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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육장학회의 창립과 발전(1974~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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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9-12 18:06 조회1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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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육장학회의 창립과 발전(1974~1979년)

조 남 익

대종회 자문위원

제2대 풍육장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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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차 정기총회 대전(유성)-

1984. 1. 22

 

들어가는 말

해마다 열리는 풍육장학금의 수여식이 2016년도에는 제37기를 맞아 대전 효문화마을 대강당에서 있었다. 대종회 경구(璟九) 회장님과 남돈(南敦) 총무국장을 비롯하여 전임 종구(鍾九) 회장은 물론 숙연(璹衍) 회장도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장학생은 20명(남7명, 여13명)이며, 1인당 180만 원씩 지급된다. 수여식 안내장에는 주요 연혁이 있고, 재단법인 풍육장학회 기본재산이 12억이며, 지금까지 장학생 배출 652명, 지급총액이 9억3천7백4십만 원임을 밝히고 있다.

장학생 배출은 앞으로도 기대가 크지만, 현재 652명도 뜻있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풍양조씨 전체를 아우르는 장학금은 이것밖에는 없다. 재력이 있는 각 파에서 장학금이 있는 터이지만, 그것은 소속 자파의 학생에게만 지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금리가 적은 시대에 기본재산 12억은 너무 약소한 바가 없지 않다. 지금 제2기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어 2015년 지난해에는 1천1백20만 원(11명)의 자진 납부실적을 보인다. 현재의 모금은 직접 나가지 않고 자진 납부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이만한 것도 적지 않은 성과인 것이다.

나는 현재의 진행 상황을 보며 가슴을 설레는 사람의 하나이다. 더구나 대전문화재단에서 내 문학과 생애를 녹화(錄畵)하는 작업이 진행 중인데, 풍육회도 나오게 되어 나는 그동안 거의 잊고 있었던「풍양회보」, 「풍양요람」등을 다시 꺼내 보게 된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도 여기서 왔다.

이 글은 1974년 풍육회 창립총회(18명 참석)가 어떻게 해서 풍육회 본부, 풍육장학회 등으로 발전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정리하는데 있다. 사무실도 인원 배치도 없는 터에 전국의 장학금 모금 운동을 펼친 엄청난 파도가 이제는 거기 잠들어 있다. 우리 풍양조씨의 ‘문중저력’이 부상한 우수 성공사례였던 것이다.

또한 이 글은 막연한 기억력에 의존하지 않고 당시 발행한 「풍양회보」와    

「풍양요람」이며, 각종 기본문서들을 살피며, 사실을 찾아 기술한 것임을 밝힌다.

무엇보다도 미증유의 장학금 모금 운동, 어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던 이 사업의 성공 요인들을 생각해 본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일의 진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모금 운동의 주체가 풍양조씨의 최대 집성지인 부여인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특히 돈 관계는 안면이나 체면도 어쩔수 없는 것이어서 ‘성금’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실제로 모금액의 대부분은 여기서 조성되었다.

가령 삼부토건 창업주인 정구(鼎九, 1914~1993) 사장은 1962년 화수회장에 취임하여 별세할 때까지 31년간을 재임했다. 그분은 부여 출신으로서 대성사 매입, 포이동 토지 환매 등 현재의 풍양회관 신축기반을 조성한 분이고, 장학금 모금도 이분의 후원이 컸다.

둘째로 풍육회가 대전을 중심으로 성장했는데, 대전의 교통 편리가 전국적인 조직망이나 모금 운동에 중심 역할로 좋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편의를 충분히 제공한 교통의 도움이었다.

셋째로는 주체세력이 교원들이라는 것이다. 초창기부터 문중의 교원은 충남(대전이 분리되기 전임)의 회원이 128명으로서 이는 전체 회원 231명에서 절반이 넘는 55.4%에 해당했다(「청사요람」1집, 31쪽)

주체세력의 집결지에 그리고 교원들의 직업적 안정성과 사회적 신뢰성은 ‘성금’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자들의 창업횃불

