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재영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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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재영건기豐壤齋營建記
이 풍양재豐壤齋는 우리 풍양조씨豐壤趙氏 시조始祖이신 시중공侍中公 휘諱 맹孟의 묘소 수호를 위한 재실齋室이다.공의 초명初名은 암巖, 곧 바위이시니 나말羅末 려초麗初의 어른으로서 이 고장 풍양현豐壤縣 독장산獨將山 암굴巖窟 밑에서 생장하셨고 초야草野에서 은거隱居 수도修道하고 계시다가 춘추 70이 넘어서야 고려高麗 태조와 제우際遇하여 건국에 수훈을 세우셨으므로 태조로부터 통합삼한뱍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이라는 훈작勳爵과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으셨고 관직官職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셨으며 마침내 우리 풍양조씨의 득성조得姓祖가 되시었다.
한 세대에 우뚝한 인물이 나면 당대當代에 숭앙崇仰될 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도 그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면서 경모景慕하게 되나니 공께서 하세下世하신지 이미 천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주민들은 이 고장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셔오고 있으며 옛날부터 공께서 태조와 제우際遇하신 암굴巖窟을 견성암見聖巖이라 칭하고 그 앞에 또한 견성암見聖菴이란 암자菴子를 지어 그 유적과 묘소를 수호守護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묘소와는 거리가 멀어서 수호와 행사에 지장이 있을 때가 많을 뿐만 아니라 대성大姓 거족巨族의 시조始祖 산하山下에 몇 칸의 재실 한 채 없이 내려옴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이는 선광연간宣光年間1) 에 공김恭金의 역내域內 입장入葬 이후以後 금제禁制로 인하여 유의막수有意莫遂2) 했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대는 변천變遷하여 이제는 그런 제재制裁는 없게 되었고 근년近年에 이르어서는 성소省掃하고 참배하는 자손이 점차 많아 감에 따라 재실齋室의 필요성이 더욱 고창高唱 되기에 이루었다. 이러한 염원念願이 화수회花樹會를 중심으로 무르익어 지난 무신년(戊申年: 1968) 가을에 회장 정구鼎九씨를 비롯한 역원役員들의 발의에 전국 종친宗親이 기꺼이 찬동하고 서로 협력하여 주었으므로 이듬해 여름에 착공하여 그해 가을 시중공侍中公 세향歲享 날에 낙성落成의 잔치를 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재실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아니하나 그 미재美材를 선용選用한 견고함과 신구新舊를 혼합한 우아함은 가히 자랑할만하다 하겠으며 더욱이 넉넉한 종재宗財로 지은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성금을 모아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할 때 한층 대견스런 느낌이 일지 아니할 수 없다. 이로써 공公의 덕업德業을 기리고 유적遺蹟을 지켜나가는데 견성암見聖菴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고 하겠다. 앞으로 자라나 후생後生들은 다 같이 옛날의 통한統韓에 위훈偉勳을 세우신 시중공侍中公의 후손 됨을 긍지로 삼아 생유익어세生有益於世하고 사유문어후死有聞於後토록 힘쓸 것이며 또 위선사업爲先事業도 잘 계승繼承하여 갈 것을 당부하면서 이를 영건기營建記로 적는 바이다.
서기西紀 1969년 기유己酉 국추菊秋 일
풍양조씨화수회豐壤趙氏花樹會 총무 龍九 근기謹記
<註> |
1) 선광(宣光)은 일반적으로 중국 북원의 소종 때의 연호(1371-1379) 이지만 여기서는 조선조 선조(宣祖)를 지칭한다. 따라서 선광연간(宣光年間)은‘선조 임금이 왕위에 있는 동안’이라는 뜻이다.
2) 유의막수(有意莫遂): 마음은 간절(懇切)해도 뜻대로 되지 아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