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국사 환함 혼수
한국선사 법맥도法脈圖에서 환암혼수幻菴混脩 보각국사普覺國師의 위상 |
조 병 섭*
Ⅰ. 들어가며
풍양조문豐壤趙門를 근본으로 하는 고려말 대선사大禪師인 환암幻菴 혼수선사混修禪師는 1392년 9월 18일에 입적을 하니 세수 73세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한 달 남짓 만에 일로 태조 이성계는‘보각국사普覺國師’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탑호塔號가 하사한다. 역대 조사들을 찬송하는「불조록찬송佛祖錄讚頌」에서 환암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
身依豐壤趙奇男/ 풍양조문의 뛰어난 사나이로 몸을 맡기며
手建龍溪宴晦菴/ 몸소 용계에 연회암을 건립하였네
洪武選場能獨步/ 홍무년 공부선장功夫選場2)에서 홀로 재능을 떨쳤는데
志如快鷂自圖南/ 날쎈 매 처럼 스스로 도남3)에 뜻을 두었네
환암선사幻菴禪師는 조계종 선종禪宗의 가르침 계보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환암은 고려 말의 보우普愚와 나옹懶翁 중 누구를 주로 계승했느냐는 문제는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난제로 남아 있다. 조계종의 법통法統 문제이기 때문이다.
Ⅱ. 보각국사普覺國師 환암幻菴 혼수선사混脩禪師
<충주 청룡사지에 있는 국보 197호 보각국사 탑비> |
선사의 휘는 혼수混脩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속성은 조씨趙氏로 양주 풍양현豐壤縣이 본관이다. 환암幻菴은 선사의 호이며, 전직공殿直公 지린之藺의 5대손이다. 헌부산랑憲府散郞을 역임한 숙령叔鴒의 넷째 아들로 1320년(충숙왕7) 3월 13일 용주龍州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용주는 함경북도 용주지역이라는 설도 있으나 경북 예천군 용궁면 지역의 별칭이다. 12세에 어머니 청주경씨淸州慶氏의 권유로 계송선사繼松禪師께로출가를 하였다. 충혜왕 2년(1341) 승과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1934년 금강산에 들어가 정진하였으며, 그 뒤에 충주 청룡사 서쪽에 연회암宴晦菴을 짓고 머물렀다. 공민왕 19년에는 양종兩宗·오교五敎라는 선교통합의 방식에 기존의 승과에 합격한 사람도 응시할 수 있는 최고의 특별승과超僧科를 개최한다. 이를 공부선功夫選이라 한다. 이는 공민왕이 신돈辛旽과 거리를 두고 정국개편을 위해 만든 제도로 이를 주도한 분이 나옹懶翁 혜근慧勤이었다. 당시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모두 주목하고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임금이 배석한 친임시親任試인 공부선에 유일하게 입격한 인물이 바로 환암선사였다. 나옹이 직접 묻고, 환암이 답한 당시 시제인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이 <조선국보각국사비명朝鮮國寶覺國師碑銘>에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요약 정리한다.
홍무洪武 3년 경술(1370, 공민왕19) 가을 7월에, 상이 공부선장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상이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는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상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입문구入門句를 물으니, “들어왔지만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고 대답하고, 또 문내구門內句를 물으니 “안과 밖이 본래 공空인데 중中이 어떻게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또 삼관三關으로 묻기를 “산은 어찌하여 봉우리의 기슭에서 그치는가?” 하니, “높으면 곧 낮아지고 낮아지면 곧 그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는가?” 하니, “바다가 스며 흘러 곳곳에 개울을 이룹니다.”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찌하여 흰쌀로 짓는가?” 하니, “만약 모래로 짓는다면 어찌 좋은 밥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상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선사께서는 상이 내원內院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남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 있었다.4)
공민왕 23년(1374)에는 국왕에게 불법佛法을 가르치고 특히 왕대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우왕 1년(1375) 송광사松廣寺 주지로 취임을 한다. 공민왕이 승하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환암은 왕에게‘광통무애원묘대지보제선사廣通無碍圓妙大智普濟禪師’라는 법호를 받았다. 우왕 9년(1383) 64세로 보우선사普愚禪師의 입적으로 좀 긴‘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오불심종흥자운비복국리생묘화무궁도대선사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知雄尊者’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국사國師로 책봉된다. 공양왕 3년에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을 인성印成하여 서운사瑞雲寺에 봉안하고, 경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 1년(1392) 태조의 개국을 축하하는 표문表文을 올리고, 충주 청용사靑龍寺로 옮기어 문인에게 유서를 쓰게 하고, 입적 직전에 목은 이색에게 보낸 임종게臨終偈을 남겼다.5)
任運騰騰度一生/ 임의롭고 당당하게 일생을 보냈는데
病中消息更惺惺/ 병들어가는 기색은 더욱 깊어 가는구나
無人識得吾歸處/ 뉘라서 나 돌아가는 곳을 알리오
窓外白雲橫翠屛/ 창밖 흰 구름이 푸른 병풍에 띠를 이루는구나!
