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풍육장학회의 정착(200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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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9-12 17:32 조회121회 댓글0건본문
(재)풍육장학회의 정착(2000~2016)
(1) 풍양조씨 성씨비 건립
1997년 11월 1일(토) 오후에 대전 뿌리공원(중구 침산동 산34)에서 ‘풍양조씨 유래비 및 성씨 조형품’의 제막식이 거행된다. 주최 풍양조씨 대종회, 주관 풍육회였다.
지금 72성씨들의 성씨비가 운집해 있고 전국적인 명소가 된 뿌리공원은 부산, 대구, 서울 등에서 오는 관광버스가 적은 편이 아니다. 여기 오는 분은 자기네 성씨비를 먼저 찾고 주변을 살피곤 한다. 여기에 들어서지 않은 성씨들은 대단한 불만을 토로하며 “우리는 무엇 했느냐?”고 질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뿌리공원은 물이 흐르고 깊은 산 그림자가 드리운 보문산의 끝에 위치해서 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등이 있으며, 대전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 대전시에서는 장소만 제공했지, 이른바 수익자 부담이라는 원칙으로 각 성씨들이 신청해서 성씨비를 건립해야 했다.
우리에게는 처음 대종회로 연락이 가고, 다시 鍾九씨에게도 갔던 모양인데, 아마도 ‘성씨 조형품’이니 하는 것들이 이해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업은 이미 설명회(전국 문중대표자회의 91문중 182명 참석)와 희망 성씨들의 신청도 이미 끝난 뒤였는데 대전 南重 풍전회장이 전화와 함께 설명회 자료를 등기로 학교에 보내왔다. 나는 그해 1월 풍육회 2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청양군 정산고교장으로 나가 있었고 관사생활을 하던 때였다. 다행하게도 신청은 그 기일이 연장되어 있었다.
나는 풍육회에서 이 일을 추진할 도리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청서류에는 비문에 들어갈 ‘풍양조씨의 유래’와 ‘조형품의 조각’의 제시가 급선무였다. ‘풍양조씨의 유래’는 一平 南權선생에게로 즉각 연락이 갔지마는 ‘조형품의 조각’은 조각가를 찾아야 했다.
나는 내 당질 生衍(경남 산청군 간디학교 교감)이가 ‘92 동아일보 미술제에서 조각부 당선을 할 때, 심사위원 3인중 한분이 趙晟黙(1939~ )씨였던 것은 기억해 내었다. 대종회에 연락해서 처음으로 그분과 연결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전업 조각가였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현대조각가 회장, 국전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또 그는 논산시 두계 출신의 평장사공파였다. 일요일 나는 유성에서 晟黙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아주 과묵한 분이었다.
신청서가 제출되고 이어 조각품 설치기금을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전의 풍육회 대전화수회 풍전회 등 3개 단체 임원 모임이 개최되고 모금 안내장 500여통이 발송된다. 이후 대종회 南仁 재무이사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모금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우선 종재가 많았는데 이는 대종회의 배후 지원이 주효한 것이었다. 대전화수회의 300만원을 비롯해서 상장군파화수회, 한산군종중, 귀로헌공김포종회, 부사공종회, 강릉종회, 군산종회, 문의공파 종중 등의 목돈들이 들어온 것이다. 개인 성금도 잇달아 모두 2천 5백여만원이 잡혔다. 그러나 건립비 총액이 모두 3천 2백여만원에 달했으므로 부족분은 풍육회에서 지원해야 했다. 700만원이 소요되었는데 명분이 너무도 뚜렷했으므로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또한 이 성씨비는 사실상 풍육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앞으로 관리가 풍육회에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제막식에서 南仁 재무이사에게는 감사패가 수여된다(감사패 71호)
우리의 성씨비는 큰 댓돌에다가 ‘풍양조씨 유래’와 글(대종회장 조광희), 글씨(조용철, 대구), 구성(조성묵), 주관(장학재단 풍육장학회) 등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댓돌 위에는 조각 예술품인 삼각형 구조의 청동주물이 올라가 있다. 이 작품의 제호는 「메신저 “97 뿌리”」이다.
