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육장학회 장학금 모금과 자금관리(1979~2000년)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24-09-12 17:56 조회131회 댓글0건본문
풍육장학회 장학금 모금과 자금관리(1979~2000년)
(1) 막이 오른 장학금 모금운동
상주를 다녀온 그 다음 해에 제9차 정기총회(1979.1.14 대전 추운각)에서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 대대적인 장학금을 모금하기로 하게 된다. 이것은 풍육회가 처음부터 목표 설정을 한 것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풍육장학회 운영규정」이 임원연석회의에서 의결되고 제10차 정기총회(1979.8.15 추운각)에서 인준된다. 이때 인준된 「풍육장학회」는 풍육회의 부설 기관의 성격이고 임원은 본부 임원과는 별도로 신설된다. 회장은 鍾九씨가 겸임하고 부회장에 南浩(진산고교장), 南珍(대전 숭전대 교수)씨이고 실무에 행정사무장 南翼(금산여고), 재무사무장 慶衍(대전 동아공고 경리계장)씨 등이 맡는다.
南浩 교장은 본회의 초창기부터 참여하여 비중 높은 이사로서 기여도가 매우 높았다.(공로패40호)
그의 주춧돌은 회의의 흐름을 안정되게 했으며, 연령제한이 올 때까지 성의를 다해 주었고, 계씨 南崗(금산여고)씨가 뒤를 잇게 된다. 그는 도내에서 가장 탁월한 능력의 교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慶衍 초대 재무사무장은 전문 재무행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학금의 모금관리와 운영에 처음부터 안정된 기여를 했으며 많은 편의를 제공한다. 그는 부여 고향으로 낙향할 때까지 성실을 다해 주었다(공로패 23호) 그의 뒤를 이은 것은 在衍(충남교육청)씨였다.
모금현황의 제1차 보도는 「풍양회보」 제4호(1979.5.15)였다. 이것은 처음으로 인쇄된 상철 출판물이었고, 표지에 ‘대외비’라는 것을 표지에 넣어 타성에의 지나친 언급은 자제하게 했다. 특히 풍육회의 회원은 거의가 현직이기 때문에 혹시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도 할 수 있었다.
제1차 보도는 누계 270만원(105명)이었다. 아직은 돈을 내지 않은 신입금은 353만원(94명)으로서 총 623만원의 규모였다. 이때 모금표어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였다. “대대적인 이번 장학금 공모는 천유여년의 우리 종친사에 초유의 일로서 우리 후손들에게 새로운 젖줄이 되고 영원한 등불이 될 것”(4호 43쪽)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정 단위가 아니고 개인 단위(父·子·孫)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을 권하였다. “이번 일만은 아무리 씹어도 아깝지 않은 돈이다/우리도 이젠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니/세월은 화살같이 달려가는데”(4호 41쪽) 등의 깊은 울림을 호소하기도 한다.
당시 1구좌는 1만원이었다. 최하가 1구좌였던 셈이다. 성금의 대종을 이룬 것은 1구좌였다.
이 전국적인 모금사업은 10여년이나 계속된다. 鍾九 회장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이 일은 추진될 수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제주도까지 다녀왔지만 회장은 특별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대학교수로서 사람과의 대화를 좋아하고 여행 취미가 남달랐다. 지금도 외국을 이웃집 드나들 듯한다.
장학금 모금을 시작할 때, 회장은 49세, 나는 44세로 한창 일할 나이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일에 겁 없는 연령이기도 했다.
나는 문단에 이미 데뷔(1966)해서 작품발표를 하고 있었고, 충남문협은 물론 한국문협이나 한국시협 등과 깊이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연찮게 풍육회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흐뭇한 일체감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흔히 출세를 위해서가 사회적 이기적 관점이라면, 자신의 본분과 안정을 위한 종중의 분위기는 달랐다. 풍육회에는 처음 만났거나 자주 보았거나 간에 특이한 대가족적 깊은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 순수의 매력이기도 하고 언제 만나도 좋은 이가 거기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성씨는 5582개이지만, 김·이·박씨 등이 45%를 점유한다고 보도된다. ‘문벌주의’란 말을 많이 들었지만 그것은 구시대 왕정 세습 때의 산물이다. 지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자기 순수의 길을 찾아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향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모금사업이 시작되면서 간부들은 막대한 사무량을 만나게 된다. 각종 기본장부, 업무수발, 통신문 회보 발행 등이 이어진다.
鍾九 회장은 문중 대학교수들을 비롯하여 이른바 사회적 상층분들과의 대외적인 창구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실무와 초·중등교원들은 우리가 더 많이 연결되어 있는 터였다.
초창기에 만율(萬溧, 1923~2013)씨가 첫 총회 참석차 대구에서 올라왔다. 먼저 전화하곤 우리 집에 와서는 기본장부들을 손수 점검, 상황을 물었다. 이 분은 이때부터 깊은 신뢰를 보였고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본부 부회장으로 참여하였으며 장학금 모금에도 안내를 해주기에 이른다.(공로패 35호)
(2) 모금이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장학금 접수의 제1번은 대전에서 조영구내과 원장인 英九씨(현재 충남대병원 정문 앞에서 영업)의 10만원이었다. 언젠가 나에게 전화를 주었는데 계씨의 자제가 장학금을 받았다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사실 장학금은 조성할 때가 어렵고, ‘주는 사업’의 흐뭇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흐뭇한 인사는 지금도 끊이지 않는 편이다.
