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암중수기

견성암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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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조문의 원찰

 견성암 중수기

 산령각 중건기

 

ma01.png 견성암중수기見聖菴重修記

우리의 시조 시중공侍中公께서는 초기에는 풍양壤 독산獨山(독장산獨將山 또는 독정산獨井山이라고도 함)의 암석巖石 밑에서 강생降生하셨고 이 바위굴에서 고려 태조와 만났으므로 이 바위을 견성암見聖巖이라 칭한다.

 

공公의 위훈偉勳과 성덕聖德은 또한 만세萬世 후에도 넉넉히 물려줄 만한 것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후에는 바위 밑에 암자菴子를 지어 공경하고 받드는 곳이 되었으니, 승려僧侶로 하여금 공양供養을 다 하도록 하였다. 옛날에 주자朱子께서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승도僧徒에게 수호토록 하였는데 그것은 정사精舍이고, 이것은 묘제墓齊인지라 그 일은 다르지만, 승려로 하여금 청결하게 지킨 것은 다를 바 없다.다만 창건은 어느 해에 하였고,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중수를 어떻게 하였는지 문헌이 전무全無하니 상고할 길이 없다. 우리 시대에 이루어 어떻게 해야만 진실로 후손들의 한을 풀 수 있겠는가!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대에 와서 국모國母의 명령으로 다시 중수하였다. 어진 국모께서 조상을 생각하는 정성이 심상치 않을 만큼 대단하셨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전각殿閣들이 세월이 오래되고 거듭 다 함에 기와와 주춧돌이 기울고 건물도 퇴락頹落하였다. 위에서는 비가 새고 옆에서는 바람이 들어옴에 튼튼하던 용마루도 흔들려 새롭게 바꿔야 할 형편이었다.

 

오랜 시일을 두고 계획하고,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노심초사하였다. 성의가 있고 물량도 있다면, 어찌 일이 거창하고 힘에 부친다고 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며 덮겠는가. 이에 새로이 계획하고 옛것을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다짐을 했다.정유년 가을에 경구經九(참판?判)씨가 봉구鳳九·대연大衍 등 제족諸族과 더불어 선대 유지를 받들기로 흔쾌히 다짐했다. 이처럼 중수重修가 각자의 책무라며 종친들과 협의를 하니 종친들이 힘을 합하겠다고 승낙했다. 시귀蓍龜1) 에 모두를 보태보니 시귀도 따라주었다. 이에 여러 공인工人들이 지혜를 모으고, 백성들의 노동력과 합하였다. 주춧돌과 기둥이 다하고 기운 것은 개축하여 견고히 하고, 난간이나 서까래가 듬성듬성하고 무너진 것은 교체는 물론 갈고 닦아 꼼꼼하게 손을 봤다. 그곳은 매우 멋있고, 주춧돌은 매우 단단하고, 목재는 매우 견고하며, 평평하여 탁 트인듯하고, 막힌듯하며 아늑한 듯하다. 위와 아래 높낮이와 넓고 좁음. 그리고 모난 것과 둥근 것, 굽음과 곧음 등 모두 규정(설계기준)을 따랐으므로 형상(건물)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본래의 건물이 그러했기에 제사祭祀를 준비하는 곳이나 주방 등이 상호 조화롭게 배열되어 어지럽지 않았다. 몇 달이 안 되어 벌써 준공한다고 하니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덕德을 축적하고 역량을 쌓아 때가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나 “후인後人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또한 그렇다 하겠다.이 공사를 마치고 나서 여러 종인宗人 분들께서 성중誠中으로 하여금 이 일을 기록하라 한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건대, 몸은 늙어 희미하고 아는 바가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일을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선조의 자취와 관련된 일이니 여러 번 사양하다가 피할 길 없어 이내 짓기로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다. 우리 종친宗親은 모두 화목하고 문호門戶 또한 번창하였다. 백세百世 후에도 상재桑梓2)  즉 선조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고향을 공경하니 운잉(雲仍; 먼 후손)들은 참으로 감회가 새롭고 돈독해졌다. 한 자리의 삼추杉楸3) 즉 분묘墳墓를 수호하기 위하여 분암墳菴을 옛날의 모습 그대로 수리하였다. 어찌 감히 암자菴子을 짓고 나니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마는 4) 마음속으로 생각하건대, 참으로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도다. 감히 옛 분들이 하신 공로功勞보다 뛰어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상을 위한 일(위선사爲先事)에 진실로 최선을 다하였다. 산하가 신령스러우니 그 지세地勢는 그윽한 산과 출렁이는 강이다.5)

 

