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암은 조문의 메카
견성암(見聖菴)은 풍양조문(豐壤趙門)의 메카이다! |
조병섭*
Ⅰ. 들어가며
성인(聖人)을 친견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견성암(見聖菴)은 남양주 진건읍 천마산 서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본디 고려조 개국공신인 시중공(侍中公) 휘(諱) 맹(孟)의 수행처이었다. 문중에서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시중공은 젊었을 때는 농사를 지었으며, 노년기에 접어들며 천마산 기슭 견성암 자리에 들어와 은둔하며 수행자의 삶을 사셨다고 한다.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곳에 들어와 수행자의 길을 걸으셨는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시중공을 모시는 절을 지어 견성암은 풍양조문(豐壤趙門)의 분암(墳菴) 또는 원당(願堂)이라 칭하고 있다. 시중공의 분묘(墳墓)또한 견성암과 이웃하며 천마산의 한줄기가 서남쪽으로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달려가다가 천작天作으로 이루어진 길지라 한다.
Ⅱ. 원찰(願刹)과 분암(墳菴)의 변천과 재실(齋室)
고려시대 토호나 특권세력들은 대부분 자신의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갖고 있었다. 이 원당은 죽은 사람의 진영(眞影)과 위패(位)牌를 모시고 원주(願主)의 명복을 기원하는 법당(法堂)을 의미한다. 고려 초에는 원칙적으로 왕실 외에 관인(官人)의 원당 건립은 보장되지 않았다. 다만 특정 공신을 위해 일부 사원에 기일보(忌日寶)1) 를 설치하거나 시납하여 원당으로 삼게 하였다. 고려 초의 원당은 개경과 근기近畿 지방에 집중되었다.2) 그러나 무신난 이후, 원당과 원찰은 불교가 크게 번성하며 왕실을 비롯하여 관인 및 고승의 원당이 활발히 건립된다. 원당 건립은 조선조의 숭유(崇儒)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궐 안의 내불당(內佛堂), 왕실 원찰 및 명문가 분암(墳菴)으로 이어졌다. 이는 정조(正祖)가 즉위하며 혁파된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관인의 원찰 건립은고려시대 신숭겸(申崇謙) 묘역의 원당이 그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왕건은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포위된 자신을 대신해 변장하고 싸우다 전사한 신숭겸 추모를 위해 원당 건립을 지시한다. 당시 후백제군은 죽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고 머리를 잘라 돌아간다.
세조 때 강원도 관찰사인 손순효(孫舜孝)가 작성한 「장절공유사壯絶公遺事」에 의하면, 태조는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목수에게 그의 두상(頭像)을 만들게 하여 광해주(光海州)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현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하고, 원찰(願刹)을세웠다고 전한다. 안홍중(安弘重)의「추원사기追遠寺記」기록에서는 묘소를 수호하는 것으로 초동의 화재를 막는 것이 우선이니 이를 위해서는 마땅히 절을 지어 승려를 뽑는 것 이상의 마땅한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풍속으로 장절공 신숭겸이 그 제도를 처음 만든 이래 유명한 이의 묘역에 절이 없는 곳이 없다.3)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절공 신숭겸의 묘소에 사찰을 세우고 승려가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이다. 즉 이 원찰이 묘역에 초동(樵童)의 화재를 막고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한 분암(墳菴)의 시원이라 볼 수 있다. 분암은 기본적으로 가문의 선조 묘소를 수호하는 기능을 가지며, 불교적 구조를 지닌 암자이다. 분(墳)은 무덤이고, 암(菴)은 암자이니‘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일컫는다.
고려 시대에는 토호나 특권세력들이 원찰, 원당을 갖고 있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조선 초까지 이어지면서 분암이 널리 건립되었다. 조선시대 명문거족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조선 태종 때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1370~1422)은 시조 박응주(朴應珠)의 묘역 수호를 위해 세종조 때 전남 나주시 반남면에 석천암(石泉菴)을 건립한다. 그러나 영조 16년(1740)에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충남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된 영사암(永思菴)은 연산지역에 대대로 세거하여온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분암이다. 이 암자는 김철산(金鐵山)의 아들들인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을 비롯해 겸광(謙光)·정광(廷光)·경광(景光)에 의하여 성종 6년(1479)에 창건되었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고암사(高菴寺)라 칭하였으나 후대에 영사암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은 암자를 겸한 수호사守護舍로 승려를 두어 묘소를 수호하고 독경과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4)
성재암(聖在菴)은 조선조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가 창건하였다. 세종 30년(1448)에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 윤번(尹璠)(1384~1448)이 졸한다. 세조 2년(1456) 친정어머니 흥령부대부인(興寜府大夫人) 인천이씨가 타계하자, 세조는 의경세자(懿敬世子)(성종의 생부, 덕종)를 보내 명복을 빌게 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성재암이란 36칸의 절을 짓고, 목불을 하사하는 한편 수호 승군 20명을 파견하여 수호케 하였다. 그 이후 파평윤씨 집안은 경내에 재실인 본방능재(本房陵齋)5) 를 짓고 부원군의 위패를 모셨으며, 강당 첨파루(瞻坡樓)를 지어 종회나 강학당 등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족보를 편찬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분암(墳菴)은 고려 시대에 불교식 화장 장례가 유행하면서 창건되었다. 즉 화장예식에서는 화장한 유골을 일정한 기간 보관하였다가 매장하는데, 이처럼 매장 전 유골을 보관하며 불교적 재(齋)를 올리는 곳이 분암이었다. 그리고 분암은 매장 후 묘역 근처에서 묘를 수호하고, 망자의 명복을 비는 불교적 제의(祭儀)를 행하는 곳이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내세우는 조선 사회에서도 유학자들은 불교 승려와 신도들이 일으킨 폐단을 비판한 것이지 불교의 사상과 교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분암은 사대부 계층에서 15세기 중엽까지 널리 성행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 예학이 발달하며 부계(父系) 중심의 친족 결속력이 더욱 강화되고, 문중 문화가 형성된다. 특히 선영에서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됨)한 조상을 모시는 묘제(墓祭)가 성행하고 묘소, 위토(位土) 관리 등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재실(齋室) 건립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분암 또한 규모를 확장하여 재실의 기능까지 수행하며 규모가 커지고 그 기능과 역할도 다양해진다.
대표적으로 노성(魯城) 파평윤씨 문중의 분암인 정수암(淨水菴)이다. 분암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묘수호의 성격보다 문중이나 종학(宗學)을 뒷받침하는 성격의 분암이다. 이곳은 종회(宗會)를 개최하거나 독서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우(師友)들이 강학을 하거나 재계(齋戒)를 하였다고 명재 윤증(明齋尹拯)은 연보 제1권에 기록하고 있다. 명재의 백부인 동토 윤순거(童土尹舜擧)는 집안사람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병사(丙舍)에서 종학(宗學)을 열기 위해 정수암 내에 1640년경 백록당(白鹿堂)을 건립하였다.6) 그리고 그는 종약宗約을 제정하고, 문중의 선산과 재실 운영을 위한 의창제(義倉制)7) 도 도입하였다.
이렇게 18세기 후반부터는 승려 대신 재실을 관리하는 재직齋直이 맡게 되면서 분암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재실 기능만 이어져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와 다르게 분암의 본래 기능인 문중사찰을 고수해 오는 사례도 있다.8)
Ⅲ. 견성암(見聖菴)과 시조 휘 맹(諱 孟)의 출자(出自)
견성암 전경 |
견성암(見聖菴)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건오남로 390번길 284에 위치한 풍양조씨의 원찰이다. 예전에 견성암은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에 속했지만, 현재는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의 분암으로 운영되고 있다. 분암은 불교적 구조를 갖춘 암자이지만, 조상의 묘역을 수호하는 유교적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이곳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풍양조씨의 시조인 휘(諱) 맹(孟)이 은거하며 수양하던‘바위굴(巖穴)’도있다. 바로 바위굴에서 시중공은 수양하였고,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도 친견하였다 하며, 그런 연유로 후손들은 원당(願堂)을 건립하며 약사불(藥師佛)을 봉안하고, 왕실의 안녕은 물론 시중공(侍中公) 휘(諱) 맹(孟)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변천되어왔다.