보도된 최근의 사례를 소개한다. 2016년도 제37기 장학생 예린(영국 옥스퍼드대 법학과 3)의 부친 汀權(목사, 한세대 교수)씨는 딸 대신 장학금 수여식(대전)에 참석하곤 우리 종보에 「참석기」를 썼다. “풍양조씨는 종회 활동이 활발하고 장학사업을 통해 많은 후진을 양성하고……내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딸이 종중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많이들 부러워하는 것을 통해 느낀 것이다”(종보 40호, 34쪽)고 했다. 그리고 10만원의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초기인 「풍양회보」 5호의 306명에 대한 보도를 보면, 英九 원장의 10만원을 시작으로 호연(祜衍, 광화문 국민은행 지점장), 文九(서울 남부 농협이사), 鍾九(회장), 喜九(대전, 삼성공업사장), 南仁(부여, 조약국), 南春(대구, 풍남상사)씨 등이 각기 10만원씩을 냈고, 南重(서울, 고려예식장)씨가 50만원, 聖衍(춘천, 육림기업)씨가 60만원을 낸다. 50만원 이상이면 감사패가 수여되었으므로 南重(11호), 聖衍(12호)씨에게는 각각 감사패를 수여하기에 이른다.
南重씨는 이후 100만원을 추가해 150만원이 된다. 이때 360명의 접수분(1979.10.17)까지는 7,657,000원이었다. 또한 신입금도 5,780,000원에 이르렀다.
한편 풍육회에서는 고문단(장학위원),이사진, 본부 임원들에게는 5구좌(5만원),일반 회원들에게는 3구좌(3만원)의 선을 제시하며, 이심전심으로 단합해 줄 것을 독려한다. “일족의 중흥운동” 또는 “장학사업 시작되면 우애친목 절로 된다”(표어)는 문구가 공문과 안내장에 계속 이어진다.
장학금 모금은 일차적으로 홍보가 있어야 했다. 내용을 모르는 지역이나 일가에게는 설득이 너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공문이 유일한 수단일밖에 없었다. 아마 수천통이 나가고, 「풍양회보」가 그 뒤를 잇는다. 鍾九 회장도 “이런 뒷받침이 있으니 일이 되는 것”이라 하였고, 의욕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우송 작업은 임원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절차도 쉬운 것이 아니어서 거의 내 힘으로 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일요일에는 조반 전에 80여 통의 편지봉투를 쓰기도 했다. 그때 아이들이 아직 초·중고생이었는데, 나는 봉하는 풀칠을 시켰다. 특히 둘째 딸의 도움이 컸다. 이때 회장이 얻어다 준 「‘77한국행정구역편람」이 있었는데 전국 우송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哲衍(前 대종회장)씨가 현직에 있을 때 준 것으로 기억된다.
일요일에도 대전우체국에서는 접수하는 인력이 있었으므로 나는 편지가 100통이 넘는 것은 모두 갖고 가서 ‘요금 별납’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아내는 친구들과 함께 전남 신안군 홍도에 갔다가 식중독에 걸려 기진맥진해서 온 적이 있었다. 나는 성묘단을 추진하는 때라 전화기에 붙어 정신이 없었다. 아내는 “사람이 죽어가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이따금 그 이야기를 꺼내며 섭섭해 한다.
鍾九 회장은 족보박사가 되고 나중에 대종회장도 되었지만 ‘족보박사’가 된 것은 모금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족보를 찾아보고 면밀히 신상 파악을 해서 만나는 것이다. 본래 기억력이 좋은 분이라 줄줄 외운 것 같았다.
택시를 함께 타고 가다보면 운전기사에게 “당신 성씨가 무어요?”부터 시작해서 족보사항을 묻곤 하는 습관은 그때부터 있는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이런 경우도 해당될 것이다.
장학금을 모금하면서 바로 다음 해부터 제1기 장학생 6명(고교 3명, 대학 3명)을 선발, 장학증서 및 장학금(고교 10만원, 대학 30만원)을 지급한다. 대학을 30만원으로 한 것은 이때 국립대학(예, 충남대)의 경우 한 학기 등록금이 27만원인데서 채택된다.
이때 처음이고 해서 모집요강 700매를 전국에 배포했는데, 고등학교는 3명, 대학은 10명이 응모하여, 대학은 3대 1의 경합을 보인다. 현재 고교생은 폐지된 지 오래고, 대학생은 180만원이 지급되는데 그 심사에는 사정안이 작성되며 학생의 성적 비중이 높은 편이다.
대학 1학년 경우는 본인의 수능성적이 그대로 반영된다.
대학 재학생은 본인이 얻은 학점이다. 학점은 ABCD 등으로 분류되어 있어 사정안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환산처리 한다.
① 전 학점이 모두 A학점인 경우는 300점 만점을 준다.