풍양조씨의 성씨비가 위치한 곳은 비교적 중심지에 있고 안정감도 확보되어 있다. 그런데 조각품이 타성들의 것에 비하여 초라하다는 의견이 잇달았고, 청동조각에는 서릿발 같은 녹이 스는데 이것은 닦아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앞뒤의 여러 성씨들의 조형품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대형 화강석을 이용해서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여 우리의 것은 판판한 댓돌위에 삼각형 형식이 빈 의자처럼 올라가 있다. 다만 그것이 값비싼 청동주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메신저 “97 뿌리”」는 “고대의 시간과 현대의 시간에 서 있는 뿌리”를 상징하는 예술성의 작품인 것이다.
제막식 때 이 일을 주관한 대전시 전성환 중구청장이 와서 “우리가 의도했던 조형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종인들의 의문 제기가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에 풍육회에서는 한 쪽에 “풍양조씨 조형품 해설”을 따로 제작해 놓은 바가 있다.
그리고 청동조각의 녹은 안 닦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청동을 닦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될수록 특유의 아름다운 산화현상이 생겨 권위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그 곳에 들려보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가분이 일부러 오셔서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는 것, 둘레 수목들도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본다. 언제 보아도 그랬다.
성씨비 제막식에 이어 나는 11월 14일 대전 동아공고 재단에서 시상하는 공산교육상(公山敎育賞)을 받는다(상금 500만원). 鍾九 회장이 늘 입버릇처럼 “좋은 일 해야 좋은 일 생긴다”고 했는데, 그런 영광이라고 생각해 본다.
(2) 성묘단 운영
풍육회가 창립되었을 때 자기의 가계(家系)나 내력을 아는 회원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풍양조씨 전체를 이해하는 이는 더욱 적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방면에 소홀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났던 것이다.
나 자신도 사회에 나와서는 핵가족으로 분가되었고, 인사이동에 따라 전전하게 되니 무슨 ‘뿌리’니 하는 것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 일깨워줄 만한 이도 없었다.
풍육회가 조상 산소의 성묘운동을 벌인 것인 본격적인 시작이었고 호응도가 높은 역사현장의 답사였다. 경기도 남양주의 시조 산소를 가보고서야 비로소 ‘孟’ 자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하던 어른들의 말씀을 되살릴 수 있었고 부여의 회양공, 상주의 호군공의 지역을 가보고서야 풍양조씨의 ‘실체’가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초창기에 화수회 총무 南權씨의 해박한 보학강의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이 되어 주었다.
상주를 다녀온 이후 1980년에는 버스 2대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송림리 소재 남원부사(季砰)의 산소를 성묘했다. 평장사공파(臣赫)의 사실상의 실질계보를 이루는 남원부사공의 직계가 사직공파(之孚)와 참판공파(之縝)로서 큰 흐름이 여기서 이어진다. 그동안 ‘남원공파’라고 일러온 이유도 여기 있었다.
화수회 부회장 敦轍(1913~1996)씨의 해박한 보학과 온양종친회장 明載(1938~ )씨 등을 뵐 수 있었다. 특히 明載씨는 풍육회의 장학위원으로서 협조가 많았던 분이다.
그뒤에 성리학의 대가이며 좌의정이셨던 포저공(浦渚公) 익(翼, 1579~1655)을 모신 예산을 돌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 깨끗한 관리와 회의장 등이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의 중심적 위치와 함께 풍양조씨연수원 같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상주에서 말이 먼저 나왔고, 특히 상주는 연수생들의 식사 뒷바라지를 부인들이 돌아가며 헌신하고 있어 칭송이 높은 편이다.