풍양조문(豐壤趙門)의 비조(鼻祖) 휘(諱) 조맹(趙孟)은 고려조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상주국(上柱國)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라는 다소 긴 공적과 위계의 벼슬명을 갖고 있다. 약칭하여 시중공(侍中公)이라 한다. 시중공의 초명은 파회(破回)이니 방언으로‘바우’9) 이며, 이를 한자식으로 표현하면‘암巖’이 다. 그의 묘소는 풍양현(豐壤縣) 적성동(赤城洞) 신향(申向)의 언덕에 있으니 천년의 역사를 품은 그 기세가 아직도 위풍당당하다.
문간공 수익(文簡公守翼)은“시중공 휘 맹은 처음에 풍양(豐壤)의 독산(獨山) 암석(巖石) 밑에서 태어났고, 그 후에 풍양에서 살았다.”10) 라고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글로 남겨다. 왕건이 시중공을 만나는 과정도,“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征伐)하다가 영해지방(寧海地方)에서 크게 패전하며, 제장(諸將)들과 함께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데 그를 따르는 장수들이 말하기를‘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꼭 풍양에 사는 조암(趙巖)을 만나 상의해야만 왕업(王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는지라 태조 왕건이 이에 몸소 찾아가 청하여 정승(政丞)으로 삼으니 시중공께서 왕건을 처음 만날 때 연세가 70세 정도였다.”라고 전한다. 이 역시 화천공 즙(花川公濈)이 정경세(鄭經世)선생11) 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 한다.12) 그러나 후삼국 통일과정에 영해전투라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아마도 대구 팔공산 일원의 공산전투(公山戰鬪)(927년)를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세보(世譜)에는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되어있는데, 공산전투를 기준으로 보면 시중공이 이 세상에 출자한 해는 857년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조바위(趙巖)를 찾아와 처음으로 마주친 곳은 지금의 견성암(見聖菴) 뒤쪽에 있는 조그만 천연동굴인 견성암(見聖巖) 13) 이다. 일명 수양굴(修養窟) 또는 바위굴(巖穴)이라고도 한다. 동강공 상우(東岡公相愚) 14) 는 다음 기록을 남겼다. 시조의 묘소에서 동북 방향으로 산등성이를 넘으면 5리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지점에 조바위(趙巖) 15) 가 있다. 바위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양지쪽을 향하고 있는데 형세가 높아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있다. 스님이 사찰을 세워 수호하고 있다. 속세에 전하기를 “공께서 세상을 피하고 숨어서 덕을 많이 쌓아 명성을 드날리니, 고려 태조께서 인물을 찾는 중, 이 바위에서 맞아들였으므로 후인들이 초명(初名)으로‘바위’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부암(傅巖)에서 열(說)이라는 인물을 얻어 부씨(傅氏) 성을 하사한 것과 같은 사례이다.” 16) 하였다. 시대와 세태가 변천하면 자손이 알지 못할까 하여 이에 기록하는 바이다. 바위의 이름을 견성암(見聖巖)이라 부르기도 한다.17) 여기서 견성암(見聖巖)은 태조 왕건이 성인(聖人) 즉 시중공 휘 맹을 처음으로 친견하였다는 천연 바위 동굴인 수양굴(修養窟)을 가리키며, 견성암(見聖菴)은 천연동굴 앞에 있는 작을 암자(菴子) 즉 절을 일컫는 말이다.이쯤 해서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상을 엿볼 필요가 있다. 8세기 후반 중앙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왕권은 약화되고,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며, 지방의 토착세력인 호족(豪族)들은 지방의 행정권·군사권을 장악하며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한다.
또한, 선종(禪宗) 승려들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선종의 지지 세력은 중앙귀족과 지방호족들이며, 신라 중·하대에 융성기를 맞이한다. 그 무렵 선종(禪宗)은 승려들이 대거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며 급격히 성장한다. 이들은 귀국하여 중앙으로 간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유곡(深山幽谷) 사찰로 들어간다. 이를 선종 9산문(禪宗九山門)이 18) 이라 한다. 가지(迦知)·실상(實相)·동리(桐裏)·사자(獅子)·성주(聖住)·사굴(闍掘)·희양(曦陽)·봉림(鳳林)·수미(須彌)을 말한다. 이곳에 선사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귀족 출신이거나 중앙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선사(禪師)들은 선법(禪法)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려는 노력과 지방 각지의 호족들은 이를 받아들이며 선종(禪宗)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들은 이전 불교를 거부하며, 부처와 중생은 일심(一心)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여아무이(如我無異)의 평등의 진리인 대승불교를 표방하며,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실천불교의 기치를 높이 든다. 그 후 승려들과 지방호족, 지배계급과 민중들은 선사(禪師)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19)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는 선종은 6세기 초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보리달마(菩提達摩)를 초조(初祖)로 한다. 선종의 특징은 시적(詩的) 직관(直觀)과 함축성이 풍부한 선문답(禪問答)으로 노장(老莊)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신라에 전파된 선종(禪宗)은 남종선(南宗禪) 계통으로 그 대표적 선승이 육조(六祖) 혜능(惠能, 638-713)이다. 혜능에게 있어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인간의 본성을 대상화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衆生)이 본래부터 깨달음을 지닌 것을 아는 것이며, 이것을 알고 난 다음 불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그 본성을 아는 것이 그대로 불타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계율이나 선정(禪定)에 의하지 않고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을 지향하는 반야(般若)의 지혜인 것이다.
시중공 휘 맹(孟)과 불교에 대한 역사적 관계의 재정립은 매우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이다. 바로 풍양조씨 출자에 대한 전설적인 신화의 비밀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설 중 “시중공께서는 수양굴(修養窟)에 은거하며, 도를 닦다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하였다.”라는 유래에서 그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 문단을 곱씹어 보면 여러 가지 추측을 낳는다. 즉“공께서는 도사(道士)였을까? 선승(禪僧)이였을까? 아니면 풍양현(豐壤縣) 호족장(豪族長)이었을까? ”라는 의문이다.
창강공 속(滄江公涑)20) 이 기록한 글을 보면, 시중공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적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하는 연상을 하게 된다. 바위는 덩치가 크지만 실은 겁쟁이입니다. 언제나 관인(官人)들이 지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풀밭으로 달려가 숨었다가 멀리 지나간 후에 나옵니다. 이제 대왕께서 여기 계시는데 어찌 나오려 하겠습니까?21)
무위자연은 노자(老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유래되었지만, 노자의 사상을 받아들여‘도(道’)사상을 주창한 것은 장자(莊子)였다. 장자는‘도(道’)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인간을 초월한‘진인(眞人)'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불교가 수용된 초기에는 중국 고유의 사상과 문화에서 쓰여왔던 언어와 사유방식을 통해 불교 경전을 이해하려 하였다.22) 이에 장자의‘도’와 ‘진인’ 개념은 어느새 불교적 용어로 전환되어 서로 혼용되었다.이렇게 볼 때 도사(道士)란 도교적 입장 또는 불교적 입장에서 도의(道義)를 궁구하며 수행하는 사람 즉 출세진인(出世眞人)을 뜻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도사道士는 재물을 많이 가진 선비로, 재가(在家)에서 도를 닦거나 불도(佛道)를 닦는 거사(居士)를 말한다. 이렇게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도교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고, 불교사상을 받아드리는 매개 역할도 했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부처로서,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원만한 행동과 취사(取捨)를 하는 부처)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正覺)의 묘과(妙果: 열반과 같은 아주 뛰어나고 훌륭한 결과)를 깨달아 얻게 하는 부처이다.23)
호족(豪族)이란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보통 신라말·고려초에 활동한 지방세력을 가리킨다. 유형별로 보면 첫째 낙향한 귀족 출신의 호족, 둘째 군진(軍鎭)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족, 셋째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이다. 여기서 풍양현(豐壤縣)의 변천은「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24)
농양현(農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무오(1018년)에 양주(楊州)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주(抱州)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1419년)에 다시 양주도호부에 붙였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넷이니, 이(李)·강(姜)·윤(尹)· (劉)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중공(侍中公) 휘(諱) 맹孟은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장豪族長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수양굴(修養窟)에 은거하며, 도(道)를 닦다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하였다.”라는 기록을 견주어 볼 때, 도(道)를 닦거나 불도(佛道)를 닦는 도사(道士) 또는 거사居士의 풍모를 갖춘 호족장인 것이다.