② 그러나 B학점은 하나에 -5점, C학점은 하나에 -10점 등으로 감점 방식에 의하여 성적이 산출된다. 전부 A학점이고 B학점이 하나이면 295점이 된다.
③ ‘학교등급’이 있는데 장학회가 정한 학교 등급으로서 그 상한선은 100점이다. 서울대, 연대, 고대, 포항공대 및 유수 해외대학인 경우 100점이 된다.
④ ‘가정 사정’은 父나 母가 사망 또는 별거인 경우 가산점 부여
그리고 한 번 받은 학생의 재신청은 금지되며, 형제자매가 모두 공부를 잘해도 1명만 혜택 받을 수 있다. 장학금 규모가 적기 때문이다.
⑤ 제1기 장학생 명단(1980)
구분 |
학 교 |
학 생 |
보호자 |
거주지 |
비 고 |
고교 |
대전대신고 1 년 |
趙允浩 |
趙在南 |
논산읍 |
|
대전고교 3 년 |
承衍 |
南根 |
대전시 |
||
대전여고 2 년 |
京子 |
南國 |
부여군 |
||
대학 |
서울대 경영계 1 년 |
誠基 |
益衍 |
서울시 |
|
성균관대 경제과 1 년 |
徹衍 |
南奎 |
대전시 |
||
외국어대 중문과 4 년 |
浚熙 |
誠穆 |
상주읍 |
이 1기 장학생 가운데 외국어대 출신 浚熙(1954~ )씨는 誠穆(1922~1992)씨의 차남으로서 기업은행장을 거쳐 현재 방송채널 YTN의 사장으로 있다. 기업은행장 때 풍육회 기금이 기업은행에 유치되어 지금 그 은행에 장학기금이 있다. 浚熙씨는 개인적으로도 적지 않은 장학금을 계속 내주고 있다. 지난 5월 상주에서 모친상이 있었다.
또한 성균관대 출신 徹衍(1960~ )씨는 南奎(행정사무관)씨의 차남이다. 그는 삼화세무회계를 하며 풍육장학생회 초대회장으로 협조가 많고, 개인적으로도 적지 않은 장학금을 계속 출연하고 있다.
「풍양회보」 제6호(1980.3.20)에 이르면 이때 모금액이 총 13,927,000원(592명분)인데, 이를 지역적 분포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15쪽)
1차 지역분포 현황
(단위:만원)
지역 |
충남 |
서울 |
부산 |
경북 |
강원도 |
경기도 |
전남 |
기타 |
계 |
금액 |
466 |
460 |
117 |
105 |
89 |
79 |
35 |
41 |
13,927 |
비율 (%) |
33.5 |
33 |
8.4 |
7.5 |
6.4 |
5.6 |
2.6 |
3 |
100% |
위의 표를 보면 충남과 서울이 전체의 66.5%에 이르고, 부여와 서울, 그리고 회양공파의 집결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나는 상주에 이어 부산으로 간다. 부산에는 부산화물자동차(주) 사장인 弘載(1919~1998)씨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시 서구 장림동은 평장사공파(사직공파)의 집성촌이었다. 弘載씨는 총회에 한 번 나오셔서 “풍양조씨의 장학탑”을 세우는 것이라 하였고, 그뒤 내가 부산으로 공무 출장(충남교육청 중등교육과) 때도 두어 번 연결이 있었다. 弘載씨는 자신도 30만원을 희사였고 장림동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독려해 20여 명이 협찬하기에 이른다.
그뒤 弘載씨는 부산의 우수학생들을 응모하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장학금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弘載씨의 인품과 성의는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자제 敦明 사장이 또한 500만원을 보내주었다(감사장 78호)
풍육회 성묘단이 처음 춘천 갔을 때, 환영해 준 聖衍씨도 南庸씨와 함께 잊기 어려운 분이다. ‘나무와 함께 산 60평생’으로 알려진 육림기업 聖衍씨의 열정이 鍾九 회장을 감동시켰다. 자신도 60만원을 내고(감사패 12호) 계씨인 光衍, 璋衍씨를 비롯하여 아들들에게도 성금을 전부 배치했다. 南庸(前 내무공무원)씨와 함께 춘천화수회를 이끌었다. 南庸씨도 공로패를 받았다.(제34호)
鍾九씨가 聖衍씨 서가에 가니 딴 것은 다 제쳐두고 풍육회의 감사패만 있어 감동을 느꼈다고 회장은 전했다.
내가 초창기 경기도 김포군의 집성촌을 방문하여 重衍(통진면 귀전리)씨 댁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여러 일가들의 협찬이 있었고 두터운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신분증(교육공무원증)을 내놓곤 했다. 어느 부인이 나에게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이러고 다니느냐?”고도 했다. 종재 관리에 대한 항간의 불신 때문인 것으로 들었다. 忠衍(한솔어린이집)씨의 협조도 잊을 수가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 임원진의 수고와 애로도 막중한 것이었다.
① 南華(1925~2003)씨는 풍육회 대전지회 초대회장과 이사를 역임했으며, 서예와 문인화에 능했다. 대전지회 모임 때마다 보학강의를 도맡아 그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공로패 57호) 본래 육군포병대위 출신으로 교육계에 들어와 신탄진중앙중 교감에서 정년퇴직했다. 사후 전북 임실호국원에 암장되었고, 임원들이 성묘를 다녀온 바 있다.