산란공 숙령叔鴒은 선사를 비롯하여 3형제를 두었지만, 불행히도 모두 후사後嗣가 없어 세계世系가 단절된다. 고려말·조선초 대표적 문인인 석간공石磵公 운흘云仡은 선사의 장조카이지만 석간공 역시 후사가 단절되었다.
Ⅲ. 조계종曹溪宗 법맥法脈 뿌리에 대한 논쟁
성철종정이 법맥을 바로잡기 위해 저술했다는『한국불교법맥』이라는 이론서가 있다. 이 책의 핵심쟁점은 승가에서 스승의 종류를 득도사(得度師: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주는 스승)와 사법사(嗣法師: 마음을 깨우쳐 법을 이어받게 해주는 스승)으로 구분한다며, 사법사의 계통을 법계法系·법맥法脈·종통宗統·종맥縱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조계종 내부에서는「보조종조설」,「태고종조설」양립하는 가운데 성철은 이를 기반으로임제-태고 법통설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즉 (중국) 보리달마 … → 조계혜능 … → 임제의현 … → 석옥청공 → (한국) 태고보우 → 환암혼수 →구곡각운 →벽계정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서산휴정·부휴선수 등으로 이어지는 법통이 한국불교 법맥의 정론이라며, 생명의 줄이라고 천명을 한다.6) 그 외의 법통설은 허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1962년 조계종의「종헌宗憲」은 우여곡절 끝에 포괄적으로 법통설을 절충하는데 종조 도의道義선사, 중천조 보조지눌, 중흥조 태고보우로 이어지는 법맥이다.7)
태고보우→환암혼수로 이어지는 법통설은 서산휴정의 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의 <청허당행장淸虛堂行狀>8)과 <봉래산운수암종봉영당기蓬萊山雲水菴鍾峰影塔記>에서 나타나는데, 휴정의 말년제자 편양이 주도하여 고려의 선종 전통을 배제하고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원의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 전수받은 임제종 법맥을 정통으로 내세운「임제태고법통」이 확립되었다.9) 이로써 고려말에 수입된 임제종臨濟宗10)의 법맥이 확립이 된다. 이를두고 조선 중·후의 법맥 정리 및 강조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유교적 보학譜學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법맥이 조선 중·후기에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선종의 가르침 계보이며, 그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 환암혼수이다. 논란의 핵심은‘환암이 보우와 나옹 중 누구의 제자인가?’이며,‘선종禪宗의 법맥을 보우로 볼 것이냐 아니면 나옹으로 볼 것인가?’등이다. 선문禪門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깨달음을 인가印可하고 인가받는 관계이기 때문에 반드시 만나서 법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태고의 법맥이 과연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관계를 모두 충족하는가에 대한 비판이다.
선禪 사상은 통일신라 말 국내로 유입되며 초기에는 북종선北宗禪이 유입되기도 하였으나 구산선문九山禪門11)이 형성되는 과정에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한다. 선종의 실질적 중흥조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다. 그는 특별한 스승의 가르침 없이 깨달음에 이룬 선승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해 불교개혁을 추진했고,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했다. 이후 여말 유학파 삼사三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나옹혜근懶翁慧勤·백운 경한白雲景閑에 의해 남종선인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이 유입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득도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종 계파의 고승들에게서 이를 인정받는 오후인가悟後認可를 받는다. 나옹은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보우와 백운은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 인가를 받는다. 나옹은 인도계의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인가도 받는다.