시중공 휘 맹께서는 호족장으로서 도가철학의 중심사상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받아들이며, 늘 불도도 닦았던 풍양거사(豐壤居士)였을 것이다. 순수하게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추구한 일종의 달관주의(達觀主義)이다.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또한, 시중공은 신라 말기의 사회 환란 속에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한 호족 세력이며, 선종(禪宗) 계통의 승려와 힘을 합쳐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고려 건국에 참여도 이 때문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흉년이 잦았고 전염병이 나돌았으며,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 시기에 시중공 휘 맹께서 친견하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재난을 제거하고 수명을 연장해주는 부처님으로 현세 구복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통일신라 시대 약사신앙이 유행하고 약사여래상이 양적 증가했던 까닭은 8세기 중엽 이후 사회적으로는 질병·재해·기근이 만연하고 정치적으로는 지배층의 대립·항쟁이 격심했던 시대 배경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25)
그 무렵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호족들은 태조공신(太祖功臣):三韓功臣이 되었고, 각기 성姓과 본관(本貫)을 분정(分定 )또는 사성(賜姓)되기도 했다. 지배층들에 성씨도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은 제각기 출신지 군현(郡縣)에 토성土姓으로 지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는 성씨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분정된 것이다. 우리 씨족도“풍양현(豐壤縣)의 토성이 하나이니, 조(趙)요,”라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시중공께서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은“조(趙)”라는 성(姓)이 아닌“맹(孟)”이라는 명名 즉 이름이다. 송곡공 복양(松谷公復)陽은 시중공(侍中公 )맹(孟)의 이력을 묘표음기(墓表陰記) 2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시조의 성은 조씨이고, 초기 이름은 암(巖(이니 풍양인(豐壤人)이다. 고려의 태조를 도와 큰 공훈을 세우니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 벽상개국공신으로 책훈(策勳)되었으며, 지위가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였다. 묘소가 양주의 풍양 적성동 부인지원(負寅之原 )27) 에 있는데 후손이 대대로 초목(樵牧)을 금하여왔다.28) - 이하 생략 -
「세종실록지리지」및「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본관 풍양(豐壤)은 관할 구역별로 분정되고 하사받은 토성(土姓)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조씨(趙氏)라는 성씨(姓氏)의 유래는 정확한 기록이 없고, 설화나 민담으로 전해지는 것도 없다. 단지 기존의 문적을 기반으로 추측을 할 뿐이다. 첫 번째는 삼능산(三能山)이라는 별호(別號)가 신숭겸(申崇謙)이 되었듯이 바위(巖)라는 토속적 별호가 조맹(趙孟)으로 되었다는 사성명설(賜姓名說)이다. 두 번째는 조씨(趙氏라는 성姓은 이미 득성(得姓)되었고, 70세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장수의 기백과 풍모에 왕건(王建)은 탄복하여 바우(巖) 보다는 우두머리 또는 용맹스럽다는 뜻의 맹(孟)을 하사했다는 사명설賜名說이다. 조씨라는 성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존재한듯하다. 그 한 사례가 실존 여부가 불분명하지만, 백제의 개국공신 조성趙成을 시조로 하는 직산조씨稷山趙氏의 경우이다. 어떻든 풍양조문에서는 이름만 받았다는 사명설賜名說이 지배적이다. 그에 반하여 포저공 익浦渚公翼은 시조의 묘비음기墓碑陰記에서 “동방에 있는 조씨 중에서는 오직 우리 풍양豐壤이 가장 오래되었다.”29)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다면 사성명설賜姓名說도 일면 타당하여“조씨趙氏”라는 성姓도 이름名과 더불어 사성賜姓받았다 라고 할 수도 있다. 양주조씨楊州趙氏 측에서는 송나라 태조의 7대손 익翼의 아들 4형제가 고려로 건너와 배천·한양·풍양·양주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역설한다. 또한, 나라 조趙를 쓰는 조씨 대부분이 송대宋代 귀화족歸化族이라는 도래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풍양조문은 귀화족이 아닌 토착성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시조 묘의 건재함도 이를 입증하는 근거이다. 중국의 경우는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姓으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스스로 본인을 칭할 때 호칭)·자字(타인이 본인을 칭할 때 호칭)를 성으로 삼은 것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30)
시중공 휘 맹이 풍양현의 호족장일 가능성을 입증할 만한 또 하나의 근거는 풍수지리적으로 길한 명당인 음택陰宅에 분묘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 자리를 조선 왕가인들 놓칠 수 있겠는가? 광해군의 모친인 공빈김씨恭嬪金氏가 1577년 사망하자 시중공의 묘소로부터 30보쯤 뒤쪽에 선조宣祖는 공혈孔穴을 찾아 매장을 지시한다. 그 후 시중공 묘는 많은 수모를 겪는데 이를 우리는 분묘경변곡절墳墓經變曲折이라 한다.31)
여기서 잠시 나말여초의 시대상을 엿볼 필요가 있다. 신라말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32) 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도참사상圖讖思想과 결합하여 고려 시대에도 크게 유행을 한다. 도참은 미래를 암시해 주는 상징, 징조인‘도圖’와 참언讖言 즉 예언의 뜻인‘참讖’을 개념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풍수신앙과 음양복술陰陽卜術이 합쳐진 예언을 믿는 사상인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로 진화를 한다. 특히 신라말에 귀족의 향락과 사치 생활을 반발하며, 호족들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금성(경주)의 운수가 다했다고 국가의 쇠망론을 주장하며 지방세력을 키워나갔다. 도선道詵 33) 이 새로운 왕조의 창건 예언을 정당화한 훈요 10에서 언급되었던 풍수지리설은 명당으로 지목된 지방 중심적인 국토관으로서, 호족 세력에게 확장·재구성하는 명분도 제공했다.34)
시조 시중공 휘맹 분산도 |
풍수지리설의 기본 요소는 山(곧 龍)·水로 이루어져 있다.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인‘혈穴’과 그 혈의 생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주변을 감싸고 있는 형세인‘사砂’로써 그 형세로 명당明堂을 판별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시중공 휘맹의 묘소 주변 사砂의 생김새, 즉 산의 모양을 살펴보면 천마산의 지맥이 서남쪽 서울 방향으로 이어진 산줄기의 한 구비에, 이곳을 급하게 감싼 좌청룡左靑龍 능선과 완만하고 더 길게 에워싼 우백호右白虎 능선이 양 날개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이 좌청룡 우백호가 둘러선 작은 분지를 가로지르는 천마산 지맥支脈은 학鶴의 목처럼 뻗은 능선의 정상에 용맥龍脈의 정기가 모이는 혈穴을 형성한다. 그 바로 아래 천작天作으로 이루어진 길지라는 시중공의 분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풍수지리적으로‘학정혈鶴頂穴’이라 한다. 오른쪽으로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굽이치며 지나 들을 가로질러 왕숙천에 합류한다. 바로 묘가 있는 능선 아래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작은 샘물이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진응수眞應水라고 한다. 용맥 양변에서 용의 생기를 보호하며 따라왔던 원진수가 묘 뒤에서 갈라졌다가 다시 앞에서 합수하여 생긴 것이다. 진응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용의 기가 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수락산, 불암산, 그리고 더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이 펼쳐진다. 35)
또 다른 풍수가의 주장으로, 묘를 감싸고 있는 현무玄武·주작朱雀·청용靑龍·백호白虎는 서로 빈틈없이 서 있고, 앞산 너머로는 불암산과 북한산까지 이곳을 향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들이 주밀하게 감싸며 보국輔國의 형상이라서 기氣가 오랫동안 보전된다고 한다. 그만큼 발복發福이 오래간다는 뜻이다. 전후좌우 봉우리들은 그 모양이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文筆峰, 노적가리처럼 생긴노적봉露積峰, 말의 등처럼 생긴 천마사天馬砂 등이 즐비하다. 특히 묘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은 여의주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이 때문에 이곳의 혈명穴名을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간다는‘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또는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논다는‘비룡농주형飛龍弄珠形’으로 보기도 한다.36)
어떻든 시중공의 묘터는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 즉 최고의 묏자리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당시 권세와 재력을 갖추지 않은 집안으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다. 살아생전 시중공께서 직접 찾은 길지인지, 아니면 후손들에 의해 마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산중 깊은 곳 사砂와 혈穴 찾아 헤맨 흔적을 통해 당시 가문家門의 위상을 가늠할 뿐이다. 그 비밀은 이웃하는 견성암에 있는듯하다. 시중공 이후에 세계世系는 한동안 실전되었어도, 시중공의 분묘만은 보존이 된 것도 원찰인 견성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Ⅳ. 풍양조씨 분암(墳菴)으로서의 견성암(見聖菴)
견성암은 시중공侍中公 휘諱 맹孟이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였다는 수양굴修養窟 앞에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분암墳菴이다. 풍양조씨대종회는 묘위답墓位畓을 마련하여 견성암에 귀속시켜 승도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주고, 묘위답 경작은 물론 제관 명첩名帖, 묘위답 문서와 묘소 관리, 벌초 등을 맡겼다. 또한, 종인들이 묘위답을 빙자해 침탈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분암의 승려들을 보호하였다. 37)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은 17세기 중반의 풍양조문豐壤趙門 대종회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11년 광해군光海君의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 묘가 성릉成陵으로 추존되며, 우리 시조인 시중공 휘 맹의 묘소는 평장平葬을 당한다. 다시 후손의 노력으로 복원과 석물을 갖춘 것은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이다. 묘 복원에 주도적인 역할은 포저공 익浦渚公翼 38) 을 비롯하여 즙濈, 정靖, 방직邦直, 흡潝, 직溭 등이 한다. 그 이후 대종회의 설립은 동강공 상우東崗公相愚의 주창으로, 숙종41년(1715, 乙未)에 학당공 상경鶴塘公尙絅, 묵소공 석명墨沼公錫命, 군수공 명정郡守公命禎 등의 도움으로 사초莎草를 하고, 시중공 성묘省墓의 상례화와 족보간행을 위한 발의 모임이 효시이다. 39) 이를 우리는 재경在京 3파 즉 쌍동파雙洞派40) , 청교파靑橋派41) , 포저파浦渚派42) 라 지칭한다.