② 南斗(이사, 부회장)씨는 부여 고향에서 근무하다가 대전으로 전입한 이후 참여했고 초기에 종재들을 밀어준다. 그의 계씨 南林(1940~2007)씨는 50만원을 쾌척해 칭송이 높았다.(감사패 19호) 南斗씨는 대전광역시교육청 초등교육국장의 요직에 있었고, 이사회 운영에서 버팀목의 역할을 해 주었다.
③ 南容(간사장, 3대 회장)씨는 담백한 성격도 있곤 해서 제1기 모금운동에 전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춘천을 한번 가서 赫九(1931~ ), 誠春(1940~1999)씨 등 회원들과 함께 모금을 했다. 赫九씨는 한번 대전을 다녀가기도 했다. 풍육회 운영에 있어 중요한 상담역의 한 분이었던 그는 제2기 장학금 모금 시에 회장과 대종회의 부회장을 겸직하면서 제2기 장학금 모금의 길을 열었다.(공로패 53호)
④ 총무간사 運九(1945~ )씨는 직장이 충북 소속이었다. 옥천공고, 증평공고에 재직하면서 대전에 자택을 정하고 풍육회 일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행정에 능하고 각종 집회의 사회는 총무간사의 몫이었다. 저서에 「토목제도」(국정교과서, 공저)가 있을 정도로 토목제도와 토목공학에 전문성이 있다.
⑤ 재무간사 定衍(1946~ )씨는 공주 영명고교에서 대전 대성여자정보과학고 영어교사로 전입하면서 풍육회 재무업무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는 착실하고 호학하는 기독교이었다. 전북과 서울 등을 다니며 직접 모금했다. 전북에서는 南雄(1936~ )씨 등과 연결됐고, 서울에서는 숙연(璹衍, 前 대종회장)씨를 처음 뵌 것이 定衍씨였다. 璹衍씨는 처음 50만원을 주었고(감사패 50호), 이후 다시 50만원을 쾌척, 100만원을 채워 주었다. 총무 運九씨와 재무 定衍씨는 풍육회를 지켜온 다시없는 2인방 실무진이었다.
이 모금사업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심전심의 공감의 울림이 있었다.
① 국회의원에 3선(10·11·15대)을 한 重衍(1936~1998)씨는 서천, 부여, 보령이 그의 선거구이기도 했다. 그는 장학금 모금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며 60만원을 쾌척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② 南照(1938~ )씨는 국회의원 2선(11·12대)을 했는데 전국구 의원 때 첫 세비를 받아 30만원을 보내와 칭송이 높았다.
전북 익산이 고향이다. 산림청장 전북지사 등을 역임했으며 1박 2일의 풍육회 총회에 참석 체온을 나누기도 했다.
③ 誠姬(삼원비료공업)씨는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 故 貞衍씨의 외동따님이신데 재계에서 성공, 출가외인이지만 장학성금 20만원을 희사하여 칭송이 높았다.(「풍양회보」10호, 30쪽)
④ 3형제가 되시는 南福(1941~1992), 南昌, 南根씨 등은 인삼의 고장인 금산에서 남창삼업사를 일으켜 금산뿐 아니라 여러 곳에 인삼밭을 소유해 인삼왕으로 알려졌다.
장학금으로 南福씨가 10만원을 시작으로 南昌 50만원(감사패 20호), 南根 55만원(감사패 41호)을 희사해 주었다(「풍양회보」 7호, 9호, 11호)
⑤ 明載(1938~ )씨는 평택과 온양에 내무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현지에 종친회를 일으켜 세운 분으로 유명했다. 풍육회 장학위원으로 10만원을 희사하며 그 육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감사패 37호), 장남 敦亨의 결혼식 주례를 鍾九 회장이 서기도 했다(「풍양회보」14호, 64쪽)
⑥ 東三(1928~ )씨는 충북대 교수였고 농학박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풍육회 부회장 및 고문을 역임하면서 기여도가 컸다. 저서에 「수도작(水稻作)」등 많으며 충북도 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는데 모두 교육계에서 봉직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3) 장학성금의 관리 흐름
① 제1차 증식(산업금융채권)
장학성금은 푼돈을 모아 목돈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엄연한 원리에는 鍾九 회장의 전문성이 있었다.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는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모금이 시작되면서 푼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풍양회보」 6호에 보도된 ‘입금액 지역분포’의 총액은 13,927,000원으로서 1년 후에 잡힌 돈이었다.
이 돈에서 한국산업은행(대전 지점)의 산업금융채권 2천 3백만어치(3년 만기, 금리 39.435%)를 매입한다(1980.3.8). 말하자면 산업금융채권은 3년 후면 원금의 2배가 넘는 셈이다. 모금 목표액이 1억원으로 확정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제1기 장학생 6명이 선발되어 이때 120만원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쓰면서 저축해 가는 양상이 시작된다.