(1) 풍육회의 창립배경

부여군의 장암면, 임천면, 세도면의 3개면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풍양조씨의 집성지이다. 또 이곳은 풍양조씨 ‘5선영(先塋)’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령 남수(南壽, 1916~1976)씨가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곳도 이 부여 을구자유당이었다. 그분은 주민의 뜻에 따라 금강의 세도면 강뚝을 사비로 공사한 거부였다. 금년 탄신 100주년을 알리는 프랑카드가 99칸 옛집 터에 나붙었다고 들린다. 또한 현구(玹九, 1905~1982)씨의 세도면장의 민선 당선도 이런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충남대 법경대 교수 종구(鍾九, 1930~), 대전고교 교사이며 시인인 남익(南翼, 1935~), 회덕중학교의 남용(南容, 1938~)씨는 모두 세도면 동향이고 가정적으로도 서로 알고 있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무관한 처지 같으면서도 깊은 연대의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풍육회 ‘창립 3인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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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가을, 나는 어떤 영감을 얻은 듯 먼저 종구(鍾九)씨에게 전화한다. “우리 풍양조씨 교육자들의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였다.

사회성이 강한 그분은 즉각 대환영이었다. 나는 이어 남용(南容)씨에게 전화했는데, 역시 찬성이었다. 이상하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별로 없었고, 모두 나에게 일임된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발기모임 비슷하게 모인 것이 鍾九, 南翼, 南容, 章熙(충남여고), 宰衍(백암국교), 南華(조치원여고)씨 등이었다.(「청사요람」1집 8쪽, 필자의 「창업의 횃불」)

당시 충남교육위원회에는 명망이 높고 교육학에 밝은 학무국장 남혁(南赫, 1924~2013)씨가 있었다. 나는 임용고시 면접 때 처음 그분을 알게 되었고, 일가 사이에 자랑스러운 인물로 알려졌다. “내가 일가들을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해치지는 절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new3-3.jpg창립총회는 1974년 10월 9일(한글날) 대전 중구 대원식당(주인 趙南正)에서 개최되었는데, 18명이 모였다. 충남도내 초·중등·대학의 교육계에 재직하고 있는 풍양조씨 교육자들의 첫 모임이었다. 내가 기초한 회칙은 거의 수정 없이 통과되었고 지역은 충남에 한정했다. 여기를 이탈하면 회원자격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편지를 보낼 때 교원명부에서 ‘九-南-衍’ 등의 항렬을 참고했다. 나중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때는 전화번호부 책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는 설령 한 학교에 근무하는 경우가 있어도 별다른 내색이 서로 없었다.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부여에서 백제중 南允(1911~2007) 교장, 세도초등학교 廷九(1919~1987) 교감, 백제중 誠彩(1932~2010)씨가 왔다. 초대 회장단에 鍾九, 南允, 南敦(1924~1984, 조치원고 교감)씨 등이었고, 간사에 南翼, 南容이었다. 특히 삼부토건의 사립학교인 백제중학교의 南允 교장과 誠彩 선생님은 이 모임의 활력소가 되었고, 오랜 기간 지원군의 역할을 다해 주었다.(감사패 3호, 4호) 재단관계가 있는 삼부토건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자연 중간역할이 있게 된다. 당시 鍾九 회장을 비롯한 南翼, 南容 등의 실무진은 공직생활에 묶여 있었고, 아직 화수회나 또는 보학 등에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던 것이다. 내 경우는 집에 파보가 있었을 뿐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학자인 一平 南權(1928~   )씨는 삼부토건의 여의상사 상임감사로 근무하면서 화수회 총무로서 鼎九 회장을 돕고 있었다. 南允 교장과도 집안의 연결이 깊었다. 南赫 학무국장, 그리고 삼부토건과의 이런 연결은 풍육회의 전망을 밝게 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기총회 및 춘천행 성묘 버스

창립총회 3개월 후에 제1차 정기총회(1975.1.21)가 대전고등학교의 근처인 「증성반점」에서 개최된다. 무려 42명이 모인 성황이었다. 이때 鍾九 회장은 입시관리 때문에 못나오고, 나는 보충수업 때문에 좀 늦었는데 큰 방에 가득찬 인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기총회는 1년에 2회 여름과 겨울의 휴가 중에 개최(제9조)하게 되어 있었다. 임원의 임기는 1년으로 하되 재임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발상의 배경에는 가벼운 친목단체가 그 중심에 있었고, 후에 대집단, 그것도 전국적인 규모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new3-4.jpg제2차 정기총회(1975.8.17)는 부여읍 「전일식당」에서 개최되고, 鍾九 회장이 재선되며, 부회장 증석에 本九(임천국교장)씨가 피선된다. 그리고 고문에 東弼(1919~2000) 고려대 정경대학장이 추대된다. 총회 후 전원 덕림 회양공산소로 가서 성묘하고 끝난다.