최초의 묘위답墓位畓은 1738년 귀록공 현명歸鹿公顯命 43) 과 학당공 상경44) 각파 종인들의 성금으로 마련되었으며45) 견성암 승려들에게 수입한 곡물로 세일제 제수를 삼게한다. 1760년(영조36)에는 귀록공의 아들 풍성군 재득豐城君載得과 학당공의 아들 영호공 엄永湖公曮 46) 이 특별찬조금을 출연하고, 그 외 종인들의 도움을 받아 묘위답을 추가로 매입하고 추절목追節目을 남긴다. 47) 이는 종중의 재정구조를 튼튼히 하여 승려들의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견성암見聖菴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고려 중엽인 1,200년경 후손들에 의해 시조인 시중공 휘 맹을 기리기 위해 수양굴 앞뜰에 암자를 세웠다고 추측할 뿐이다. 바로 옆에는 시중공이 홀로 수도할 때 마셨다는 독정獨井이라 불린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해서 그런지 견성암은 주변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진「독정이 절」이라 별칭을 갖고 있다. 이런 연유로 암자 아랫마을도 독정리라 칭한다. 또한, 이곳에는 조문趙門에 명망가가 타계하면 가지 하나씩 말라 죽었다는 천년노송千年老松이 있었다. 그러나 이 노송은 6·25 전란 중인 그해 1950년경에 산령각山靈閣과 약사전藥師殿 사이로 쓰러졌는데, 두 사찰은 신령스럽게도 멀쩡했고 노송만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씻을 수 없는 민족사적 비극을 노송인들 용납할 수 있었을까? 씨족의 안녕을 위하여 살신공양殺身供養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동족상잔同族相殘 비극의 묵시적인 표출이라고 해야 하나? 영험한 신神 만이 알 뿐이다. 견성암은 1860년(철종11) 후손인 보월 혜소普月慧昭에 의해 재건축되는데 이때 법당 및 우화루雨花樓를 중수한다. 1882년(고종19)에 봉성 서린鳳城瑞獜 화상和尙이 불상佛像을 개금·중수하고 각 전각의 불화佛畫를 새로 조성하였다. 대웅전·약사전·산령각에 걸려 있는 불화는 약사전 후불도만 제외하고 모두 이때 조성된 것이다. 현재 견성암에는 대웅전·약사전·산령각 등이 현존하고 있는데, 대웅전과 약사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불전佛殿이며, 산령각은 1955년에 새로 신축한 건물이다. 견성암 불사에는 신정왕후神貞王后 48) 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중수의 지원은 물론 수렴청정垂簾聽政할 때에 대대적 수리를 지시한다.49) 산령각의〈석가삼존16나한도〉는 화기畵記에 영산탱靈山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왕대비의 조카인 혜인공 영화惠人公寧夏 50) 부부, 그의 아들 동윤東潤, 그리고 소하공 성하小荷公成夏 51) 의 아들 동면東冕 52) 등이 참여한다. 견성암 불화는 대부분 1882년에 조성되는데, 시주자로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慶嬪金氏 53) 와 함께 상궁들도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4) 이때 화주를 맡은 승려는 풍양조문의 후손인 봉선 선린鳳城瑞獜이며, 불화 불사는 기허 탄학騎虛坦鶴 문중의 남양주 흥국사 출신 화승들이 주도하여 이루어진다.
약사전藥師殿에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이곳은 시중공이 은거하며 수도하다가 약사여래를 친견하였다는 창건 설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견성암의 주요 법회는 약사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조묘 세일제에 원근에 있는 종인들이 숙식을 했던 곳도 약사전이었다. 이곳「석조약사불상」은 호분이 전체적으로 칠해져 백불白佛처럼 보인다. 파손되었던 무릎 부분은 보수하였으며,「견성암중수각부탱신화성기見聖菴重修各部幀新畵成記」(1883년)의 기록에 의하면 1882년(고종19)에 개분改粉하였다고 한다. 약사불상의 높이는 56cm이며, 무릎 폭은 39cm으로 재료는 화강암으로 추정된다. 머리카락은 나발螺髮로서 머리와 육계肉髻의 구별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머리 중간에는 반월형의 중앙계주中央髻珠가 있고, 머리 정상에는 원통형의 정상頂上 계주髻珠 55) 가 있는 전형적인 고려말 조선초의 불상이다.56)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크며 귓불도 도톰하다. 두 눈은 눈꼬리가 올라가지 않은 수평이며, 양 미간眉間 즉 눈썹의 사이에는 백호白毫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코는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미소 띤 입은 작은 편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57) 을 짓고 있으며, 배 앞에 둔 왼손으로는 뚜껑이 있는 합형盒形으로 큼직한 약기藥器를 들고 있는데 통일신라 때 유행한 도상圖像 58) 을 계승하고 있다. 59)
석조약사불상 |
약사전(대방)에는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약사불상을 중심으로, 불화佛畫〈약사여래회도藥師如來會圖60)〉(1900년)는 4명의 상궁으로부터 시주를 받아 범화 윤익梵華潤益 등 5명의 화승이 그려 봉안한 것이다. 또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61)〉(1882년)는 혜고 봉간慧杲奉侃이 중심이 되어 비구승이 조성한 불화이며, 〈치성광여래강림도熾盛光如來降臨圖 62) 〉(1882년)는 밤하늘의 북극성을 여래화如來化한 부처님으로, 봉간과 금호 약효錦湖若孝, 수일守一이 함께 조성한 불화이다. 63)
대웅전大雄殿에는「목조석가·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에 유행한 석가불·약사불·아미타불로 구성된「석가여래삼불상」으로 모셔졌다. 좌존인「약사불상」은 새로 조성된 것이며, 18세기 조성 당시의 것으로는「목조석가불상」과 「목조아미타불상」이 남아 있다.「목조석가·아미타불상」은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년도와 조각승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18세기에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조각승 상정尙淨이 18세기 중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각승 상정은 18세기 후반 활동한 진열進悅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다.64)
대웅전 <아미타불회도>의 화기에는 불상을 개금·중수한 기록은 없지만 「견성암중수각부탱신화성기⾒聖菴重修各部幀新畵成記」(1883년)에는 1882년에 불상을 개금改金 하고 불화佛畫를 조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65) 〈신중도神衆圖〉 66) ·〈현왕도現王圖〉 67) 등이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세 점의 불화는 후손인 봉성 서린鳳城瑞麟이 화주化主로서 주도하며, 불화 모두가 혜고 봉간慧杲奉侃을 중심으로 동일 화승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68) 산령각山靈閣은 시중공 휘 맹을 기리는 전각으로 일반적으로 산신각山神閣이라 부르는데 견성암은 특이하게 산령각이라 한다. 이는 시중공을 모신 원찰願刹인 관계로 풍양조문에서 혼령魂靈 또는 영혼靈魂을 강조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본다. 산령각 안에는 중심 불단에「산신상」을 비롯하여 최근에 조성된〈산신도山神圖〉69) (1935년), 좌측에〈석가삼존십육나한도釋迦三尊十六羅漢圖〉 70) (1882년), 우측에〈독성도獨聖圖〉 71) (1882년)가 봉안되어 있다. 〈석가삼존십육나한도〉의 화승은 혜고 봉간이며, 시주자는 신정왕후의 조카인 혜인공 영하惠人公寧夏로 석가삼존과 십육나한에 사자가 포함된 매우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는 불화이며, 〈독성도〉의 수화승率畵僧은 혜고 봉간이며, 마곡사 화승 금호 약효가 동참하고 있으며, 시주자는 상궁尙宮 임인생壬寅生 신씨申氏로 부모와 형제 등의 안녕을 위해 시주 발원發願하였으며, 특징은 수행하는 노승을 형상화한 듯 사실적인 화법이 돋보인다. 〈산신도山神圖〉는 불화의 제작자인 금어金魚 곽운 경천郭雲敬天 작품으로 여신도 무진생戊辰生 이씨 광명공李氏光明空이 대시주가 되어 조성하였다. 이 산신도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시중공 휘 맹을 상징화하여 모신 의미가 깊은 불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화풍의 특징은 풍채가 당당한 산신의 모습은 물론 산신 옆 사실적인 화분의 모습은 이전의 향로나 화병을 대체한 변화된 20세기 산신도山神圖의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72)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정황적 흔적으로 유추를 할 뿐이다. 