풍육회는 부여군 장암면에 모신 회양공의 재실에서 제1회 풍양제(豐壤祭)를 1박 2일의 일정으로 개최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5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다. 회원들은 회양공 산소를 성묘한 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모임에 들어가 상호인사, 감사패 및 장학금(후기분) 수여, 보학강의로 진행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조반 후 부여읍 관광에 나선 회원들은 박물관, 부소산성, 낙화암을 관람하였고, 백마강 뱃놀이로 절정을 이룬다. 이 풍양제에 부여화수회 南軾 회장은 기념수건 및 뱃놀이의 배 편의를 주선해 주었다.
2000년 여름방학 때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일원 및 상장군공파의 종중을 방문한다. 이른바 뿌리찾기 테마기행으로 관광버스 1대에 34명이 함께 한다. 특히 여기에는 경기도 오산에서 온 시인이자 오산문화원장인 石九(1941~ )씨와 계씨 銀九(동양에스텍 대표이사)씨가 참석했다.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은 石九 회원과 사업에 성공한 銀九씨는 제1회 풍양제 때도 참석한 것으로 기억된다. 銀九씨는 장학금에도 협찬이 많았다(감사패 54호 및 감사장 79호)
강진은 국토의 남단이기도 하고「다산초당」등 유서깊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나는 南祐씨와 사전 답사를 다녀오게 되는데, 그때 昌植(상장군파 종친회장), 康國(나주고교 교무부장)씨 등과 상의를 나누고 온다.
알려진 것처럼 상장군공파는 오래 강진조씨로 써 오다가 풍양조씨로 환관(還貫)해서 대동보에 들어온 것은 5중간보인 무오보(1978)부터였다. 조선 정조 때, 창암공 홍진(弘鎭, 청교파) 강진현감이 도임하여 보첩을 살펴보고 “도강(道康, 파조이신 寶가 道康伯으로 봉해짐)으로 호칭함은 천만부당하다”하고 곧 예조에 통문한 결과 조령(朝令)으로 환본하게 된다.
이번 성묘단은 딴 곳과는 달리 관광분위기가 가미된 여행이 되기도 했다. 집에서 인삼주를 가져온 회원(命九, 대전)이 있어 요긴하게 나눌 수도 있었다.
우리는 먼저 나주시 영산포에 이르러 상장군공파의 중시조 注(대사헌, 호조참판, 충정감사)의 산소를 성묘하고 이어 벽류정을 관광할 수 있었다. 많은 일가분들의 영접과 안내를 받았다.
집성촌인 강진군 성전면의 서울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상호간 인사가 교류되었고, 식사는 사전 답사 때 예약했던 곳인데, 거기 종친회에서 부담해 주었다. 宗進(원로)씨가 맥주 2상자, 承玉(강진경찰서)씨가 음료수, 景太(실업가)씨가 수건 등을 배부해 주어 오히려 폐가 된 것 같았다.
상장군공파 합동제단에서 나는 일행을 대표해서 도포를 입고 헌배했다. 무더운 날씨로 땀이 많이 났다.
康國(1949~ ) 회원은 9대 장손의 종가집이었고, 정원이 넓었다. 수박과 송편을 대접 받았다. 그는 演九(1932~2002)씨, 亨進(나주중부농협지점)씨 등과 함께 전남에서의 주요한 풍육회 인맥이었다.
강진에 있는 김영랑 시인의 생가를 거쳐 무위사(無爲寺)에서 현지 일가분들과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우리는 낙후된 종파입니다”라고 뜻밖에 겸손한 인사를 받고 당황했다. 밤 9시경 대전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 후에 해산했는데, 오산의 石九씨는 오산문화원 朴炳喆씨와 함께 와서 그의 승용차로 올라갔고, 밤 11시가 되어 도착했다는 연락이 있었다. 石九 시인은 그후 시를 발표했는데 ‘無爲寺’가 나온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흔히 말하기를 “대종회는 조상을 위하고, 풍육회는 후손을 위해 일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묘운동은 결코 경시할 수 없을 것이다.