다음 제3차 정기총회(1976.1.24)는 유성읍 군인휴양소에서 개최되었는데, 차기 총회는 강원도 춘천시 애막동 소재 회양공 배위(고성이씨)를 성묘하기로 결정했다. 첫 나들이가 되는 셈이다.

①「풍육회보」제1호(1976.5.20)는 3차 정기총회 후에 발행된다(프린트판16쪽) 상철이고 연혁, 임원명단(고문, 이사, 집행부, 지구연락책)이 소개되며 이어 67명의 회원이 나온다. 끝에는 회칙, 입회원서(양식)가 나온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는 ‘우애, 친목, 발전’이라는 3대 지침이 큰 글씨로 나온다.

첫 성묘버스가 움직인(1976.8.21) 당시만 해도 화수회나 우리 문중은 깊은 잠에 잠겨있는 듯했다. 상주를 비롯한 각파 또는 지역의 내왕이 아주 드물었던 것 같다. 6.25전쟁 때 부여, 서천 일가들이 상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서 일가의 도움을 받았다든가, 화수회 東振(1909~1992) 부회장이 전남 강진을 처음 다녀왔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전근대적인 양상은 변화되고 있었다.

南允 부회장의 주선으로 최초의 성묘버스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하루 전날 서울로 집결, 鼎九 회장님을 삼부토건 본사로 찾아뵈었다. 이것은 화수회장에 대한 순수한 예방이었다.

鼎九 회장과 계씨인 昌九(1922~2009) 장남 남욱(南煜, 1932~   )씨 세 분께서는 정중하고도 따뜻한 영접을 해주었고, 기념품과 저녁 식사를 제공, 일행을 환대해 주었다. 내 주변에는 삼부토건에 취업해 사는 분이 많은 편이다. 큰 회사를 하면서도 삼부토건의 일가에 대한 두터운 배려는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new3-5.jpg여관에서 일박한 우리는 춘천을 향해 떠났다. 우리가 탄 명지대 스쿨버스가 춘천시에 도착하자 육림기업사 聖衍(1920~1980) 사장과 南庸(1923~2007) 춘천화수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의 두 분 환대는 다시 한 번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회원 36명 동반가족 9명, 모두 45명이었는데 춘천의 명물 쏘가리탕을 대접받았다.

부여와 춘천은 회양공의 직계 혈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경위는 알 길이 없으나 묘소의 소재로 보아 회양공은 차남(開平)과 함께 부여에 정착하고, 배위인 고성이씨는 그 장남 좌랑공(安平)과 함께 춘천 애막동(석사동)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날 자효재에서 제4차 총회로 들어갔다. 집행부에서 내놓은 회칙개정이 쟁점이었다. 鍾九 회장이 충남대에서 우여곡절 끝에 재임용 탈락의 비운을 겪고 서울외국어대 등에 출강하고 있으므로 ‘충남 한정’의 회원자격을 전국으로 터놓아야 하는 문제였다. “모임이 너무 크면 곤란하다”는 반발이 많았지만 당장 회장의 회원자격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충남’은 곧 ‘전국’으로 바뀌게 된다.

일가분이 가장 많은 충남을 발상지로 풍육회가 출발한 것은 거보의 단서였다. 상주도 일가분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상주교육청 誠仁씨를 통해서 얻은 문중 교원명단은 불과 10여명이었다. 대전 44명, 부여 41명의 회원들과 우선 수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② 제5차 정기총회(1977.1.23) : 유성 금성여관에서 개최함 (회원 54명, 동반가족 5명 참석)

③ 「풍육회보」제2호 발행(1977.5.20) : 프린트판 22쪽, 회원명단 82명등이 수록됨

④ 버스 4대로 경기도 양주군 소재 시조(孟) 산소를 성묘하고 제6차 정기총회(1977.8.14) 이 자리에서 鼎九 화수회장과 南權 총무에게 감사패 수여(감사패 1호, 2호)

⑤ 제7차 정기총회(1978.1.22)가 동학사 계룡산장에서 개최됨. 참석 51명. 이때 수첩식 「풍양조씨 세계도(世系圖)」를 발행하여 배부하다.

이 세계도는 우리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나는 풍육회 일을 하면서 고향의 仁九(1920~2006)씨로 부터 조언을 구했다. 이분은 선친과 가까웠고 세도면장 서리에서 공직을 그만 둔다. 이후 동곡파 종무회장과 덕림종무회장을 역임했으며, 학식과 보학에 남다른 바가 있었다.

