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서 본 곡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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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신해년공빈봉능도감계사(辛亥年恭嬪封陵都監啓辭)1) 

 

신해년 광해 3년(1611)에 봉능도감(封陵都監; 능역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계사(啓事; 어떤 일을 논하기 위해 임금께 올리는 글)에서 말하기를

「신등臣等이 매양 아뢰려고 하면서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감히 경솔하게 계품(啓稟; 임금이나 제후(諸侯)에게 아룀)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능成陵에서 100보도 못 미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조맹趙孟의 묘라고 합니다. 조맹은 선후(先后; 선대의 왕후 공빈)에게도 친족이 되므로 전에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선왕宣祖께서 이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합니다. 현재는 봉분이 허물어지고 묘역이 펑퍼지어 예전 묘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고 평지나 다름없지만, 기존에 있던 구묘舊墓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는 말들을 감히 가타부타할 수는 없으나 이미 이처럼 들은 말이니 신등도 감히 함부로 처리할 수 없기에 상감의 윤허를 기다립니다.」하였다.

 

광해 3년 5월 11일 경술庚戌, 봉릉도감封陵都監이 아뢰기를, 「조맹의 묘에 대해 도감이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조맹의 무덤이 가까운 언덕 넘어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후先后의 묘소와 동일한 원혈原穴이고 다만 상하上下의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처음부터 신 등이 늘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다만 외간에서 전해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한 까닭에, 감히 함부로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신들이 처리할 방도를 상의하였습니다마는 신들의 의견은 오직 한시바삐 옮기도록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손들을 찾아 물어서 그들에게 하여금 즉시 옮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조맹의 자손이 있는지부터 먼저 찾아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광해 3년 5월 17일 병진丙辰, 봉릉도감封陵都監이 아뢰기를,

「조맹의 자손을 찾아 물었더니, 조맹의 후손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난리를 겪은 후에 다들 외방에 흩어졌고, 간혹 현재 외임에 재직하고 있는 이도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사람 중에는 단지 삼척 부사 조희보趙希輔, 홍문관 교리 조즙趙濈, 전 수찬 조익趙翼, 예빈시 참봉 조수이趙守彝, 진사 조척趙滌 뿐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알았다. 조맹의 무덤을 옮길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다시 상지관相地官과 더불어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지관 김여견金汝堅이 말하기를

「옛날에 범월봉范越鳳2) 이 이르기를 『묘가 총상塚上에 있는 것은 가장家長이 침능侵凌하는 형상』이니 총塚이라는 것은 새로 쓰는 묘혈墓穴을 이루는 말입니다. 조맹 묘가 신혈(神穴; 공빈의 묘혈을 의미함) 아래로 30여보에 있는데 그사이에는 또한 조그마한 둥그런 봉우리가 막고 있고, 거의 800여년이 되어감에 따라 무덤의 형체가 없어지고 해골도 이미 흙이 되었을 것이니 재앙과 복으로 따져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개 옛날의 선철先哲들은 풍수상의 길흉은 지리(地理; 땅의 생긴 모양(模樣)이나 형편(形便))에 있다 하고, 고묘古墓를 파내는 것은 천리(天理; 천지와 자연의 도리) 있다 하니,

그렇다면 지리의 설에 대해서는 앞서 진달陳達한 바와 같으며, 천리의 이치理致에 이르러서는 신臣이 알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신의申誼는 말하기를

「묘의 새것과 묵은 것은 재앙과 복에는 상관이 없으므로 모든 지가서(地家書; 지술(地術)에 관해 적은 책)에도 파내라는 말이 없습니다. 조맹의 묘는 신혈神穴 아래 30여보餘步에 있는데 묘의 모습이 이미 오래된 무덤이라 지면地面처럼 평평하니 파내던 그냥 나누던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다만 국능國陵에서 정해진 거리 내에 있는 모든 묘를 파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규정이니, 이것은 신이 무엇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과 의논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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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빈김씨 묘역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직접 산과 언덕이 어떠한지 현지답사를 하지 못했고 복서卜筮에도 어두우니 단지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 사람이 잘 처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만 타 문중에서 혹 말하기를“조맹은 고려 초의 재상宰相으로서 우리나라 문벌門閥 중에는 계통은 멀지라도 그의 외손外孫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초에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할 때도 또한 먼 파派에 관련된다고 하여 피하지 않았다.” 하오니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말대로라면 반드시 평평해진 묘를 파낼 것 없이 단지 그곳에 나무를 심어 주변을 가꾸는 것도 무방한 것 같아 오니 상감께서 재가裁可하여 주소옵소서」 하였다.