풍육회의 성묘단 운영은 이후에도 제2회 뿌리찾기테마기행(2001.5.12)에 이어 제3회로 이어진다(1박 2일). 제3회 때는 31명이 한산군종중사무실, 주내면 광사리(군부대 내), 금주공, 시중공, 남원공, 포저공, 귀록공, 학암공 산소 등을 방문 또는 성묘했다. 그리고 서울 코리아웨딩홀에서 풍육장학생회 창립총회에 합류하게 된다.
(3) 인가된 재단법인 풍육장학회
2000년 새해가 되면서 현재 풍육회 본부에 부설 형식인 ‘풍육장학회’를 공식법인으로 하고, 교원단체로서의 ‘풍육회’는 해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진다. 그동안 26년간이나 몸 바쳐 왔는데 풍육회의 해산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산해야 한다는 이유 중에는 교원의 정년단축으로 중진들이 줄줄이 물러나야 되는 현실이 컸다. 과연 후진들이 계속 나와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제27차 정기총회(2.27)가 새서울관광호텔에서 열린다. 21기 장학생 21명과 학부모 등 82명이 참석했다. 장학금 수여 후에 정관개정 및 임원선출이 있었다. 모금 시 방만했던 ‘풍육장학회 정관’을 ‘풍육회 정관’으로 흡수하고 임원도 전면 개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집행부의 발의로 시작되어 임원연석회의, 그리고 개정안 소심의위원회를 거쳐 오늘 총회에 상정한 것이다. 이는 기구 조직표로는 부설이지만 앞으로 추진될 재단법인 풍육장학회는 본격적인 운영을 전담하게 되며, 풍육회는 사실상 명목상으로 남지만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이날 나는 회장에 재선되었다. 부회장에 由衍(학봉초교장), 南祐(前 웅천고교), 東吉(공주사대)씨가 되었고, 鍾九씨는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법인 설립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구비서류가 10여 가지를 훨씬 넘었다. 조동주세무회계사무소를 방문하고, 다시 南容씨와 함께 서부교육청 김건중 교육장을 찾았다. 그는 南容씨와 동기동창이다. 홍석세 실무자를 소개받아 정관작성, 구비서류가 구체화되면서 일이 급진전 되었다.
정관은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소관부처 법무부) 및 동시행령(소관부처 교육부)이 그 근거였다. 재단법인 풍육장학회 정관은 총칙, 재산과 회계, 임원, 이사회, 보칙 등 모두 37조로 구성된다. 그리고 별지에 「설립 당초의 기본재산 목록」「현재의 기본재산 목록」「현재의 임원 및 임기」등이 별지로 이어진다.
나는 조동주세무회계사무소를 풍육회 사무실로 정했고, 곧바로 법인설립에 관한 행정업무를 맡긴다. 東珠(1945~2016)씨는 기왕에도 업무관련이 있어 왔고 세무사인 점이 고려되었는데, 작고할 때까지 풍육회 본부로서 손색이 없이 일해 주었다.
조동주세무회계사무소에 在衍, 南斗, 南容, 南祐, 運九씨 등이 모인다. 내가 만든 정관 등 서류에 대한 소심의위원회였는데, 2시간 가까이 진행된다. 관련된 개인들도 이력서, 인감증명서,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신원진술서, 겸직허가서 등이 필요했다.
법인 설립 발기인대회(8.19)를 개최하고 보유금액의 전액을 출연하되 1억은 풍육회의 비상금으로 잔류시키자는 鍾九씨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이 1억은 장학재단에 편입되지 않았다.
그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산75(임야) 7,140㎡를 매입하는데 투입된다. 매입가는 77,760,000원(평당 3,600원×2,160평)이었고, 잔액과 통장은 재무이사가 따로 관리하고 있다.
대전광역시교육감으로부터 재단법인 풍육장학회 법인설립허가서(허가 제642호)가 접수된 것은 9월 19일이었다. 출연금은 10억 2천여만원(1,029,870,002원)이었는데, 서대전세무서장의 고유번호 314-82-07169(2000.10.27)가 교부된다.