이때 鼎九 화수회장(삼부토건 회장, 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의 500만원의 희사는 새로운 힘을 보태게 된다. 鼎九 회장뿐 아니라 계씨 昌九(삼부토건 사장) 150만원(감사패 15호), 장남 남욱(南煜, 감사패 17호) 60만원, 계씨 景九(가산토건회장, 목포) 50만원(감사패 52호) 등 삼부가의 조력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가산토건은 鍾九 회장이 직접 갔던 곳인데 2012년 제2차 모금 시에 가산토건에서는 장남 南卨씨가 다시 300만원을 보내주었다(감사장87호)
처음 나는 단독으로 삼부토건을 찾았다. 동향이고 동파지친(同派之親)이어서 그만큼 친숙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 때 마다 부재중이셔서 뵐 기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신을 올려 진행 경과를 말씀드리고 선처를 호소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총무 南權씨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삼부토건 회장님이 보자고 하시는데 올라올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내가 약속시간에 일요일의 사장실을 들어서니 기다리고 계셨다. 과묵한 분이라 긴 말이 없었고 500만원 수표 한 장을 주셨다. 이 돈은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회장이 풍육회의 존재를 처음 인정해 주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풍양회보」 8호(1981.6.25)의 ‘납부액 지역분포 현황’(27쪽)에 나온 총액(현금)은 31,447,000원이었다. 모금 3년차를 맞고 있는 때인 것이다. 제주도(6만원)까지 나온 지역분포를 보면 다음과 같다.
2차 지역분포 현황
(단위:만원)
지역 |
서울 |
충남 |
경기 |
경북 |
부산 |
강원 |
기타 |
계 |
비고 |
금액 |
1,487 |
828 |
205 |
191 |
163 |
137 |
134 |
3,145 |
|
비율 (%) |
47.28 |
26.32 |
6.51 |
6.07 |
5.18 |
4.35 |
4.24 |
99.95 |
|
2차 납부액 분포는 서울이 크게 앞지르고 충남은 그 다음이 된다. 1차에 비해서 순위가 바뀌는 것이다.
제13차 정기총회(1982.1.17)의 재무보고를 보면, 제1차에 이어 1년만에 제2차 산업금융채권 2,300만원어치(원금 11,969,200원)를 구입하였고(81.3.18) 제2기 장학금(8명) 16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그리고 출장여비 33건, 회보 8호 및「청사요람」1집 인쇄비, 사무비 등 총 2,292,000원이 소요되었음을 밝힌다. 당시 출장여비는 1일 2~3만원을 지급했는데 이 돈은 교통비와 식대 그리고 여관을 이용하기에는 너무 빠듯한 금액이었다.
산업금융채권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또 이것이 전부였다.
구분 |
원금 |
상환금 |
매입일자 |
상환일자 |
비고 |
1 차 |
10,460,024 |
23,000,000 |
1980.3. 8 |
1983.3. 8 |
|
2 차 |
11,969,200 |
23,000,000 |
1981.3.18 |
1984.3.18 |
|
계 |
22,429,224 |
46,000,000 |
|
|
|
3년 후에 원금의 배가 넘는 4천 6백만원의 목돈이 잡히는 것이다. 어려운 모금과정을 생각하면 횡재와 같은 돈이었다.
일가 어른들의 갸륵한 뜻이 모아진 이 돈은 다음 부동산에 투자되면서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한편 제13차 총회 후 모금을 활성화하고자 합동모금을 실시한다. 행정사무장(南翼)을 반장으로 定衍(재무간사), 鍾九(회장), 南容(간사장), 宗衍(1941~2012), 南華(이사)씨 등이 서울과 대구에서 합동모금에 임했다.
1회 서울「영화」다방 : 82.1.18(5박6일)
2회 서울「광덕여관」 : 82.1.27(4박5일)
3회 대구「부림여관」 : 82.2.27(4박5일)
합동모금반 운영은 현지 일가분들과 만나고 사귀며, 신뢰도의 증진 등에 좋은 점도 있으나 경비가 많이 들었다. 이 3회에 걸친 합동모금의 성과는 모두 3,920,000원(현금 2,850,000, 신입금 1,070,000원)이 전부였다.
② 제2차 증식(부동산 투자)
땅을 매입한다는 것은 겪어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단체의 것이기 때문에 혼자 결정할 일도 아닌 것이다.
나는 대흥부동산을 하는 南盛씨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을 섭렵할 수 있었다.
南盛씨는 장학성금 납부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여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매월 장학금을 1만원씩 내기 시작한 분에는 성심당약국 德九씨가 있었다. 그는 성균관대 약대를 나와 양약과 한약을 아울러 조제하여 신뢰가 깊었다.
부동산 매입은 대전의 지가 폭등이 아직 불기 전이었다. 우리는 좋은 시운을 얻고 있었다.
한편 제14차 정기총회(83.1.23) 1박 2일 일정으로 유성 신원장온천 호텔에서 열린다. 이 모임에서는 국회의원 南照(민정당), 元衍(부산, 화수회부회장), 丙彦(서울, 화영건축), 宰衍(총무간사), 南豪(서울 모금책)씨 등이 감사패 또는 공로패를 받는다.