이렇게 선종에서는 스승과 제자 간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을 하는 깨달음을 인정하고 증명하는 오후인가悟後認可로 법맥을 잇는 것을 중히 여긴다. 깨달음의 등불을 전수한다고 하여, 전등傳燈이라 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나옹법통설」과「태고법통설」이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성철性徹은「태고법통설太古宗祖說」을 강력히 주장하고 보조 지눌普照知訥을 이단아 취급까지 하며, 조계종 법계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성철이 지눌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는 한국불교의 법맥과 돈오돈수 수행법이었다. 성철의‘돈오돈수頓悟頓修’12)와 지눌의‘돈오점수頓悟漸修’13)의 논쟁이다. 성철이 돈오점수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 해오解悟를 돈오로 만들어 버렸다는 데 있다. 임제종의 종풍은 돈오돈수 사상이며,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조는 태고 보우국사라는 천명이 성철의 일관된 주장이다. 성철은 구경각究竟覺을 역설했지만, 지눌은 모든 수행을 시작하기 이전에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지해知解적 해오를 더 중요시했다.성철은 엘리트주의적인 정선주의精選主義인데 반하여 지눌은 대중과 함께 하는 보살임을 자처하고 있다.14)
「나옹법통설」은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찬술한 <청허당집淸虛堂集 서문>과 <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四溟松雲大師石藏碑銘>에서 처음 확인된다. 교산이 사명四溟 문도들의 부탁을 받아 청허淸虛의 법통을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한다. 영명연수永明延壽 … 목우자(지눌)…강월헌(나옹)→남봉수능→정심등해→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사명유정으로 이어지는 법계이다. 또한 목우자(牧牛子, 보조지눌)와 강월헌(江月軒, 나옹 혜근)은 황매(黃梅, 홍인선사)의 종지를 얻었으며, 보제(普濟, 나옹)의 법맥이 청허 휴정에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보조지눌과 나옹혜근을 청허 휴정으로 연결을 시키고 있다. 그러나 교산이 제시한 법계에서 양명연수는 법안종法眼宗 삼조三祖인데 반하여, 학계에서는 지눌과 나옹은 법안종이 아닌 점과 나옹 윗대 법계의 불분명성을 지적하고 있다.15) 여기서 남봉수능南峰修能은 부정확한 법계 인식 등을 고려해 볼 때 환암혼수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16) 어떻든 편양언기鞭羊彦機와 중관혜안中觀慧眼 등 휴정의 문도들은 법안종 등을 거론하며 교산의「나옹법통설」을 부정하고「태고법통설」을완성한다.
나옹은 한국불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붓다’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고려말 민중과 함께한 고승으로 나옹은 임제선만 주장하지 않고, 국내 조계선을 확립한 보조지눌의 사상을 계승하여 교학과 정토 신앙을 함께 수행하며 대중을 교화했다. 나옹이 살아생전 존경받았던 이유는 지공指空의 사법 제자라는 점뿐만 아니라 항상 대중과 함께하는 민중 친화적인 교화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래 지눌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휴정의 후대 법손들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어 면면히 이어온 사상과 신앙의 흐름을 끊어버리고 중국 임제선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법맥을 정리하려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17) 환암혼수가 보우와 나옹을 모두 계승한 이중사법자로 해석은 되지만 무리하게 사법 스승을 나옹에서 보우로 바꾸면서까지 임제선의 법맥을 완성했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18) 이것이 현 교단은 물론 학계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종통 또는 법통의 논쟁이다. 어떻든 현재까지 전해지는 한국불교의 법맥은 환암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Ⅳ. 환암혼수의 법맥法脈과 그 위상
오늘날 전해지는 선종의 법맥은 고려말의 원나라 유학파인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을 넘지 못하지만 조선중기 이후부터 법계에는 두 고승 이외에 환암혼수幻菴混脩라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에 앞서 조선의 개국과 함께 환암이 입적한 이후, 무학자초無學自超가 전면에 부상한다. 그는 나옹에 대한 사법嗣法 또한 뚜렷하게 천명하며, 그 문도들은 나옹혜근→무학자초로 이어지는 법맥을 독차지한다. 환암이 나옹문도의 초기 문장門長 이었지만,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그 위상이 급격히 사라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위세는 나옹혜근→무학자초→함허득통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끊기면서 조선중기 이후 비주류로 밀려있던 보우→환암 법맥이 서산휴정의 법도에 의해 주류로 등극한다.