장학재단의 법인설립을 하게 된 것은 장학금의 영구적인 보존 때문이다.
「재단법인 풍육장학회 정관」(2000.9.19)은 임원 등에 대한 재산대여 금지(15조)는 물론, 이 법인을 해산하였을 때의 잔여재산은 대전광역시교육청에 귀속된다(34조)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법인의 출연금은 국가의 감독에 묶이는 것이다.
여기서 해산하였을 때의 잔여재산이 대전광역시교육청의 귀속은 “유사한 뜻을 가진 단체로의 이관이 가능한 것”임을 밝힌다. 다시 말하면 풍양조씨 대종회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법인 설립은 다음 해 제28차 연차총회(2001.3.1)에서 정관 및 절차에 대한 추인을 얻는다. 또한「풍양조씨 종보」9호(2000.12.15)에 보도가 되었는데, 출연금의 법정이자(약 연 6천만원)의 60% 이상을 장학금으로 지급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법정이자가 있어 장학생은 항상 30명이상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15명도 어려운 사정이 되었다. 제2기 장학금을 현재 모금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간간 사무실에 들려 결재를 하곤 했다. 내가 오지 못할 때는 직원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거대한 풍랑이 잠잠해진 듯 법인 설립된 후 몇 가지 변화가 왔다.
첫째로 풍육회에 안정이 왔다. 자생단체 26년 기간에는 장학금 모금과 교원단체의 운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격동기였다. 이제 그 시절이 가고 가장 합리적인 장학사업에만 전념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사무실이 있고 상임이사가 배치되어 있다. 매월 약간의 월세를 주고 법인업무의 전반을 맡긴다. 전화료 등 모든 것이 거기서 상쇄되고 있지만, 東珠 상임이사는 그런데 구애받지 않고 같은 일가로서의 사명감과 아량의 깊이가 있었다.
현재의 德衍(1951~ ) 상임이사도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봉사정신과 ‘나의 일’이라는 믿음을 주고 있어 흐뭇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신임 이사장으로 제4대 昭衍(1951~ )씨가 지난 9월 19일 취임했다. 그는 충남교육청 장학사, 부여정보고 교장을 역임했으며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신임 상임이사와 신임 이사장의 취임으로 한층 젊어진 면모를 갖추게 된다.
둘째로 재무에 대한 요지부동의 인식이 심어졌다. 그동안의 자생단체에서는 운영에 불안이 항상 따르고 있었다. 또한 자금이 많아지자 더욱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만일 법인 설립이 안 되었더라면 비록 10억원의 자금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는 것이 돈의 생리일 것이다. 현재 재무 운영은 자체의 감사도 있지마는 감독기관의 연2회 정기적인 감사가 실시된다. 그동안 지적사항이 없었고 가장 모범적인 문중 장학사업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셋째로 이미 예견된 것이지만 풍육회의 조직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풍육(豐育)’ ‘풍양조씨(豐壤趙氏) 교육자(敎育者)’에서 ‘豐’과 ‘育’을 따온 것이고 또한 ‘넉넉하게 기른다’는 장학의지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법인설립이 된 후는 ‘교육단체’로서의 임무는 끝난 셈이다. 장학금 모금운동의 주체로서 그 임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현재 풍육장학회의 운영도 이사 15명가운데 ‘비 교원’이 2명 들어와 있고,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제 풍육장학회는 그 기능이 ‘단체’라기 보다는 우리 문중을 지키는 ‘기관’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취로 인하여 재단법인이 지닌 권위와 출연금의 자산이 우리 문중에 기여한 기쁨을 일가 어른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또한 우리 대종회의 자산이란 풍양빌딩 정도로 아주 빈약한 편인데, 이제부터는 풍육장학회의 정신적·경제적 가치가 우리 풍양조씨의 미래에 고무적인 새로운 빛을 투영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 모두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산인 것이다.
