壤)의 쌍릉雙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