환암혼수가 나옹과 보우에 이중 사법제자이지만, 나옹을 우선으로 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이색李穡이 찬한 태고보우의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에 환암은 국사의 신분으로 가장 먼저 기록되며, 보우의 문도인 유창維昌이 찬한 <태고행장太古行狀>에 상수배上首輩로 되어 있다. 보우의 상좌인 목암찬영木菴粲英 왕사 역시 환암 다음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에 반에 권근權近이 찬한 환암의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에는 나옹의 사법에 관한 내용은 나와도 보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1360년 나옹이 오대산에 주석駐錫 하며, 당시 오대산 신성암神聖菴에 주석하던 환암이 고운암孤雲菴에 나옹을 찾으며, 처음 상견을 한다. 그 후 환암은 나옹을 자주 상견하고, 도의 중요한 요점의 본질을 물으며 사법 제자에까지 이루는데 나옹이 후에 금난가사金襴袈裟19)·상아불(자)象牙拂(子)·산형(석)장山形(錫)杖을 환암에게 주며 신표信標로 삼는다. 남종 에서는 대를 이어 계승자에게 전한다는 가사袈裟 상전相傳을 통해 스승이 사법제자를 인가하는 전통을 확립하였는데,<보각국사비>에는 나옹이 혼수에게 금란가사를 준 부분이 확인된다.20) 또한, 1370년에는 나옹이 주재하는 공부선功夫選에서 삼문구三門句 삼관구三關句로 유일한 입격자入格者가 된다. 1375년 환암은 9산선문 중에서 사굴산문 출신만 맡을 수 있는 송광사松廣寺 주지가 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376년(우왕2) 나옹이 입적하며, 3년 후 간행된 나옹의 문집인「나옹어록懶翁語錄」과「나옹가송懶翁歌頌」의 교정자校正者 즉 주간이 환암이었다는 점은 당시 나옹문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법제자는 환암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이색은 보우와 나옹의비문은 모두 짓는데 보우비문에서는 환암을 문도門徒라 하고, 나옹비문에서는 문생文生이라 하였다며, 문도는 일종의 무리라는 의미이고, 문생은 사법제자라는 뜻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21) 환암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다. 목은과는 30년 지기로 목은집牧隱集에는 환암을 생각하는 시 다수와 환암기 등이 실려있으며, 도은집陶隱集에도 시와 문文이 다수가 있다. 환암이 나옹과 동갑이고, 법랍은 길은 데 어찌 사제 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형식보다는 깨달음을 우선으로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든다. 이상의 내용을 비추어보더라도 환암은 보우보다는 나옹의 주된 계승자라 봐야 할 이유이다. 반면 보우의 상좌는 환암이 아닌 같은 가지산 출신인 목암찬영으로 봐야 한다는 학계의 의견도 있으며, 구곡각운龜谷覺雲이 환암의 제자가 아니라 졸암연온拙菴衍昷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는 목은집의 승련사기勝蓮寺記의 기록이다.
그에 반에 무학자초無學自超가 나옹문도 문장門長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은 1392(태조 원년) 환암이 입적하고, 그해 무학은 왕사가 되고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면서부터인듯하다. 나옹문도의 대표성은 전후 시기로 나뉘어 전반부는 환암 후반부는 무학이 대두되는 모습이 특징이다. 그러나 1410년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찬한 <무학대사비> 전반적인 흐름은 나옹과 무학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고, 무학이 나옹의 전법제자 중 상수제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문의 내용 대부분이 환암을 매우 의식한 듯하다. 1353년 원元에 유학하며, 원에 와 있던 나옹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 또한 나옹과의 관계에 경도되어 있는데, 중국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나옹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표 또한 평범‘불자拂子’이지만, 1359년 천성산千聖山 원효암元曉菴에 가서 친견하며 받는다. 송광사 주지도 환암보다 2년 빠른 1373년 9월부터 75년 9월까지 역임한 점도 부각한다. 그러나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기>의 문도질門徒秩에 혼수는‘전송광사 주지 겸 보제대선사普濟大禪師’로등장하는 반면 자초는 무학이라는 법호로‘수좌首座’총 30명 중 한 명으로만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22)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는 무학이 1394년(태조 3)에 중간한 종파도를 저본으로 1688년에 월저도안月渚道安이 중각重刻한 복판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옹을 사법한 인물은 무학이라며, 평산처림선사平山處林禪師→나옹혜근선사懶翁慧勤禪師→묘엄무학선사妙嚴無學禪師로 이어지는 나옹계 법맥을 제시한다.23) 무학의 저술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지만, 무학의 찬술 의도는 환암을 견제하고, 무학이 나옹의 유일한 적통임을 주장하려는 의도인 것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즉 환암을 나옹과 분리시켜 보우와 연결을 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24) 어떻든 휴정 문도의 사조인 편양과 스승인 풍담의 화엄교학을 계승시킨 도안道安은『불조종파지도』를 통해 석옥청공선사石屋淸珙禪師→태고보우선사太古普愚禪師→환암혼수선사幻菴混脩禪師로 이어지는 태고법맥을 재정비한다. 사조인 편양언기鞭羊彦機과 스승인 풍담의심楓潭義諶의 주창한 것으로 이를 제자로서 따른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Ⅴ. 맺는말
환암혼수幻菴混脩 보각국사普覺國師는 당시의 위상에 걸맞게 중요한 위치에 있던 분이다. 보우와 나옹의 이중사법제자二重嗣法弟子인 동시에, 그렇지만 나옹에 더 경도되어 있으므로 해서 무학의 견제를 많이 받은듯하다. 결과적으로 한국선사韓國禪師 법맥法脈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환암은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법계에 대한 인식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두드러지고 있다.