나는 이분에게 보학의 필요성과 풍육회의 고민을 전하면서 대전의 규하(奎夏)씨 댁에서 수기로 된 가계도(家系圖) 형식을 말했다. 이에 만들어진 것이  「풍양조씨 세계도」였다. 당시 출판비가 없어 30여만원의 사채를 끌어들여 500부를 발행한다. 당시 인쇄처인 활문상사(양재진)와 나는 가까웠고 프린트도 이른바 명문고고인 대전고교는 진학업무 때문에 유급 필경사를 두고 있어 별도로 이용할 수 있었다.

수첩식 「풍양조씨 세계도」는 가령 호군공파를 북파, 남파로 구분하여 이해한다든가, 회양공파도 춘성파를 시작으로 약 30종으로 표시해 놓은 점이다.

一平 南權 선생은 언젠가 대전화수회의 초청으로 보학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누어준 「풍양조씨 세계도」도 불과 18쪽의 책이었지만, 왕계표를 이해하듯 해서 도움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방대한 족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풍양조씨 세계도」는 수요가 급증해서 판형을 조금 키우고 풍양조씨 5대파를 보완해서 3천부가 다시 발간되었고(1994), 현재도 풍육회에서 판매된다.

仁九씨는 장학금 모금이 시작되자 성금자의 명단이 반드시 보도되어야 함을 나에게 권한다. 그리고 초기에 관계하고 있는 소종중들을 설득해서 종재 첫 케이스로 19명에 32만원을 입금시킨다. 그리고 덕림종무회장 재임 시에는 종재 100만원을 입금시킨다(감사패 10호)

 

new3-6.jpg누가 무어라 해도 一平 南權선생은 우리 풍양조씨 보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보배이시다. 나는 「풍양회보」를 편집하면서 이분의 「보학산책」과 「족보 이야기」를 연재할 수 있었다. 「풍양회보」가 종간되자 「풍양조씨 종보」에는 이분의 「문집총서 해설」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이런 인연으로 一平 선생의 「풍양조씨 문헌고(文獻考)」(오늘의 문학사, 2004)가 풍육회에서 발간된다. 나는 이 책의 ‘발간사’에서 ‘보학연구의 황무지 땅에 첫 보습을 보이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라 하였고 “수백년에 한 분 나올까 말까 한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이 소신에 변함이 없다. 이만한 저술을 예견할 수 있는 기미가 현재도 전혀 안 보이기 때문이다.

⑥ 「풍육회보」 3호 발행(1978.7.3) : 프린트판 26쪽. 역시 상철인데, 77명의 회원명단이 수록된다. 고문단 16명, 이사 19명, 집행부 임원(제3대) 12명, 지구연락책 25명의 명단이 있다. 풍육회가 전국적인 내실을 다지고 있음을 보인다.

3호를 끝으로 「풍육회보」는 「풍양회보」 4호로 개재된다. 연간의 발행물로서 장학금 모금운동의 화려한 첨단을 맡는다.

 

(3) 역사적인 경북 상주 소통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상주의 호군공파는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풍양조씨의 ‘큰집’이라는 자손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풍양조씨 5대파의 분파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려 말 형제분들인 상주 호군공(思忠), 부여 회양공(愼), 해주 금주공(袵)으로 멀리 갈라서게 된 것은 둘째 상서공(思恭)이 요승 신돈에게 죽음을 당하고, 남은 형제들이 구명도생하게 되는 데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가문이 이렇게 분산하게 된 이 내용의 기록은 조선 헌종 때 영의정 운석공(雲石公·寅永)이 쓴 만락재공(晩樂齋公·錫龍)의 묘갈명이 그 처음이라고 一平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밝힌다(74쪽)

이상하게도 호군공은 “묘 실전”이고, 회양공은 “묘 임천덕림 酉坐, 금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이다. 금주공은 “묘 양주 진접면 내곡리 傳道村 壬坐” 등이 족보의 기록이다.

특히 호군공은 장손계가 喜-新玉-璧에서 ‘후예 무고(无考)’ 된다. 이에 비하여 회양공은 安平-開平의 형제 출발로 번창을 보인다.

