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공 휘 맹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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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중공 휘 맹의 묘

 풍양재영건기

풍양조씨시조시중공유적비문

 

ma01.png 시중공侍中公의 묘

시중공의 묘역은 생전에 사시던 「독정리獨井里」라는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약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곳을 일명 적성골이라고도 한다. 묘소 위치는 현 지명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5번지」이다.

 

이 묘소는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달리던 한북정맥漢北正脈이 운악산雲岳山에서 남쪽으로 분맥分脈하여 주금산鑄錦山을 세우고, 다시 철마산鐵馬山을 올려세운 뒤 몸을 틀어 죽 이어진 산줄기에서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인 천마산天摩山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청룡左靑龍이 급하게 감싸고 우백호右白虎가 완만하게 에워싸여 천연의 성벽을 두른 듯한 조그만 분지의 복판으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힘찬 높고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급하게 좌우로 구불구불하며 내려오다 다시 몸을 휘어 흔들듯 잘록하게 학鶴의 목과 같이 부드럽고 깨끗하고 힘차게 결인속기結咽束氣하며, 다시 몸을 틀어 멈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혈장穴藏 가까이에 몇 번을 몸을 뒤틀어 그 기세를 더욱 떨치는 듯한 대단한 명당자리라고 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들은 감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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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시중공 맹孟의 묘

오른편으로는 깊숙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구불구불 골짝을 지나고 들을 건 너 왕숙천王宿川으로 흘러들고, 앞으로 멀리 바라보면 수락산水落山과 불암산佛岩山, 그리고 더 멀게는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峰山의 그림자들이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진다.

 

본래의 봉분封墳 모습은 지면에 가까운 석관石棺 형식의 고려 시대 사각 봉분이 아니었을까 추측되지만 조선 후기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인 공빈恭嬪의 묘 사건으로 인해 봉분이 무너지고 평장平葬이 되었다가 인조仁祖 시대에 와서야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여러 번의 사초莎草를 통해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활개를 갖춘 원형 봉분으로 최근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조각이 양각된 높이 104cm의 호석을 둘렀고 그 위에 70cm가량 봉분을 얹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묘표 그리고 상석, 장대석, 향로석 등의 석물을 새로 만들어 놓았으며 봉분중앙의 새로 만든 묘표는 전면에 2열로 "고려개국공신문하시중조맹지묘高麗開國功臣門下侍中趙孟之墓”라 쓰여 있다. 시조 시중공의 묘비명은 문장이 뛰어나 조선 중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힐 만큼 명문장가이며, 인조시대 대제학을 지냈으며 평장사공파 언국공彦國公의 외손이기도 한 계곡谿谷 장유張維선생께서 찬했으며, 뒷면은 포저공 익(浦渚公 翼)이 지은 묘비墓碑 음기陰記가 있다. 묘소의 복원에 대한 경과 및 시조 이하 세계世系 실전에 대한 변辯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평장사공파 대제학 송곡공 복양(松谷公 復陽)과 회양공파의 취병공 형(翠屛公 珩) 및 창강공 속(滄江公 涑)이 합심하여 표석을 세웠는데 송곡공이 묘표음기墓表陰記를 지었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의 천마산天磨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태종이 풍양에서 사냥하다 환궁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꽤 숲이 우거지고,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비록 천마산을 노래한 것은 아니지만 조문趙門의 자랑인 고려 말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仡: 1332~1404)이 즉흥적으로 지었다는 서정적인 한시 한편을 소개한다.

 

한나절 무렵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 柴門日午喚人開

숲속 정자까지 걸어 나가 이끼 낀 돌에 앉으니 / 步出林亭坐石苔

간밤의 산속 비바람 모질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엔 꽃잎 띄워 오누나 / 滿溪流水泛花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