왜 나옹→환암이 아닌 보우→환암으로 완성되는 것일까? 무학이 ‘禪覺之嫡 즉 나옹의 적통이라’는 무학비문의 천명을 통해 본인의 정통성을 견고히 하며, 환암을 밀어낸 부분이 있지마는 서산휴정의 문도들이 나옹은 순혈성이 떨어진다고 본 부분도 있다. 나옹은 지공뿐 아니라 평산의 법맥도 계승을 했지만, 석옥의 법맥만 계승한 보우가 오히려 순수한 정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나옹은 지공은 인도계 승려를 계승했다는 점과 무학이 나옹의 적통이 되었지만, 법계가 단절되었다는 측면도 결국 나옹 혜근懶翁慧勤을 배제하고, 환암 혼수幻菴混脩을 임제종臨濟宗의 계승자인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연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조선의 중화주의에 기반한 중화 종속적인 사유구조의 산물이라며, 조선 중·후기 법계 인식이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목암 찬영木菴粲英 계의 단절, 지공→나옹으로 계승되는 법맥의 문제점 역시 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수 있다. 또한, 조선 불교계에서 나옹의 존재는 이미‘지공→나옹→무학'이라는 삼화상三和尙의 체계가 깊이 자리하고 있어‘나옹-환암'으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예측이다.
보우와 무학은 권력과 결탁한 권승權僧에 가까웠다는 세론의 인식이지만, 그에 반하여 나옹은 수행승의 청정함을 지키면서도 권력을 통해 민중에 다가서려 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공부선功夫選을 통하여 선·교종禪·敎宗 통합을 이루고 불교를 민중 친화적으로 바꾸려 했던 개혁적 선승이었다. 그의 사법제자인 환암 역시 청정 수행에 주력한 속세의 명리名利에 초연한 구도자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최근 일부 의견이지만 조계종「종헌」에나옹을 중흥조로 추가 편입하여 조계종의 통합적 가치를 확대하자는 견해가 있다. 그 이유는 지공을 통해 인도 선불교의 유입으로 중국선불교 종속문제를 탈피할 수 있고, 가지산문과 더불어 지눌을 포함한 사굴산문도 인정함으로써 다양성 확보가 가능하며, 태고보우를 종조로 하는 태고종보다 차별성을 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25) 그리고 보우는 물론 나옹의 법맥을 잇는 연결고리는 바로 환암혼수幻菴幻菴라는 것이다. 목은 이색26)이 환암을 그리워하며 읊은 목가적인 시 한 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奉懷幻菴 : 환암을 받들어 생각하다.
江水自千里/ 강물은 절로 천리를 흐르거니와
雲山知幾重/ 구름산은 그 몇 겹이나 되던고
心淸泉落石/ 맑은 마음은 물 빠진 돌과 같고
影靜月臨松/ 고요한 그림자는 달 비친 소나무 같네
早透禪關密/ 은밀한 선의 관문을 일찍 통하고
猶餘語業濃/ 많은 가르침까지 크게 남겼구려
何時更相對/ 언제 다시 만나 마주하며
半夜一聞鐘27)/ 한밤중 종소리를 한번 들어보려는가?