총회에서는 산업금융채권 1,2차 연도분이 금년부터 3년만기가 되어 지급받게 되어 있으므로 이 돈과 통장 잔고 등의 자금에 대한 사업방안이 논의되고, 부동산을 매입하기로 결정한다. 집행부에서는 2개월에 걸쳐 매입을 추진한 끝에 모두 3건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화수회에도 보고된다.
당시 평당 2만원(밭) 또는 3만원(논)이었는데, 이 부동산 매입은 모금을 시작한지 5년차의 일이다. 3건의 부동산 매입은 총액이 5천 3백여만원이었는데, 이는 산업금융채권 2건에서 3년 만기로 받은 4천 6백만원(81%)이 결정적인 자금인 것이다. 다만 논산군 부적면의 7,219평(밭·임야)는 오래 보유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300만원의 부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여년이 지나자 대전시의 땅 2건(관저동·갈마동)은 외부로부터 요구가 오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중앙토지수용위원회(1995.5.17)로부터 토지수용법 제73조의 규정에 따라 ‘재결서정본’을 송부한다 하였고(이의 신청이 있으면 1개월내 가능), 갈마동 논은 이보다 앞서 한국토지개발공사(충남지사)로부터 1차 일부 수용(1990.3.6), 2차 전면수용(1992.1.7)으로 대전 둔산 신시가지 개발사업에 협조를 요구했다.
부동산 매입 및 매각 현황
지 번 |
지목 |
평수 |
매입가 ( 평당 ) |
매도가 ( 평당 ) |
인수금액 |
대전시 중구 관저동 601 |
전 |
632 |
20,000 원 |
590,000 원 |
374,436,900 원 |
대전시 서구 갈마동 43-6 |
답 |
510 |
30,000 원 |
620,000 원 |
316,279,500 원 |
논산군 부적면 감곡리 (3 필지 ) |
전 , 임야 |
7,129 |
3,500 원 |
4,500 원 |
32,500,000 원 |
계 |
|
8,271 |
|
|
723,216,400 |
자료 :「풍양요람」5집(2009) 137쪽
보상금 인수일은 관저동(1995.6.5), 갈마동(1992.1.7), 논산군(1987.11.4)이었다. 또 이 시기는 장학금이나 신입금이 산발적으로 들어오는 때로 제1차 장학금 모금이 사실상 끝나는 과정이었다. 이때까지 장학금 모금은 총 66,693,000원(납부자 연인원 1,855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피땀 흘리며 서로 뜻을 모은 돈은 1억원에 미달했고, 약 6천 7백만원이었다. 여기 참여한 연인원(돈 내는 단위에 따라 이중 3중 기재됨)은 1천 8백여명이었다. 현재 제2차 모금으로 이제는 2천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80년부터 매년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었으므로 29기(2008)까지 462명에 약 6억원(594,700,000)이 지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위의 표에서 보듯이 부동산을 팔았을 때(1995) 약 7억 2천만원의 보유 금액이 잡힌다. 이는 부동산 매각에서 원금을 제외하고도 6억 6천만원의 순이익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학금은 1억 목표가 10억 목표로 바뀌고 제3차 고금리 증식으로 들어간다.
③ 제3차 고금리 증식(은행예금)
갈마동의 토지 보상금이 먼저 나왔을 때(1992), 보유해 오던 은행의 돈은 모두 4억 1천만원(418,605,275원)으로 이는 보상금 316,279,500원과 은행예금 102,325,775원의 합산인 것이다. 이 돈은 즉각 4개의 통장에 장기우대공사채 또는 3년 만기저금 등에 입금된다.
관저동 보상금은 갈마동 것보다 많은 374,436,990원(평당 59만원, 갈마동 것은 평당 62만원이었음)이다. 1983년 평당 2만원에 샀던 땅이니 무려 30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양도소득세도 3천만원이 소요된다. 이로 인하여 부동산 시대가 끝나고 현금 관리시대로 접어든다.
풍육회가 떼돈을 벌었다는 말은 단체의 일이라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풍육회는 떼돈을 벌었는데 “어째 간부들은 누구 하나 돈 번 사람이 없네” 이런 말이 돌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부들은 재산의 증식은커녕 오랜 기간 각종 회의에서 회비를 내어 식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부산, 상주 쪽에서는 “전국 참의원 선거가 있어 임원이 나온다면 모두 찍을 것이다”란 유머도 들려왔다.
결국 어떻게든 포상에 관한 논의를 일단은 거쳐야 되겠다는 분위기에 의하여 임원회의가 버드내횟집(95.7.13)에서 있게 된다. 그동안 20여년간 수고한 임원들에 대한 일종의 논공행상이 논의된다. 내가 경과보고를 끝내자 나와 鍾九, 在衍씨는 밖에 나가 있게 했다.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다행히 내 日記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어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왜냐하면 나부터 잊어버리고 있었고, 대부분 임원도 거의가 잊고 어떤 불만감 같은 것이 여전히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있던 우리가 연락을 받고 안에 들어갔을 때 분위기가 정리되어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포상금은 총 1천5백만원으로 하고, 우선 鍾九 회장과 나에게 500만원씩을 지급하며 나머지 500만원을 8명의 임원들에게 배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南容(상임부회장) 90만원, 定衍(재무사무장) 80만원, 南祐(간사장) 80만원, 在衍(부회장) 50만원, 宗衍(재무간사) 50만원, 誠彩(부회장) 50만원, 運九(행정사무장) 50만원, 慶衍(초대재무사무장) 50만원.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고, 고사하는 분도 있었으나 대국적인 견지에서 피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때 강직한 南斗씨가 스스로 자신은 빠지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년 후 내가 鍾九씨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맡게 되었을 때도 역할이 있었다.