(4) 제2기 모금의 진행 상황
풍육회의 첫 모금운동이 무려 18년(1979.1.4~1998.4.29)이나 소요되었지만, 그 어려운 때의 실제 잡힌 돈은 1억 미만인 66,693,000원(납입자 연인원 1855명)에 그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업금융채권 매입, 부동산 투자, 고금리 시대의 은행예금을 거치면서 목돈을 잡을 수 있었고, 급기야 재단법인이 탄생될 수 있었다.
모금이 끝나고 약 4년간의 휴식과 같은 공백기(1998.4.29~2002.1.28)가 왔다. 재단법인의 기본재산이 당시 11억원인데, 한 문중의 장학기금으로는 초라한 편이고, 그나마 저금리 정책이 펼쳐지면서 장학금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법인 설립(2000)이 된 이후 금리가 그래도 안정적인 때는 장학생 선발을 매년 30명을 유지할 수 있었고, 38명까지 준 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15명 정도도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이에 장학금 규모도 키우고, 저금리의 애로도 타개하고자 제19차 이사회(2009.12.12)에서는 제2기 장학금 모금을 의결하게 된다. 그것은 현재의 장학금을 배증하기 위해서도 10억원은 모금해야 한다는 목표 설정도 했다.
이사들을 비롯한 전 임원 17명을 시·도별로 지역책임자를 배정하였고, 사무실에서는 명함을 모두 만들어 배부했다. 그러나 정년퇴직한 연령들인 데다 사회적 분위기에 젖은 임원들은 막상 때가 되니 나서는 이가 없었다. 鍾九 명예회장도 이미 80세의 연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기 모금의 취지문은 이미 전국에 배포되고 있었다. 결국 임원들은 각자 개인별로 100만원에서 200만원의 개인 헌금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행히 南容 이사장과 東珠 상임이사가 대종회의 부회장으로 선별되어 두 분은 대종회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며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문중의 지도자들과 만나며 홍보할 수 있었다.
제1기 모금이 수많은 사람들의 푼돈으로 모아진 것이라 한다면, 제2기의 모금은 풍양조씨 각파에서 운영하고 있는 종재(宗財)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출구였다.
각 종재들의 기부 현황은 다음과 같다.
① 대종회에서는 회장단회의(2009.2.12)에서 풍육회의 제2기 모금에 전적으로 협조하기로 하고, 이의 확충을 위해 500만원(2009, 회장 哲衍)의 기부를 결정한다. 뒤이어 敦燮 회장은 개인적으로 300만원(감사장 77호)을 내고, 대종회 종재에서 2,000만원(2011)을 납부한다. 그리고 다시 璟九 대종회장은 500만원(2016)을 기부함으로써 대종회의 종재는 모두 3,000만원에 이르게 된다. 이는 대종회의 3대 종훈의 하나인 ‘육영’에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감사장(감사패)의 발급은 1기의 모금 때는 50만원부터였는데 2기에 와서는 300만원으로 조정되었다. 이것은 별도의 대장에 기록되고 연번호가 부여되고 있다.
② 한산군파종회에서는 璟九 회장이 재임 시에 1차 500만원(2014), 2차 400만원(2015)을 기부하였으며(감사장 91호), 다시 洞衍 회장이 300만원(2016)을 납부함으로써 모두 1,200만원의 실적을 보였다. 璟九 회장에 대한 칭송이 높았다.
③ 자효회(춘천)에서는 성면(誠冕) 회장이 1,000만원(2015)을 보내 주었다(감사장 81호) 誠冕 회장은 육림기업 聖衍 회장의 큰 자제이기도 하다.
④ 풍양군파 종회에서는 南龍 회장이 1,500만원(2011)을 쾌척해 주었다(감사장 86호) 풍육회의 東珠 상임이사는 풍양군파이며, 종회의 감사로 오래 재임했다.