수양굴, 독정, 지금은 전란으로 사라진 천년노송, 약사전 창건 설화 등이 대표적인 자취이다. 현재 약사전藥師殿에 있는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석조약사불상石彫藥師佛像」이 그 또한 방증이다. 화담 경화華潭敬和(1786 ~ 1848)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인 보월 혜소는 풍양조씨의 후손으로 1860년(철종 11)에 견성암을 대대적 중창을 한다. 또한 후손인 봉성 서린은 1882년(고종 19)에 견성암의 불화를 일괄 조성하는 데 힘썼다. 오늘날까지 견성암의 불화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더욱이 효명세자73) (1809~1830)의 비妃이자 헌종(1827~1849)74) 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 일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현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1832~1907)도 왕실의 후궁들과 함께 견성암 불화 조성에 참여했다.
Ⅴ. 「見聖菴」과 「見性菴」의 이론異論: 불교적 관점에서 본 시중공 이야기
성인聖人을 친견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견성암見聖巖은 왕건이 시중공을 찾아와 처음으로 마주친 곳, 즉 지금의 견성암見聖菴 뒤쪽에 있는 조그만 천연동굴을 지칭한다. 일명 수양굴修養窟 또는 바위굴巖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 앞쪽에 시중공을 추모하는 원찰願刹을 짓고 견성암見聖菴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의 견성見性은 깊고 심오한 뜻이 내재內在되어 있다. 견성은 선종禪宗의 핵심사상 중 하나인, 자신의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나온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교佛敎라 하는데,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선禪이라 한다.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이 모두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방법인 것이다. 보통 선의 특징을 말할 때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를 세우지 않고 깨달음은 문자나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닌,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을 하듯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교리를 연마하거나 수행이라는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르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 마음의 본질인 성품을 본다고 하여 견성이라 한다. 이상 네 개의 사자성어들은 곧장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뜻으로 선종의 종지宗旨를 간결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말이다. 선禪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祖師를 거치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 전해져 내려온다. 불교의 목적은 마음의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한다. 언어나 글을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는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여주자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한 선지禪旨의 시작이다. 이 선지는 중국의 초조初祖 보리달마를 거쳐 남종선의 시조인 육조혜능六祖惠能 조계대사曹溪大師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남종선은 당나라 때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 전수된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780년 도의국사道義國師가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물려받고 남종선을 들여오는데, 이로부터 ‘도의국사→염거화상廉巨和尙→보조선사普照禪師’로 계보가 이어진다. 보조선사 체징體澄은 837년 당나라에 가서 수도한 후 849년 귀국하여 마침내 도의국사를 종조宗祖로 모시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開山한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 선종의 맥을 잇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은 가지산 선문禪門의 초조인 도의국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75)
선禪이란 누구에게는 있고 없는, 어느 때는 있고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 바로 그것을 보는 것이 선이다. 그러면서 선은 허공을 나는 새가 그 자취를 남기지 않듯이 어떤 흔적도 남기질 않는다. 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로 섬돌을 쓸지만,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月輪穿沼水無痕/ 달빛이 우물 바닥까지 꿰뚫지만, 물속에는 아무 흔적도 없네 이 게송偈頌은 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를 짤막한 율문으로 나타내는 선적인 사유思惟를 담고 있다. 이 글은 송나라 때 야보冶父 선사가 쓴 게송으로, 조작적·인위적 마음이 철저히 배제된 무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거기에는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고, 꾸밈없는 마음 깨끗한 마음에는 이렇듯 흔적이 없다는 선승禪僧의 깨달음이다. 선에는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라고 한다. 아니 누구나 다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이는 곧 선으로 들어가는 참선參禪이다. 즉 선 수행 참선의 진정한 가치는 진정한 나의 모습 나를 찾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융성기를 맞는 선종禪宗은 중앙귀족은 물론 지방의 토착세력인 호족豪族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풍양현의 호족장인 시중공 역시 선법禪法에 심취되어 앞의 노장사상과 함께 견성암을 수행도량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혜능惠能이 그랬듯이‘승려가 되지 않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꿈을 갖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76)
견성암見聖菴은 시중공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위한 수행도량이었다. 그렇다면 왜‘見性’이 아닌‘見聖’을 암자의 명으로 선택했을까 이다. 성인聖人을 친견한 곳이라는 유교적 관점의 어휘인 견성암見聖菴 보다는 자기의 본래의 천성天性을 깨달았다는 불교적 관점의 어휘인 견성암見性菴이 더 어울리는 암자 명이 아닐까 반문하고 싶다. 불교적 관점의 어휘인 견성見性이 깊고 심오한 뜻이 내재內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의 어휘인‘見聖菴’이라 하는 이면에는 시중공에 대한 자료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로 제한되어 있다는 측면, 그리고 유교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과도 무관하진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본디‘見性’이었는데‘見聖’으로 뒤바뀐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견성암의‘見’자는‘볼 견’이 아닌‘뵈올 현’으로 음독하여‘현성암’이라 읽는 것이 옳다는 목소리도 있다.