당시 ‘정년’이 되면 회원 자격은 유지하지만, 임원이나 이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부회장 南允, 本九, 南浩씨 등이 물러났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책임을 져야한다…”고 鍾九씨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청사요람」 3집(95.10.9)을 발간하고 후진들에게 실무를 넘긴다. 그래
서 南祐(간사장), 運九(행정사무장) 두 분을 불러 실무를 인계하였고,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풍육회가 반석위에 섰으니, 앞으로 운영만 잘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제2대 회장에 선출되고 미구에 재단법인 설립업무를 해야만 했다.
제3차 고금리의 증식시기는 한국투자신탁에 예금한 상태였으므로 겉으로는 평온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 고금리 시대로 인하여 5년 후(1995.9.1~2000.8.3)에는 기본재산이 3억 4천여만원 증가하며, 원금을 보존하고 그 이익금만 사용하는 법인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의 저축금은 한국투자신탁의 3개 통장에 11억 2천여만원(1,127,220,274)인데 이를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현금 저축금 증가현황(법인설립 신청당시)
순번 |
투자신탁명 |
예금통장번호 |
대표자명 |
평가금액 |
1 |
한국투자신탁 |
450-600010-6932-90 |
조남익 |
417,930,667 원 |
2 |
한국투자신탁 |
450-600012-6932-10 |
조종구 |
494,775,172 원 |
3 |
현대투자신탁 |
501-647-0056-2504 |
조정연 |
214,514,405 원 |
|
계 |
|
|
1,127,220,274 원 |
(4) 종구 회장의 인생경영
鍾九 회장과 나는 풍육회의 안팎에서 손을 잡아왔고 특별한 이견이나 갈등이 없었다. 이것은 회장의 인품에서 온 것이다. 많은 일을 구상하며 실천에 옮겼는데 회장은 거의 ‘불간섭’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회장은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1955), 고려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해 경영학 석사가 된다. 정치에 대한 꿈은 학생시절부터 꿈꾼다. 충남대학교 법경대 전임강사로 들어온 것은 나이 39세 때였다. 그리고 학생과장, 교무과장 등의 보직을 차례로 맡는다.
특히 그는 영어, 독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 등 5개 외국어의 독해능력과 회화가 가능하고 스페인, 그리스, 소련, 이탈리아의 언어도 기초습득을 해서 본인은 언필청 40여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말하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는 특히 선천적으로나 전공면으로 보나 남의 밑에서 일하기는 어려운 바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나지 않는 둥근 성격으로 많은 사람을 포용하며, 다른 사람의 편리를 먼저 생각할 만큼 여유 있게 생활한다.
매우 소탈하고 몸도 타고난 건강을 지니고 있다. 언제보아도 뚱뚱한 동안(童顔)이 반듯하게 걷는 편이다. 그래서 회장의 별명은 “천도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풍양회보」 13호(1987.1.24)에는 「조종구 회장의 인생경영」이란 제하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1986년 섣달 서울 용두동 감리교회의 대강당에서 종구 회장의 차녀 南貞(충남대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풍양조씨 문중지도자대회처럼 많은 일가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멀리 대전, 부여, 이리, 김포, 온양, 공주 등 지방하객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만큼 애를 썼으니 나와야지요” 라고 한 것은 삼부토건 昌九 사장님의 말씀, “마음씀이 그만하니 우리 문중도 화합과 번영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한 것은 전북 이리에서 20여명 분의 ‘봉투’를 들고 온 전북화수회장 東福(1934~2006)씨의 일석이다.
풍육회가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 무모한 것이었다. 그 업무도 ‘종사’라는 “평생을 걸고, 평생이 묶여야 하는 일”로 규정된다. 아무도 섣불리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모한 사업을 돌파하려는 종구 회장의 기이한 ‘인생 경영’이 여기서 시작된다. 불행하게도 그는 충남대에서 임용탈락이 되는 ‘사태’가 있었고, 몸이 자유로운 시기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풍양회보」를 비롯하여 장학금 신입서, 입회원서, 모금 보조자료(전국 일가분들의 명단)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가방을 들고 다닌 손바닥에는 어느덧 잡역부의 손처럼 두꺼운 못이 박히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은 분이 족보를 공부하면서 다녔으므로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鍾九 회장은 충남북 일원, 서울의 골목골목, 강원도 산골과 동해안, 전남북 일원과 남단인 목포, 강진, 진도를 헤맸다. 경남북은 물론 울산, 부산, 마산, 창원을 누볐으며 제주도에 이르기도 했다. 동남아 일대의 여행 시에는 일본에 들려 재일교포 호연(澔衍)씨 댁에까지 갔다. 그래서 그의 취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여행이 되어버렸다.