 

영부사 윤승훈尹承勳,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 청평부원군 한응인韓應寅은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의견과 같았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와병으로 함께 의논하지 못했으며,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봉능도감제조(封陵都監提調)였으므로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6월 12일에 좌의정이 능陵에서 돌아와서 고告하기를

 

“신이 능에 가보니 모든 작업이 이미 끝났습니다. 조맹의 묘는 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산역山役이 끝난 후에는 출입이 몹시 어려우니 이장移葬 여부를 조속히 판하判下하소서.” 하니

 

6월 16일에 “파내지 말 것(勿爲拔去事)”으로 판하(判下: 상주(上奏)한 안을 임금이 허가하는 일)하였다.

 

 

[원문]

 

辛亥年恭嬪封陵都監啓辭

萬曆辛亥 封陵都監 啓辭云云 臣等每欲籲啓 而言端不出 故不敢率爾啓稟矣 去成陵未百步許有舊墓 俗相傳謂趙孟墓 者於先后亦爲親屬 故諺傳 先王不許遷移云 今則墳夷域平 無復有舊墓之形與平地 無異而旣是舊墓 且有諺傳之言 自外雖未敢信否 而旣聞云云之說 臣等亦不敢輕易處置 幷候上

 

裁辛亥五月十一日庚戌時, 封陵都監啓曰 傳曰: “趙孟墓自都監商議以處矣”“趙孟之墓非在近岡隔絶之地 乃與先后之墓同一原穴 而但有上下之差異 自初臣等常以爲未安 而只緣有外間相傳之語 未得其詳, 不敢容易處置矣 今承上敎 臣等商議以處 臣等之意唯有速令遷移而已 都監啓請尋問子孫 使之趁卽遷移何如?” 傳曰: "趙孟子孫有之乎? 先爲訪問以啓”

 

辛亥五月十七日丙辰 封陵都監啓曰: "趙孟子孫訪問 則趙孟姓孫不爲不多 而經亂之後皆散處外方 或有時在外任者 在京人中 只三陟府使趙希輔 弘文校理趙濈 前修撰趙翼 禮賓參奉趙守彛 進士趙滌云” 傳曰: "知道 趙孟墓遷移與否 更與相地官商議以啓”地官金汝堅以爲 昔范越鳳爲 墓居塚上家長侵凌之象 所謂塚者信用之穴也 趙孟墓在神穴下三十餘步 而又隔小圓峰 年將八百 墳形旣夷 骸骨爲塵揆之 禍福似無干涉 大槩古先哲輩以風水吉凶則歸之地理 古墓拔去則歸之天理 然則地理之說如前所陳 至於天理之理 非臣所知也

 

申誼以爲 墓之新舊別無禍福相干 而於諸書幷無拔去之言 趙孟墓在神穴下三十餘步 墳形已夷與地爲平 其拔出與否斷無利害矣 但國陵步數內拔出諸墓我國定規 此則非臣之所知也

 

傳曰議大臣

領議政漢陰李德馨議 臣未曾親審岡巒形止 又昧術家所傳 唯在當事諸人詳察善處 外間或言 趙孟乃麗初宰相 國中貴閥代系雖遠 多是其外裔 當初玄宮奉安時 亦以其干係遠派而不避云 此言未知眞贋 果若 此言不必拔已夷之土 而但種樹木以飾山形 亦恐不妨 伏 惟上裁

 

領府事尹承勳 完平府院君梧里李元翼 淸平府院君百拙韓應寅 領議政漢陰李德馨 議同 右議政一松沈喜壽 病不收議 左議政鰲城李恒福 則封陵都監提調 故不爲收議六月十二日 左議政來陵所啓曰 臣來到陵所 諸役已畢 趙孟墓在陵至近之地 畢役後 出入極難 其拔去與否乞速判下 同月十六日 勿爲拔去事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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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해년 광해 3년(1611) 공빈묘 봉능도감(恭嬪墓封陵都監)에서 왕에게 올린 계사

  2) 중국 명나라 때 진운인(縉雲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