마지막으로 견성암의 건립 시기이다. 이곳은 시중공 휘 맹의 수행도량인 수양굴修養窟과 아무리 가물어도 약수가 솟구치는 독정獨井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시중공의 흔적을 면면이 엿볼 수 있는 우리 풍양조문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다. 여느 사찰에서는 산신을 모신 전각인 관계로 산신각山神閣이라 하지만, 견성암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곳을 산령각山靈閣이라 하고, 시중공의 혼령魂靈을 모신 사당祠堂이라 칭한다. 사후 시중공께서 천마산에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산신도山神圖는 곧 시중공의 좌상坐像인 초상화肖像畵이다. 풍양조씨 화수회花樹會에서는 1975년도에 산신도를 기반으로 한 시중공 청동靑銅 조각상을 제작하여 수양굴修養窟 즉 견성암見聖巖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시중공이 도를 닦았던 그 시대에 견성암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덩그러니 수양굴과 독정만이 있었을까? 미루어 가늠해보건대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불교에서 깨달음 견성성불을 위해서는 동구불출洞口不出 즉 절 밖을 나가지도 않고 토굴에서 수행하며, 장자불와長坐不臥 눕지도 않고 좌선을 한다지만 시중공께서는 선사禪師가 아닌 이상 좁은 수양굴에서만 기거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한 믿음에는 시중공께서 수양굴에 은거하며 수도하다가 약사여래를 친견하였다는 약사전藥師殿 창건 설화에서 엿볼 수 있다. 규모는 가늠할 수 없지만, 이는 수양굴과 함께 별도의 암자가 있었다는 방증이다. 좀 더 규모를 갖춘 사찰은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해본다. 시중공이 서거하며 추선공양追善供養 및 분묘관리를 위해 후손과 토호土豪 추종세력들에 의해 원당願堂 또는 분암墳菴으로 유허지遺墟趾에 사찰의 면모를 갖춘 절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견성암 문화재등록을 위한 조사보고서에서 견성암 약사전의「석조약사여래좌상」은 고려말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의한다면 약사전은 고려말 이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때 약사여래상을 시대적 조류에 따라 새롭게 조성한 것으로 추측해본다. 석굴과 결합한 약사신앙은 그 기원이 원효이지만‘석굴+약사여래’의 사례에 보이는 약사여래상은 고려시대 작품이 대부분이라고 한다.77)
그렇다면「석조약사여래좌상」 누가 주도적으로 조성했을까? 그 시대에 풍양조문의 대표적 인물로, 전직공殿直公 지린之藺의 5대손 헌부산랑공 숙령憲府散郞公叔鴒의 후손인 고려말 대선사大禪師 보각국사普覺國師인 환암 혼수幻菴混脩는 조계종 선종禪宗의 가르침 계보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환암은 아직도 조계종 법통法統의 문제로 학계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환암선사의 속성이 풍양조씨라는 것 외에 시중공과의 그럴만한 관계성은 찾을 수가 없다.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 석간공 운흘石磵公云仡은 환암선사의친조카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불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분이다. 조선왕조실록에“자은승 종림慈恩僧宗林과 더불어 교제하여,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의 양 사원을 중창重創하여78)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석간공은 유교적 가치관인 시속時俗의 비루함이 없는 유아독존적인 삶을 살며 출타 중에는 반드시 소를 탔던 진정한 풍류객風流客이었다. 병이 들자, 스스로 묘지명을 짓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앉은 채로 죽었다. 그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이러하다.79)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 이인복興安君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도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죽으니, 후손이 없다. 해와 달을 상여喪輿의 옥구슬을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전奠80) 으로 삼아, 양주 고을의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 81) 에 장사지낸다. 82)
孔子杏壇 83) 上/ 공자는 행단 위에 계시었고
釋迦雙樹 84) 下/ 석가는 쌍수 아래 계시었네
古今聖賢/ 고금 성현들과 현인들께서
豈有獨存者/ 그 어찌 독존한 분 있었으리오
咄咄人生事畢/ 아아! 인생사가 끝이로구나
석간공 운흘은 제자들을 둘 수조차 없고 자식도 없는 고독한 처지임을 서글퍼했다. 그러나 깨달음 경지에 이른 선승과 같이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자세로 종명終命한다. 석간공의 유택은 양주 고을의 아차산峨嵯山 오늘날 워커힐 부근으로 추정되며, 젊어서는 상주의 노음산露陰山 아래에 살았고, 말년을 보냈던 곳은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현 송파구 몽촌을 일컫는다. 석간공이 거처했던 곳은 견성암은 물론 시중공 묘와도 지금의 거리감으로는 매우 지척의 거리이다. 자찬묘지명에서는 부정확한 기록이긴 하지만,“조맹趙孟의 30대손이다”라고까지 석간공은 언급했다. 그런 분께서 시조의 산소 위치를 몰랐을까? 묘지명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석간공은 불교적 가치관과 유교적인 문화·윤리의식을 동시에 가졌던 분이다. 그런 면에서도 석간공을 비롯한 주변 분들이 시중공의 원찰인 견성암을 비롯한 시조의 분묘가 있는 곳을 몰랐을 리 없고, 또한 방치 또는 등한시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세보世譜를 보아도 고려말까지 대부분의 풍양조문의 후손들은 풍양현을 중심으로 근거리에 분포되어 세거世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근교에 세거했던 후손들 또한 그러했을것이다. 이 지역 평범한 백성들조차도 시중공을 천마산 산신령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사찰 경내에 있는 독정獨井이라는 샘터가 아랫마을 동네명으로 아직도 전해지는 것을 보면 시중공은 이 고장의 기복신앙에 있어 상징적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견성암을‘독정이 절’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최근「견성암 조사보고서」에서는 시중공 휘 맹이 친견한 약사 신앙을 중생의 구원자라는 이미지 부각을 위한 정치적 의도라 해석하고 있다. 이는 종교의 힘을 이용한 토착 호족들이 중앙귀족과 대비되게 지방을 지배하려는 세력화 수단으로 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견성암도 시중공의 분묘도 오늘날까지 면면히 수호되어 내려왔건만 풍양조문의 세계世系는 왜 실전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독정리라는 지명은 송능리로 통합이 되며 사라지고 버스정류장 호칭으로 흔적만 남아 있다.
Ⅵ. 맺는말
견성암見聖菴은 풍양조씨豐壤趙門가 출자出自한 곳이며, 시중공 휘 맹의 수행도량이기도 한, 그리고 왕건과 만남의 신화가 깃들어 있는 유적지遺蹟趾이다. 풍양조문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누구라도 찾아야 할 성지聖地같은 곳이다. 아직도 견성암에는 사찰과 관련된 고적古蹟은 물론 비조鼻祖의 설화에 스며 깃든 유적遺跡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을 우리는 풍양조문의 원찰願刹 또는 분암墳菴이라 칭한다. 분암은 불교적 구조를 지닌 암자菴子이면서 동시에 조상의 묘역을 수호하는 유교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그런 면에서 견성암은 시중공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願堂으로 분묘墳墓와 함께 후손들에 의해 수호되어 오고 있다.
1634년(인조 12)에 계곡谿谷 장유張維선생85) 이 찬한 비명에서 시중공의 공적, 위계 그리고 관직명을 고려국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상주국上柱國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춘추 70세에 왕건이 몸소 찾아와 정승으로 삼고, 영해전투에 함께 참전하였다 하는데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다. 당시 연세로서 장군이 되기에는 너무 고령이기 때문이다. 창강공 속은“바위는 덩치는 크지만 실은 겁쟁이입니다.86) 라고까지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겁쟁이를 왜 찾았을까? 그러나 이는『열전列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술 형식이다. 위인偉人은 때에 따라서 어리석기도 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전통이 있다. 태조 왕건이 시중공을 찾은 이유는 겁쟁이 바보가 아니라 호족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세력을 가진 풍양현의 호족장이 아니고서야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시중공을 찾은 것은 신라 말기 호족 세력이 난립하던 난세 평정을 위한 고려 태조의 용인술인 것이다. 시중공이 호족장이라 추측할수 있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시중공께서“수양굴에 은거하며, 도를 닦다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하였다.”라든가, 신라말부터 유행하던 풍수지리설과도 일맥상통하게 묏자리가 천작天作으로 이루어진 대단한 길지라든가, 시중공께서는 이 고장의 기복 신앙에 있어 상징적 존재였다는 등이다. 특히 풍양조문에서 수호하고 있는 원찰인 견성암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견성암 약사전藥師殿의 「석조약사불상」은 풍양조문의 시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시중공께서 약사여래를 친견하였다는 창건 설화와도 밀접하다. 그래서 「석조약사불상」은 견성암의 주불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통일신라 때 유행한 항마촉지인87) 을 한 약기인의 도상圖像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적 특징을 고찰하여 보건대, 석조약사불상의 제작 시기는 고려말 조선초로 추정하고 있으며, 견성암의 창건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불상이다.