우리 문중의 역사상 초유의 대중적 모금운동은 회장의 선두 역할로 그 돌파구를 열었던 것이다.
풍육회의 명예회장단은 모두 다섯분이다.
東弼(1919~2000) : 고려대 정경대학장
淳 (1928~ ) :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
南赫(1924~2013) : 대전여자고등학교장
龜衍(1924~2009) : 고려대 경영대 교수
敬熙(1917~2014) : 영남대학교 총장
이 분들은 어쩌니 해도 풍육회의 상징성을 보인다고 할 것이다.
南赫 교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에 계신 분들은 전공분야가 대동소이하고 鍾九 회장의 경우도 여기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제18차 정기총회(87.1.24)가 부여 유스호스텔에서 1박 2일로 개최될 때, 東弼 박사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회장은 東弼 박사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대 강사를 거쳐 서경대 교수였던 德九(1937~ ) 경제학박사와도 서로들 인연이 있는 것으로 들었다. 말하자면 우리 문중의 교수팀에는 경제학 전문성이 흐르고 있음이다. 풍육회의 장학성금 관리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 이면을 흐르는 것은 경제 전문성이 주효했음을 느낀다.
제19차 정기총회(89.1.29)가 온양 유정여관에서 역시 1박 2일로 개최되었을 때는 경북대 相熙(1941~ ) 공학박사의 ‘중국공업의 발전상’(슬라이드 병용)이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대한민국과학기술총연합회 최우수 논문대상을 받았고, 세계요업학회(窯業學會)의 회원인 분이다. 영남대 敬熙 총장과 함께 호군공파의 석학들이다. 敬熙 총장의 계씨 準熙(1938~2015) 변호사가 별세하셨다는 소식도 이번에 들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淳(1928~ ) 교수는 그의 경제학 저서뿐만 아니라 초대민선서울특별시장, 15대 국회의원 등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모금차 서울 가서 먼저 댁으로 전화를 했고 자제의 대답을 듣고 방문했다. 2층 서재에서 제자들이 나온 뒤 들어가 통성명을 하니 “경의를 표합니다. 저의 집 족보는 저기 있습니다”고 했다. 넓은 방의 서가에 평장사공파의 파보가 눈에 띄었다. ‘敦’자 항렬이고, 선친께서 자손이 귀하여 다음 ‘黙’자 항렬까지, 항렬에 의한 작명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즉석에서 성금과 입회원서를 주었다.
‘일가’란 피할 수 없는 한 우물을 마시는 사이라고 하겠다. 동성동본(同姓同本)은 역시 백대지친(百代之親)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한 번 더 가서 장학금을 받기도 하며 깊은 경의를 지금도 지니고 있다.
鍾九 회장에게 풍육회는 성공했지만, 그의 깊은 뜻의 하나는 아직도 숨어있는 것 같다. 대종회장이나 풍양조씨 연수원장을 할 때는 서울이나 상주로 미리 가서 여관을 이용하며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아무 불평 없이 ‘천직’으로 아는 면이 있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그의 사회적 봉사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육회도 탁월한 그 분의 봉사정신의 관류였던 것이다.
나는 내 묵은 일기장을 우연히 보다가 鍾九 회장이 부여에서 출마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92.3.24)의 득표기록을 보고 놀란다.
민자당 김종필(金鍾泌) 42,358표
민주당 김택수(金澤洙) 6,796표
국민당 조종구(趙鍾九) 6,250표
신정당 김홍조(金洪祚) 2,990표
이때 풍육회에서는 처음있는 일이라 500만원을 지원하며 음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重衍(서천), 南照(익산)에도 약간의 격려금이 나간다. 이 일까지를 끝으로 나는 “풍육회의 돈은 장학금!”이란 뚜렷한 명분을 내세우며 내외의 필요성이나 요구를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한번은 화수회에서 무슨 할당금이라며 금액 요구가 있었다. 東振 부회장이셨는데, 장학금이란 말씀을 드리니 곧 수긍하고 그 뒤론 이런 요청이 없었다.
鍾九 회장은 15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누구나 그렇지만 사람의 일생에 명운이 있고 모두들 다 가질 수는 없게 된다. 류양숙(柳良淑) 부인과 함께 슬하에 南熙, 南貞, 南順, 南海, 恩卿 등 다섯 따님을 두었다. 따님들이 모두 대학을 나온 재원(才媛)들로 성장했고, 사위들 또한 쟁쟁한 위치들에 있다.
큰 사위 황인무(黃仁武)는 화려한 장군 경력과 보직에 이어 현재 국방부차관으로 있다. 그는 대전고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이기도 했다.
柳良淑 부인은 류관순 열사의 바로 당질녀(5촌)가 된다,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는 고흥류씨의 집성촌이다. 큰오빠 柳濟敬 공주사대 교수는 왜정시대 독립운동을 해 투옥되기도 했던 애국지사였고,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회장 부부는 대전 도마동 감리교회를 나가고 있으며, 특히 부인은 전도사로서 신앙이 깊은 편이다. 부부는 또한 계간 「창조문학」에서 수필가로 데뷔했고, 작품집도 발간한 바가 있다. 학자로서 다재다능한 鍾九 회장의 인생경영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