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시조시중공유적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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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 휘 맹의 묘

풍양재영건기

풍양조씨시조시중공유적비문

 

ma01.png 풍양조씨시조시중공유적비문豐壤趙氏始祖侍中公遺蹟碑文

고려시대의 풍양현豐壤縣이었던 이 송능리松陵里 일대는 우리 풍양조씨豐壤趙氏 시조始祖 시중공侍中公의 유적이 있고 묘소가 계신 우리 조씨趙氏의 발상지發祥地이다. 공公은 여초麗初의 어른으로서 휘諱는 맹孟이요 초명初名은 바위라 불렀다. 공은 이 산하山下에서 출생하시고 이 산중山中의 석굴石窟에서 숨어 살면서 도道와 덕德을 닦으시었다.

 

이때 치평治平의 대망을 이루려는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현능賢能한 인재를 구하려고 이 석굴로 공을 찾았고 영무英武한 진주眞主와 일견계합一見契合한 공은 그 길로 태조를 따라 나와 고려 건국建國에 큰 공을 세우셨다.그리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셨더니 돌아가셔서는 이 고장의 주산主山인 천마산天摩山의 산령山靈이 되시었다. 이러한 유래緣由로 그 석굴石窟을 조암趙巖 수양굴修養窟 또는 견성암見聖巖이라 부르게 되고 그곳에 있는 약수藥水는 공公이 홀로 마신 우물이라 하여 독정獨井이라 불러 온다. 또는 산령각山靈閣의 탱화幀畵는 공의 영정影幀이요 판도방의 약사여래불상藥師如來佛像은 공이 예봉禮奉하던 원불願佛이며 아깝게도 지난 경인년(庚寅年: 1950)의 병화兵火에 없어진 석굴 위의 노송老松은 공의 수식송手植松이었다 한다.

 

이상은 여러 문헌文獻과 이 고장의 전설을 종합한 기록이거니와 우리는 여기에서 공이 얼마나 위대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천마산령天摩山靈이 되셨다는 말은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만년晩年에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은거隱居하다가 산신山神이 되셨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동일同一한 말로서 이는 옛날에 위대한 인물을 길이 숭봉崇奉하려는 소박한 신앙일 것이다.이로써 본다면 이곳에 있는 천석泉石과 문물文物은 어느 것 하나 공의 사적事蹟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할 수 있으니 그 자손된 사람의 관심 또한 어떠하겠는가. 그리하여 연대年代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에 자손이 공의 영적靈蹟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그 자리에 견성암見聖菴을 지어 수호하여 온 이래로 역대歷代 자손들은 그 정신과 사업事業을 계계繼繼 전승傳承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온다. 그런데 현재 여러 자손 중에서도 유사有司 동진東振씨는 그 성의誠意가 가장 빼어나는 분이라 할 수 있다.

 

이분은 우의정右議政 휘諱 경璥 호號 하서荷棲 시諡 충정공忠定公의 5대손으로서 명가名家의 가풍家風을 돈독히 지켜오는 분이거니와 지난 수 10년 동안 시중공侍中公 종사宗事를 주관하여 옴에 있어서 이곳은 서울에서 70 여리餘里나 되는 거리요 년기年紀 이미 고희古稀에 다다른 노경老境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정삭定朔이면 설풍風雪을 가리지 않고 성묘省墓와 참배參拜를 맨 먼저 이행하였고 한 달이 멀다 하고 수시로 다니면서 제반사諸般事를 두고 보살피며 세일제歲一祭 때면 각항을 일일이 간검看檢하여 정결精潔을 극진히 하여 오는 터이다.

 

더욱이 이분은 이곳에서 서남으로 월일강越一崗하여 계신 공의 묘소에는 의물儀物이 구비되 있으나 이 유적지에는 그 사적史蹟을 전하는 돌 하나 없음을 섭섭하게 여겨 한때 혹심酷甚한 생활고를 겪어 오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재력財力을 조금씩 저축貯蓄하여 온 끝에 이제 이 유적비遺蹟碑를 독담獨擔 건립하여 공의 천년 유적을 더욱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빛날 일대一大 장거壯擧라 하겠다.

 

앞으로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곳은 고려 초기에 조국과 민족에 크게 공헌貢獻하신 풍양조씨豐壤趙氏 시조始祖 시중공侍中公의 유적지遺蹟地요 팔역八域의 자손들이 성역聖域으로 지켜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일언일동一言一動을 삼가고 일석일목一石一木이라도 아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글을 맺는 바이다.

 

단기檀紀 4311년四千三百十一年 무오戊午(서기 1978년) 9월九月 일日

후손 풍양조씨화수회장豐壤趙氏花樹會長 정구鼎九는 삼가 짓고

간사幹事 남권南權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