건물이 견고하니 그 골격이 굳고 튼튼하고 세밀하다.6) 만가지 모양의 풍경이 웅장하고 위대偉大하니, 멀게는 서울이 50리밖에 보이고, 원기元氣가 넘치는 영정影幀이 환하게 응하니 편안하고 가까워 영정각影幀閣이 8-9보 거리이다. 서리와 이슬 길을 밟으면서 오르니 숙연히 추모하는 마음에 어렴풋이나마 모습이 보이는듯하다. 만일 치재致齋를 행하는 사람들이 언덕 넘어 분묘墳墓를 바라보며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니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영혼靈魂(시중공)이 오신듯하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유연油然하다.”는 말이 어찌 소씨蘇氏 가家의 세보世譜 7) 에만 해당이 되는가.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깊으니 다시 견씨甄氏의 사정기思亭記8)  와 같은 효성을 보겠다.

 

차후에도 오늘날 일을 볼 때 반드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씨가 건물을 수리했다 할 것이고, 바라건대, 교체가 되지 않은 오래된 것들을 거듭 수리해 간다면 향사享祀는 잘 받들어질 것이다. 8) 와 같은 효성을 보겠다.차후에도 오늘날 일을 볼 때 반드시 모년 모월 모일에 모씨가 건물을 수리했다 할 것이고, 바라건대, 교체가 되지 않은 오래된 것들을 거듭 수리해 간다면 향사享祀는 잘 받들어질 것이다.9) 사시四時를 다만 공경하니 문공文公과 위공魏公의 예禮10) 를 따랐고, 한곳에 모여 천륜天倫을 펼치니 정씨程氏와 위씨韋氏의 종규宗規 11) 를 모방한 것이다.

 

나무꾼들은 분묘(墳墓: 楸?)에서 멀리 물리쳐 꺾지도 벌목도 못 하게 하니 조상의 음덕陰德이 자손을 도와 더한층 치장熾張하고 오래도록 번창하게 할 것이다. 이는 모두 우리 종족이 다 함께 힘써야할 것이니 감히 변변치 못한 사람(추요蒭蕘)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한편으론 새롭게 암자菴子의 중축에 대하여 축하(연하燕賀)의 참마음을 전하며, 한편으로는 만천세萬千世토록 끝없이 이어가기를 축하드리며 이를 견성암見性菴 중수기重修記로 삼는다. 사시四時를 다만 공경하니 문공文公과 위공魏公의 예禮12) 를 따랐고, 한곳에 모여 천륜天倫을 펼치니 정씨程氏와 위씨韋氏의 종규宗規 13) 를 모방한 것이다. 나무꾼들은 분묘(墳墓: 楸嚨)에서 멀리 물리쳐 꺾지도 벌목도 못 하게 하니 조상의 음덕陰德이 자손을 도와 더한층 치장熾張하고 오래도록 번창하게 할 것이다. 이는 모두 우리 종족이 다 함께 힘써야할 것이니 감히 변변치 못한 사람(추요蒭蕘)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한편으론 새롭게 암자菴子의 중축에 대하여 축하(연하燕賀)의 참마음을 전하며, 한편으로는 만천세萬千世토록 끝없이 이어가기를 축하드리며 이를 견성암見性菴 중수기重修記로 삼는다.

1958년 2월 하순

후손後孫 성중誠中 근기謹記

 

 

[원문]

 