한편 견성암의 가장 높은 곳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시중공의 혼령魂靈을 모신 사당祠堂적인 의미가 있다. 1975년도에 풍양조씨 화수회에서는 산령각의 산신도를 기반으로 시중공 청동靑銅 조각상을 제작하여 수양굴修養窟에 봉안하였다. 영겁永劫을 바라보는 불도佛道의 입장에서 천년의 역사는 예사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길다면 긴 천년의 역사를 지닌 견성암은 풍양조문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은 물론 가문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북돋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씨족의 참된 정체성의 확립이야말로 명문가名門家로 발돋움을 위한 도약과 웅비의 기틀이다. 견성암見聖菴은 우리 모두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풍양조문의 문화유산이다. 우리 비조鼻祖의 발현지發顯趾이기도 하다. 우리 발길이 끊기지도 않고, 끊겨서도 안 되는 풍양조문豐壤趙門의 영원한 메카이다.
<註> |
* 두원공과대학교 전총장, 풍양조씨연수원장
1) 제삿날의 제수 비용에 쓸 목적으로 마련을 위한 기금 형성 기구로서 보寶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특수 명목의 기금을 형성하여 여기서 나오는 이자로 사업을 펼쳐나간 재단을 의미한다.
2) 한기문, 고려시대 사원의 운영기반과 원당의 존재 양태,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994.
3) 이해준, “신숭겸申崇謙의 원찰願刹과 조선시대 분암墳菴”, 인문과학연구, 2014. 안홍중의 「추원사기追遠寺記」는 1654년에 쓰여 진 것으로 황경원(1709∼1787)의 강한집江漢集, 「파주영신선원기坡州靈神禪院記」에 인용된 글이다. 守護宅兆 禁止樵火 宜莫如置刹而募僧 故國俗 壯節公申崇謙 創開其制 名公瑩域 無處無刹
4) 이해준, “광산김씨光山金氏 분암墳菴 ‘영사암永思菴’ 자료의 성격”, 고문서연구, 제25호, 2004
5) 본방릉本房陵이란 부원군의 묘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세 부원군을 일컫는다.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은 세조의 장인 윤번尹璠(1384~1448)이고,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은 중종의 장인으로 중종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부친 윤여필尹汝弼(1466~1555)이며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버지인 윤지임尹之任(1475~1534)이다.
6) 이연숙, “조선후기 양반가의 문중교육”, 역사와 담론 제 52집, 2009
7) 윤순거의 의창제는 문중의 선산과 재실의 운영, 묘사를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의전義田을 마련하고, 그 재원으로 이들 관리는 물론 재해 또는 긴급 환난, 관혼상제 등에 서로 돕자고 만든 제도이다. 의전은 오방파五房派의 각 집에서 각출한 논 7마지기 토지로 형성되었
8) 권효숙, “조선시대 분암연구 – 파주지역 분암墳菴 중심으로-”, 한성대 석사학위논문, 2010
9) 파회破回는 바우 또는 바위의 이두吏讀식 표현으로 삼국시대이후부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 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破’는 바위와 발음이 비슷하여‘바위’가 되고,‘回’는 ‘돌다’는 뜻이므로 음이 아니라 뜻으로 읽으면 ‘돌’이 된다. 그래서 ‘破回’는 ‘바윗돌’ 혹은 ‘바웃돌’이 된다. 이를 축약하여‘바우’ 혹은 ‘바위’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0) 「강생시사적降生時事蹟」,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1981 시보 수익時保守翼(1565–1602)은 1591년(선조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 홍문관부수찬·부교리, 임천군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 통정대부에 증직,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조용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생활이 청빈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1) 우복 정경세愚伏鄭經世(1563–1633)은 이조판서, 대제학, 조선 중기 성리학자, 유성룡의 문인으로 예론禮論에 뛰어나다. 저서로는『우복집愚伏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2) 「제우시사적際遇時事蹟」, 풍양조씨세록豐壤趙氏世錄, 1981 화천 즙花川濈(1568–1631)은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부수찬·전적·장령·동부승지 및 1617년 영해부사가 되고, 인조가 등극한 해에는 사은사 겸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뛰어났다.
13) 《見》자는‘보다’라는 뜻을 가질 때는 《견》이라 읽지만‘뵙다’,‘만나다’뜻일 때는《현》이라 읽는다. 따라서《見聖巖》은‘석굴에서 성인을 만나다’라고 해석하여《현성암》이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14) 동강 상우東岡相愚(1640–1718)은 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우의정과·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15) 조씨趙氏 바위라는 뜻이니 시조와 관련한 견성암見聖菴 뒤에 있는 천연동굴에 붙여진 이름이다.
16) 부암傅巖은 부험傅險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은殷나라 재상 부열傅說이 일찍이 숨어서 살았다는 땅 이름. 은나라 고종高宗이 꿈에 성인을 만났는데 이름을 열說이라 했다. 백관百官을 시켜 들에 가서 그러한 사람을 찾게 하여 부암에서 부열을 얻었다. 당시 이곳 죄인들은 망가진 도로를 개축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부열은 죄인이 아니면서도 이 일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고종은 부열을 인견引見하곤 함께 시국에 대하여 논論하니 과연 성인聖人이었다. 고종이 재상으로 삼아 정사를 맡기니 나라가 크게 잘 다스려졌다. 이에 고종은 그에게 부傅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17) 「見聖巖」自始祖墓 東北踰一崗菫五里 有趙巖(方言破回) 巖中嵌而面陽勢高而眺遠 有僧立寺護之 俗傳公隱居養德有盛 麗祖物色求之 得於此巖 故後人以初名名之 若傳巖焉 恐時世變遷子孫不知 故幷錄云 巖名亦稱見聖巖 -右議政 東岡公 相愚所記- 豐壤趙氏世錄, 1981
18) 교종敎宗에 반발하여 신라 하대下代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선종禪宗의 9개 종파. 경전이라는 기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호족의 환영을 받았다.
19) 도올 김용옥,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통나무, 2019
20) 창강 속滄江涑(1595-1668)은 인조반정 공신으로 장령·진선을 역임했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며 지조가 높고, 청빈하여 뭇사람의 칭송받았다. 조선조 대표적 화가로서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21) 破回 形貌雖大 實㥘 夫每見官人 行必走草中過 遠然後出 今大王在 此豈肯出來
22)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23) 달마급다, 전자불교학회, “약사경”, 사토리, 2019년
24)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세종편
25) 문명대 “신라하대 불교조각의 연구 I-방어산防禦山 및 실상사實相寺 약사여래거상藥師如來巨像을 중심으로”, 역사학회歷史學會 제73집, 1977; 김은아“통일신라統一新羅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에 대한 연구”, 불교미술사학회 제19집, 2015
26) 송곡 복양松谷復陽(1609–167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헌 ·원자보양관·부제학에 이어 대제학·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송곡집松谷集이 있다.
27) 부인지원負寅之原은 인방寅方을 등지고 있는 언덕 즉 인좌寅坐와 같으며, 신향申向과도 같은 뜻이다.
28) 松谷先生集卷之十 / 陰記 “惟我始祖趙氏 初諱巖 豐壤人 佐高麗太祖建大勳 賜名孟 策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 位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 墓在楊州之豐壤赤城洞負寅之原 裔孫世禁樵牧”
29)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平章事墓碑 陰記 中에서“趙氏在東方者 惟我豐壤爲最舊”
30) [네이버 지식백과] 성씨 [성씨姓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1) 광해가 등극하고 공빈김씨의 묘를 성릉成陵으로 격상하며 시중공 묘소는 평장平葬의 수모를 당한다. 다시 원상 복원은 인조반정으로 공빈의 능호가 혁파되며 가능해졌다.
32) 산이나 물, 땅의 형세를 살펴 도읍, 주거지, 묘지 등을 정하는 일종의 지리학으로서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하는 설이다.
33) 속성 김金. 호 옥용자玉龍子. 전남 영암 출생(827~898)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로 혜철惠徹에게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다. 그의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조선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도선비기道詵秘記》등이 있다.
34)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11_0050_0030 국사편찬위원회,“신학국사”
35)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2021) Ⅰ. 남양주 견성암의 역사와 문화, 주수완
36) 중부일보「정경연의 풍수기행」용 꿈틀대는 형상…남양주 풍양조씨 시조 조맹 묘, 2017.09.06
37) 현명顯命, 상형尙絅등“세일제정식시종회통문歲一祭定式時宗會通文, 시조산소세일제절목始祖山所歲一祭節目, 1738년(영조14)”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1981
38) 포저 익浦渚翼(1679-1655)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헌·예조·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시호는 문효文孝, 『포저집浦渚集』, 『포저유서浦渚遺書』 등 저서가 있고, 명고서원, 숭양서원 등에 제향되다.