※ 이상의 내용은 필자가 지금까지 나와 있는 논문과 학설을 참고하여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註> |
* 두원공과대학교 전 총장, 풍양조씨연수원 원장
1)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불조록찬송(佛祖錄贊頌) / 佛祖錄讃頌
2) 당대에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모두 주목하는 최고의 특별승과가 바로 공부선인 것이다. 특히 공부선은 1370년에 신돈과 거리를 두고 정국개편을 시도한 공민왕이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배석한 일종의 친임시였다. 이러한 공부선장에 서 유일하게 입격하는 인물이 바로 혼수선사이다.
3) 대붕(大鵬)이 날개를 펴고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려고 한다는 뜻으로, 큰 꿈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4) 權近撰『陽村集』<普覺國師碑銘> 중에서 洪武三年庚戌秋七月 上設功夫選場 大集禪敎山門衲子 命懶翁試之 上親臨觀 翁下一語 諸衲無一能對者 上不懌 將罷 師後至 具威儀立堂門階下 翁問如何是當門句 師卽上階畣曰 不落左右 中中而立 問入門句 師入門曰 入已還同未入時 問門內句 曰 內外本空 中云何立 翁又以三關問曰 山何嶽邊止 畣曰 逢高卽下 遇下卽止 門水何到成渠 曰 大海潛流 到處成 問飯何白米做 曰 如蒸沙石 豈成嘉餐 翁乃頷之 上勑攸司制入格文 留宗門 師知上欲命住院 不告出城 隱於圍鳳山
5) 大東野乘, 慵齋叢話 제6권 (성현저, 권오돈번역), 한국고전종합DB
6) 김방룡,“지눌과 성철의 법맥 및 돈점논쟁 이후 남겨진 과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6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3
7) 박해당,“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사상 제11권
8) 한국전통사상총서 불교편 03 <淸虛堂行狀> 吾東方太古和尙, 入中國霞霧山, 嗣石屋而傳之幻菴, 幻菴傳之龜谷, 龜谷傳之登階正心, 登階正心傳之碧松智嚴, 碧松智嚴傳之芙蓉靈觀, 芙蓉靈觀傳之西山登階, 石屋乃臨嫡孫也.
9) 김용태,“청허 휴정과 조선후기 선과 화엄”, 불교학보 제73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5
10)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臨濟) 의현(義玄)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중국불교 선종(禪宗) 5가(家)의 한 종파이다.
11) 신라말 고려초에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이 산골짜기에 퍼뜨리며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9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 즉 가지·실상·동리·희양·봉림·성주·사굴·사자·수미 산문 등 9파를 일컫는다.
12) 돈오돈수:‘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 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더는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이다. 이는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의 가르침이다.
13) 돈오점수: 돈오로써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나더라도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일시에 제거되기 어려우므로 점수로써 점차 닦아나가 온전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14) 박성배,“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보조사상연구원 vol. no. 4, 1990
15) 김진영, “월저 도안의 선교관과 불조종파지도”, 한국선학 제41호, 2015
16) 高榮燮, “浮休 善修系의 禪思想과 法統認識”, ????韓國佛敎史硏究????4, 韓國佛敎史硏究所, 2013
17) 이철헌, “나옹헤근의 조선불교계 위상과 법맥”, 종교교육학연구 제64권, 2020
18) 염종섭,“幻菴混脩의 嗣法 정황과 法系에 대한 인식변화Ⅰ, 국학연구, 제33집, 2017*
19) 금난가사: 황금 실을 섞어 짜고 명주실로 무늬를 놓은 비단을 두른 가사로 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이다.
20) 염중섭,“幻菴混脩의 嗣法 정황과 法系에 대한 인식변화Ⅱ,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2호,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7
21) 이철헌,“나옹혜근의 조선불교계 위상과 법맥”, 종교교육학연구 제64권, 한국종교교육학회, 2020
22) 염중섭,“幻菴混脩의 嗣法 정황과 法系에 대한 인식변화Ⅱ,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2호,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7
23) 김진영,‘월저 도안의 선교관과 불교종파지도“, 한국선학 제41호, 한국선학회, 2015
24) 영중섭, 무학자초의「불조종파지도」 작성목적과 의미(Ⅱ),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6집, 2020
25) 염중섭,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 인식에 대한 재검토”, 선불교연구 30집, 2021
26) 이색, 『목은집』 목은시고 제11권, 한국고전DB
27) 두보(杜甫)의〈유봉선사(游奉先寺)〉시에, “잠 깰 무렵에 새벽 종소리 들으니, 사람을 크게 깨닫게 하는구나[欲覺聞晨鐘 令人發深省]”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