⑤ 장수공종중에서는 南珏 회장이 2,000만원(2012)을 협찬해서 많은 칭송이 높았다(감사장 88호)
⑥ 평장사공파의 동추공파종회에서는 돈빈(敦斌) 회장이 1,000만원(2010)을 협찬했다(감사장 80호) 또한 평장사공파 평택종중 50만원(2010)과 부산 장림종회의 200만원(2010) 등의 입금이 있었다.
⑦ 회양공파 주부공파(승종종친회, 음성파)에서 南宣 회장(경기 이천)이 500만원(2011)을 기탁해 주었다(감사장 84호)
⑧ 부여에서는 회양공종무회 南暾 회장이 종재 300만원(2010)을 비롯하여 자신도 100만원(2010)을 냈으며, 동곡파종무회 100만원(2010) 등의 헌금이 있었다. 또한 동파 안세종중에서 300만원(2011) 그리고 장령공종무회 200만원(2010), 우후공종무회(신리파) 50만원(2011) 등 모두 1,050만원을 협찬해 주었다.
그 외로 일일이 거론하지 못하지만 금주공(부산, 남양주), 상장군종회(전남 강진), 호군공 부사공종회(서울), 귀로헌공파(김포) 등의 여러 곳에서 성의있는 협찬이 있었다.
개인 헌금을 보면, 우리의 종가(풍양조씨의 노래)를 작사한 昌九(전북 익산)씨가 300만원(감사패 75호)을 보내 주었다. “천마산의 정기가 빼어난 곳에/한 줄기 피로 맺은 빛나는 전통/명문의 풍양인 긍지를 살려/한 마음 한 뜻으로 굳세게 뭉쳐서/풍양문중 깃발을 높이 날리자”(종가 1절)는 종가는 언제 보아도 가슴을 뛰게 한다.
현재 풍양조씨연수원(상주)에서 연수생들이 배우며 부르고 있다.
부산해운대산부인과 성항(誠項) 병원장도 300만원(감사장 85호)을 보내 주었다. 개인성금은 압도적인 종재에 밀려 적은 편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제2기 모금은 현재 진행 중이다. 편의상 현재까지의 입금(2002~2016) 상황을 보면 2억 4천 7백여만원(247,125,000원)이 되고 있다. 시대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1기 때의 6천 6백여만원에 비하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억 4천 7백여만원의 효과는 1기 때와는 매우 다른 것 같다. 1억원은 법인의 자산에 증액조치를 해서 현재 12억이 되었지만, 나머지의 돈은 법정 이자에 의한 학생 수가 자꾸 적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투입되고 있다. 30명 이상씩 주다가 인원을 갑자기 줄이기가 난감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 제2기 모금에서는 이미 배출된 장학생들의 성금이 새싹을 보이며 나타난다. 학부모들의 헌금도 잇달았다. 아직 많지 않은 편이지만, 이번 2기 모금에서 약 10% 정도의 기여도를 보인다. 그 내역을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장학생들의 성금현황
순번 |
이름 |
성금 ( 연도 ) |
기별 |
거주지 |
비고 |
1 |
趙弘衍 |
1 차 50,000(2002) 2 차 500,000(2010) |
2 기 |
인천 |
|
2 |
誠侃 |
1,000,000(2002) |
7 기 |
포항 |
|
3 |
廣衍 |
2,000,000(2009) |
18 기 |
포항 |
|
4 |
明珠 |
30,000(2010) |
19 기 |
김포 |
|
5 |
徹衍 |
2,000,000(2010) |
1 기 |
서울 |
|
6 |
美貞 |
50,000(2010) |
25 기 |
춘천 |
|
7 |
玲蘭 |
500,000(2010) |
11 기 |
대구 |
|
8 |
南燮 |
1,000,000(2010) |
13 기 |
서울 |
|
9 |
哲雄 |
5,000,000(2010) |
6 기 |
광주 |
감사장 82 호 |
10 |
浚熙 |
1 차 2,000,000(2011) 2 차 1,000,000(2015) |
1 기 |
서울 |
감사장 90 호 |
11 |
誠基 |
1,000,000(2015) |
19 기 |
안양 |
|
12 |
卿敦 |
1,000,000(2016) |
2 기 |
대전 |
|
13 |
義衍 |
500,000(2016) |
6 기 |
서울 |
|
계 |
17,630,000 |
|
|
|
② 학부모들의 성금현황
순번 |
이름 |
성금 ( 연도 ) |
기별 |