39) 상우相愚 “성소록서省掃錄序, 1715(숙종41)” 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1981
40) 쌍동은 현 서울의 옥수동 일대를 일컬으며, 당시 학당댁을 지칭한 것이며 이에 기인하여 학당공 상경의 후손들을 쌍동파라 한다.
41) 청계천의 지류인 묵사동천墨寺洞川 아래쪽 을지로5가 다리의 명이며, 다리 건넛마을에 살았던 희보希輔의 후손들을 청교파라 칭한다.
42) 포저 익浦渚翼의 후손들을 일컬어 포저파라 하는데 더 크게는 평장사공파를 의미한다.
43) 귀록 현명歸鹿顯命(1690-1752)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죄의정·영의정, 시호는 충효忠孝이며, 귀록집歸鹿集이 있다.
44) 학당 상경鶴塘尙絅(1681-1746)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헌·경기관찰사·이조참판·형조·공조·이조판서·우참찬,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45) 현명顯命, 상경尙絅 등,“시조산소세일제절목始祖山所歲一祭節目”, 1738년(영조15), 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33p, 1981
46) 영호 엄永湖曮(1719-1777), 175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763년 통신정사로서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옴. 대사간·대사헌·부제학·공조·이조판서 역임, 시호는 文翼이다.
47) 재득載得, 엄曮 등,“추절목追節目”, 1760년(영조36), 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34p, 1981
48) 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 조선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왕비이자 헌종憲宗의 어머니이며, 조대비로 더 알려져 있다. 본관은 풍양이며,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석애공石厓公 만영萬永의 딸이다.
49) 대연大衍 화수회장花樹會長 “산령각중건기山靈閣重建記”, 성중誠中 “견성암중수기見聖菴重修記”, 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1981
50) 혜인 영하惠人寧夏(1845~1884) 186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대사성·부제학·병조·예조·이조판서 등을 역임, 시호는 충문忠文인다. 갑신정변 때 피살당했다.
51) 소하 성하小荷成夏(1845-1881), 1861년(철종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공조·예조·이조판서, 판의금부사가 되고,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52) 동면東冕(1867~ ?) 18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공조·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의 우참찬·좌참찬·찬성 홍문관 학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53) 경빈김씨慶嬪金氏(1831-1907), 헌종이 자식이 없자 후사를 위해 간택 빈으로 책봉되었지만, 슬하에는 자식이 없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김재청金在淸의 딸이다.
54) 유근자“풍양조씨 분암과 남양주 견성암의 불상”『한국불교학』제100집, (사)한국불교학회 2021
55) 부처의 상투 가운데 있는 보배 구슬로 머리와 육계肉髻 사이에 구슬 모양으로 표현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전륜성왕을 부처에 비유하고 구슬을 대승의 가르침에 비유함에 의거하여 대체로 통일신라 하대 이후의 불상과 불화에서 불두佛頭에 표현되었다.
56)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 “견성암 남양주 견성암조사보고서”, 2021
57) 좌선할 때의 손 모양에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58) 회화繪畫ㆍ조각ㆍ공예품 따위에 나타낸 인물이나, 그 밖의 형상(形象ㆍ形像)
59) 풍양조씨대종회(2021) Ⅱ. 남양주 견성암의 불교조각, 3. 견성암 약사전의 석조약사여래좌상, 유근자
60) 약사여래 삼존과 6위의 제자, 사천왕을 그린 간단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61) 이 불화는 지장보살과 지옥 명부의 10대 대왕과 권속들을 도해한 지장시왕도이다.
62) 치성광여래도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의 성수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이다.
63)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2021) Ⅳ. 남양주 견성암의 약사전 불화, 정진희
64) 풍양조씨대종회(2021) Ⅱ. 남양주 견성암의 불교조각, 2. 견성암 대웅전의 목조석가·아미타여래좌상, 유근자
65)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淨土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가리키는 신앙대상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다. 원효는“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를 천명하였다. 아미타불회도는 대웅전의 상단탱으로 봉안된 불화이다.
66) 신중도神衆圖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한 호법신중護法神衆을 표현한 불교화이다. 중앙에 불법을 수호하는 위태천이 있고, 상단에 좌우에 제석천과 법천을 배치하고 옆에 산신과 조왕신이 있다. 하단에는 6명의 무장신武將神이 있다.
67) 조선시대 의식집에 근거한 불화의 한 장르로, 사람이 죽은 후 3일 만에 망자를 심판하는 현왕과 그의 권속을 그린 현왕도現王圖는 명부冥府의 회주會主인 보현왕여래普現王如來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권속이 배치된다.
68)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2021) Ⅳ. 남양주 견성암의 대웅전 불화, 유경희
69) 산의 신령인 산신을 그린 불화로, 민간신앙의 대상이던 산신이 불교에 편입되면서 제작되었다.
70) 화면 상단에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의 석가삼존釋迦三尊을 배치하고 하단에 석가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인 십육나한十六羅漢을 한 폭에 조성한 불화이다.
71) 독성은 남인도의 천태산에 거주하며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열심히 정진하는 나한 중의 한 분으로서 나반존자那畔尊者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 한다.
72)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2021) Ⅴ. 남양주 견성암의 산령각 불화, 김경미
73) 제23대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1809년(순조 9)에 태어나 10세에 신정왕후와 결혼하지만 1830년 21살에 죽는다. 그는 뛰어난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그 재능과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다. 그에 반에 신정왕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며 고종의 왕위승계를 돕는다.
74)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되어 1834년 순조가 죽자 이 해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며, 대왕대비 순원왕후 순조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헌종 3) 새로이 등장한 풍양조씨 세력은 순조 이후 정권을 전횡한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고 한동안 정권을 주도하지만, 1846년 충경공 만영萬永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 수중으로 넘어간다.
75)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간화선 수행, 조계학술총서-01”, 조계종출판사, 2020
76) 다카히라 나루미, 신은진역 “소환사”,들녘, 2000년
77) 풍양조씨대종회豐壤趙氏大宗會(2021) Ⅰ. 남양주 견성암의 역사와 문화, 주수완
78) 분당구 판교에 판교원과 강남구 신사동 사평원은 고려 말에 석간공 운흘이 은퇴하며 자은승과 더불어 세운 절이다. 원院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편의 시설이지만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을 구호하기 위한 기관이기도 하다.
79)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8권
80) 장례 전 영좌靈座 앞에 간단한 술과 과일을 차려 놓는 예식
81) 마하(摩訶:Maha)는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는 大·多·勝의 삼의三義이고, 야(耶:ya)는 불타佛陀 제자의 일문一門을 말함 곧 불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들이 있는 곳
82) 資憲政堂文學趙云仡豐壤縣人高麗王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 恭愍王代興安君李仁復門下 登科歷仕中外佩印五州觀風四道 雖大無聲跡亦無塵陋 年七十三病終廣州 古垣城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而葬于古楊州峨嵯山南摩訶耶 孔子杏壇上 釋迦雙樹下 古今聖賢 豈有獨存者! 咄咄人生事畢
83) 옛날 공자가 사수泗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유지遺趾. 공자는 행단 위에서 강講하였다 함
84) 사라 쌍수沙羅雙樹 : 석가모니가 인도의 구시나갈라성拘尸那揭羅城 밖 발제하跋堤河가에 있는 사라수(沙羅樹:Sala)의 수풀 속에서 입적入寂할 때, 그 주위 사방에 각각 한 쌍씩 서 있었던 사라수沙羅樹.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개의 줄기가 나와서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함
85) 계곡 장유谿谷張維(1587–1638)은 예조·이조판서, 대제학, 효종비 인선왕후의 아버지 신풍부원군,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 저서로는『계곡집』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86) “破回形貌雖大實㤼夫”, 後孫掌令涑所記 中에서, 풍양조씨세록1豐壤趙氏世錄一, 13p, 1981
87) 불교에서 석존5인(釋尊五印) 중 하나이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이라고도 한다.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을 갖춘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