見聖菴重修記

惟我始祖侍中公 初降于豐壤獨山巖石下 而遇麗太祖於是巖 故名之曰見聖巖 公之偉勳盛德亦可以垂裕萬世 而公歿後 築菴于巖之下以爲齊供之所 使僧而奉其職 昔朱夫子作寒泉精舍 直僧徒守之 彼是精舍此是墓齊 其事雖異所以使僧而致潔之一也 惟其建之之在某年 又其後數百載似不無重修之擧 而文獻無徵皆不可考矣 後孫之齎恨固何如而逮我 神貞翼皇后之時以國母之命 復加重修 賢國母慕先之誠逈出尋常 而第綠星霜之浸久仍致瓦礎之傾圯 上雨傍風易撓大壯之棟 歲籌月劃胥惕同人于宗 有誠則有物豈云事巨而力綿無始則無終盍 亦新圖而舊革 乃於丁酉之秋 經九與鳳九大衍諸族 仰惟先志慨然 以重修之爲己任 謀于宗族而宗族允合 加諸蓍龜而蓍龜克從 於是合衆工之智課群氓之力 棟基之湫而傾者築之而堅固 欄榱之疎而敗者易之而礱密 厥土孔美 厥礎孔碩 厥材孔良 若曠若夷 若阻若奧 高下廣狹 方圓曲直 各隨其制 無有齟齬其體也 固然矣 典祀之所厨房之屬相次此序井井不紊 不幾月而功告成何其敏也 蓄德積力以俟時至 不能無待於後人 者其亦然矣 役已訖僉從使誠中識其事 自顧藐末蒙蔀 何敢當是役 而事係先蹟累辭不獲乃作而言曰 宗黨咸睦門楣克昌 敬桑梓於百世 雲仍篤如新之懷 護杉楸於一區 墳庵修仍舊之度 豈可曰肯搆肯堂 窃庶幾 苟美苟完 非敢求多於前功 聊以盡誠於先事 嶽瀆揚靈其地則幽幽秩秩 棟欞鞏固其制也實實枚枚 萬像之風景雄偉 遙挹京都五十里 一氣之神彩照應密邇 影閣八九步 履霜露而悽愴僾然如見 所爲齋者望邱壟而興懷 神之來格不可度思 孝悌油然 豈獨蘇家之世譜 感慕深矣 復見甄氏之思亭 後之視今其必曰 某年某月某日某建嗣 而葺舊庶不替 以享以祀以蒸以嘗 四時祇瞻追 文公魏公之禮 一堂倫叙 倣程氏韋氏之䂓 樵斤遠屛於楸嚨 勿翦而勿伐 福履陰隲於雲仍 俾熾而俾壽 此乃吾族之所共勉者 而敢獻蒭蕘之言 一以寓燕賀之忱 一以祝萬千世引無極焉 是爲見聖菴重修記

 

著雍閹茂 橘如節 下澣 後孫 誠中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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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점을 치는 데 쓰이는 거북의 껍질과 시초(蓍草)이다.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함을 말한다.

 2) 선조(先祖)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고향(故鄕) 또는 고향(故鄕)에 계신 연로(年老)한 어버이를 가리키는 말. ≪시경(詩經)≫에서 나온 말로,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서 후손(後孫)들에게 누에치기와 가구(家具) 만들기를 할 수 있도록 준비(準備)해 준다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3) 조상(祖上)의 무덤. 후손(後孫)들이 조상의 무덤가에 삼나무, 가래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4) 肯搆肯堂: 서경의 대고(大誥)에서 나오는 말로서 부자가 이룬 사업을 자손이 계속해 성취한다는 뜻

 5) 嶽瀆揚靈其地則幽幽秩秩: 견성암에서 바라본 산과 강이 신성하고 묘사(描寫)하다는 것. 악독(嶽瀆)은 산과 강이라는 말, 유유(幽幽)는 산이 깊고 고요한 모양, 질질(秩秩)은 강물이 흐르는 모양

 6) 棟欞鞏固其制也實實枚枚: 건물(棟欞)이 견고하였으니 그 골격이 굳고 튼튼하고 세밀하다. 實實은 목재가 견고하다는 뜻, 枚枚은 솜씨가 세밀하다는 표현.

 7) 蘇家之世譜 : 송나라 때 사람인 소순(蘇洵)이 만든 소씨 족보. 그 족보의 서문에 “孝弟之心이 油然히 興起한다.”는 문구가 있다.

 8) 甄氏之思亭 : 중국 송나라 때 서주(徐州)에 사는 견씨(甄氏)가 그 친산(親山) 곁에 지은 재실(齋室) 이름. 송나라 때 학자인 진사도(陳師道)가 사정(思亭)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또 기(記)를 지었다.

 9) 以享以祀以蒸以嘗 : 향사(享祀)하고 증사(蒸祀)하다. 즉 제사를 지낸다는 말. 향(享)과 사(祀)는 제향(祭享) 또는 제사(祭祀)라는 뜻이고 겨울 제사는 증(蒸)이라 하고, 가을 제사는 상(嘗)이라 한다.

10) 文公魏公之禮: 문공과 위공의 예. 문공은 주자(朱子)의 시호(諡號)인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뜻하며, 위공은 송나라의 한기(韓琦)를 말하는 것 같다. 

11) 程氏韋氏之䂓 : 정씨와 위씨의 종규. 정씨는 송나라 때 종법을 강조한 정자가문을 말하며 위씨는 화수고사로 유명한 보대의 위씨 가문을 말한다.

12) 文公魏公之禮: 문공과 위공의 예. 문공은 주자(朱子)의 시호(諡號)인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뜻하며, 위공은 송나라의 한기(韓琦)를 말하는 것 같다.  

13) 程氏韋氏之䂓 : 정씨와 위씨의 종규. 정씨는 송나라 때 종법을 강조한 정자가문을 말하며 위씨는 화수고사로 유명한 보대의 위씨 가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