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음기
시중공 휘諱 맹孟 묘표음기 |
후손 대제학大提學 송곡 복양松谷復陽1) 지음
시조묘표음기始祖墓表陰記
우리 시조始祖의 성姓은 조씨趙氏요 최초의 이름은 바우巖이니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큰 공훈을 세우니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았고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개국공신壁上開國功臣으로 책훈策勳되었다. 지위는 상주국上柱國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루었다. 묘소가 풍양 적성동赤城洞이며 음택陰宅은 인좌寅坐 방향으로 둔턱에 있으며 후손들은 대대로 초부(樵夫; 나무꾼)의 접근을 금해왔다.
6백년이 지나서 광해군光海君의 생모 김빈金嬪을 시조始祖의 묘墓 후방後方에 장사를 지내게 된다. 그리고 높이 받들기 위해 능陵으로 승격시키니 우리 시조의 묘소는 평장平葬이 된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능陵이 혁파革罷되었으며 이에 다시 묘의 봉분을 단장하고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비문碑文을 지었으며 나의 아버지인 좌의정 문효공文孝公이 그 음기陰記를 남겼다.
그 후 30여 년에 후손 판서判書 형珩과 장령掌令 속涑과 상의하기를 “신도(神道; 묘 입구)에는 이미 현각(顯刻; 죽은 사람의 공적을 비에 뚜렷하게 새긴다는 뜻)이 있지만, 묘소에도 간략하게 기술하고 큰 글씨로 깊이 새긴 표석表石을 세운다면 더욱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다.” 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복양復陽은 송도유수松都留守로 있을 때 비용을 마련하고 판서判書와 힘을 모아 비碑를 새겨 세웠다. 우러러 생각건대 우리 시조께서 초야草野에 묻혀 있다가 참된 군주를 만나 통일의 공을 세워 하늘과 땅에 드높이고, 평소에 쌓은 덕이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후손의 벼슬길이 끈기지 않은지 700여 년이 되었구나! 사람들이 모두 의관지함(衣冠之藏; 옷과 관을 묻어두는 곳 즉 무덤을 뜻함)을 알아 앞으로 무궁無窮하도록 없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장한 일이로다!
始祖墓表陰記 惟我始祖趙氏 初諱巖 豐壤人 佐高麗太祖建大勳 賜名孟 策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位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 墓在楊州之豐壤赤城洞負寅之原 裔孫世禁樵牧 歷六百餘歲 光海所生金嬪葬墓後追隆爲陵 墓見夷 至仁祖反正 陵罷 乃復封墓 相國張文忠公維 撰碑文 吾先子左議政文孝公 實記其陰 其後三十餘年 後孫判書珩 掌令涑 與諸宗人謀曰 神道則旣有顯刻矣 墓前亦宜立表 且記大略 大書深刻 愈可以圖久遠 咸曰善 復陽前守松都 鳩財攻石 判書使工刻而樹之 仰惟吾祖 起草間 遇眞主 贊成統一之功 名垂天壤 積德流光 世聯珪組 于今七百年 人皆識其衣冠之藏 將不泯於無窮 嗚呼盛哉
後孫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復陽 謹記 進士 相愚 書
|
|
1)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3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 등을 하였고, 그 뒤 우참찬·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했다.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송곡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