금주공은 호군공파와 같이 장손계가 昇平-孟孫-暉 등에서 결국 ‘후예 무고’가 된다. 이런 사정은 5대파의 하나인 평장사공파(6권)나 강진 상장군공파(7권)에서도 비슷한 사정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풍양조씨의 대종을 이루는 代言公 염휘(炎暉)의 4자(思忠, 思恭, 愼, 袵) 중 그래도 회양공 자손(부여·춘천)이 번창하게 된 내력이 숨어있다.

호군공(상주)과 회양공(임천)은 그 지리에도 전하여지는 말이 있다. “상주는 장차 부(富)가 많이 날 자리이고, 임천은 장차 귀(貴)가 많이 날 자리”로 알려진다. 특히 회양공의 묘소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곧 선녀가 베틀에서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하여 명소로 알려진다. 이는 조선조 태종의 명을 받들어 무학대사가 잡은 곳이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무학대사를 안내한 회양공의 둘째 아드님인 사옹원정공(開平)의 기지로 임천의 5선영을 얻게 된다.

 

new3-7.jpg곧 덕림(愼), 동곡(開平), 신사동(厚之), 지장동(益祥), 노동(世賢)으로서 모두 명당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군공파 집성촌은 상주에서도 낙동면인데 그중에서도 승곡리와 운평리가 중심일 것이다. 검간(黔澗) 정(靖, 1555~1636) 선조께서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불타버린 옛집의 잔해를 청소하고 재건한 것이 양진당(養眞堂)이며 오작당, 추원당, 옥류정 등이 모두 승곡리에 있다. 검간공의 묘소가 있는 곳도 승곡리이다.

1978년 8월 15일 대전과 부여에서 관광버스 7대가 상주를 찾은 것은 가까우면서도 너무 멀었던 것을 이제는 소통하고자 하는 염원이 거기 있었을 것이다. 성묘도 중요하지만 상주와 부여, 부여와 상주의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誠學(1913~1986), 誠穆(1922~1992), 誠珏(1925~2000, 상주읍장), 誠徹(1914~1989)씨 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영접했다. 우리는 남장리 좌랑공(夏)과 검간공(靖)의 묘소 등을 차례로 성묘하고 양진당을 처음 대할 수 있었다.

양진당은 그 후 풍육장학생들을 입교시키는 조건으로 풍양조씨연수원을 열게 된다.

 

new3-8.jpg이 일은 새마을운동에 경험이 있는 구성사 대표 誠萬(1943~   )씨의 제의였다. 그는 서울에 화수회, 대전에 풍육회가 있는데 상주에도 연수원 하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초창기 적지 않은 시설들을 구입하는 등 그는 사재를 쓰며, 연수원 초대원장을 맡아 육성시켰다.

  나는 장학금 모금 시에 선친 成衍(1914~2005)씨댁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적도 있었고, 그와의 소통에 별다른 애로가 없었다. 그는 장학성금도 쾌척해 주었다(감사패 45호)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장학금 모금은 시간이 있는 鍾九 회장이 전적으로 강행군을 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학교의 근무가 엄연하였으므로 방학 때라야 틈을 낼 수 있었다. 상주는 겨울방학 때 갔는데 마침 종중회의가 있었다. 내가 장학금 모금의 필요성을 말씀 드리고 협조를 당부했을 때 장내가 아주 조용했다.

이윽고 澤衍(1912~2002)씨가 일어나 “지차(之次)에서 하신다니 우리도 해야겠지요” 했는데, 이것이 일종의 승낙표시였던 셈이다.

나는 그뒤 승곡리와 운평리 일대를 몇 분의 안내를 받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1구좌 또는 2구좌를 수금하듯이 받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도 거기서 할 수 있었다. 그뒤 重衍(1943~   )씨 댁에서 자기도 하면서 상주 일대를 모금했는데 중연씨는 연수원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new3-9.jpg어느 해인가 겨울, 나는 운평리 誠徹씨댁에서 자고 이른 아침 길을 떠났는데 얼마 가다보니 낙동강 상류에 이르렀다. 추위에 강은 얼음으로 접강되어 있었다. 초행인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저 아래쪽에서 강의 빙판을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진퇴양난인 나는 결국 강에 들어선다. 사람이 가는 대로 얼음장이 갈라지며 째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소리를 낸다. 거대한 얼음장은 결국 나를 도강할 수 있게 했다. 이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장학금 모금의 험난한 상징이 거기 있던 셈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랬다. “당신이 무어가 부족해서 그러고 다니느냐?”고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랬다. “당신은 일을 안 하면 병이 나는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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