거주지 |
|
1 |
趙誠杰 |
100,000(2002) |
22 기 明熙 父 |
광명시 |
|
2 |
南淵 |
500,000(2002) |
19 기 洧旼 父 |
서울 |
|
3 |
誠三 |
50,000(2003) |
23 기 民在 父 |
부산 |
|
4 |
光九 |
100,000(2004) |
25 기 珉智 父 |
의성 |
|
5 |
文九 |
50,000(2010) |
29 기 慧娟 父 |
부산 |
|
6 |
汀權 |
100,000(2016) |
37 기 예린 父 |
서울 |
|
계 |
900,000 |
|
|
|
여기 새싹들은 우리 문중의 발전을 위한 세력의 근원이요 활력소 바로 그것이란 점에서 흐뭇한 바가 있다. 이 우수집단의 등장과 그 배양되는 생명력은 문중의 지평선에 그야말로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빛이다.
제2기 모금은 우리 임원들이 일일이 찾아다니지도 못했다. 그러나 제1기 푼돈 때의 깊은 공감대가 문중의 지하수로서 흐르고 있으며, 그 결과 종재를 비롯한 헌금이 제2기 모금의 특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자리를 빌어 물심양면을 가리지 않고 거룩한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일가 어른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함께 하고자 한다.
(5) 장학생들에 대한 추수지도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학생 배출이 어느덧 37기까지 652명(지급총액 9억 3천 7백 4십만원)에 달한다. 우리 문중에서 공부를 잘하고 장래성이 있는 이들은 크고 작은 나라의 동량재이다. 장학회에서 매년 배출되겠지만 이에 못지않은 것이 장학생들에 대한 추수지도(追隨指導)라고 하겠다.
처음 1기에서 5기까지 35명이 배출되었을 때, 양진당(풍양조씨 연수원)에서 ‘풍양샛별회’(84.7.29) 발족되었다(「풍양회보」11호 53쪽). 그때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 장 浚熙(1기) : 중소기업은행 은행장 비서실(상주)
부회장 承衍(1기) : 서울대 의대 본과 2년(대전)
昌衍(3기) : 연세대 공대 건축과 3년(대전)
총 무 政衍(5기) : 서울대 자연대 천문학과 1년(서울)
재 무 承衍(5기) : 서울대 자연대 수학과 1년(공주)
섭 외 南鍾(5기) : 충남대 경상대 경영과 1년(대전)
아마도 연수원에 5기(6명)가 입교하면서 거기서 추진이 된 것 같다. 연수원에 입교하게 되면 장학생들이 4박5일을 함께 생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샛별’이란 이름은 내가 제시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모임은 아무 후속활동이 없이 끝난다(아마도 저희들끼리는 개인적인 친분 활동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직 자기 토대가 없는 학생 또는 청년 시기이고, 그것도 지역이 전국적이어서 어떤 구심점이 전혀 없는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장학생들이 양진당에 입교하는 것은 저희들이 친분을 쌓는 유일한 첫 경험이고, 또한 이 시기 ‘기별(期別) 모임’이 탄생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기회가 된다. 이 기별 모임이 모여 또한 전체 모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풍양회보」 4집(2002.4.20)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에 진출한 장학생들(1~16기, 114명)과 학업에 전념하는 장학생들(17~23기, 148명)로 구분하여 보도가 나간다. 성별, 연락처, 전화 등으로 명단이 잡힌 이 보도는 최초의 장학생 근황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명단에 이어 ‘출신 회원’에서는 개인별 신상기록과 사진이 제시되었다. 가령 1기인 徹衍(삼화세무회계), 浚熙(중소기업 동경지점장), 2기 誠仁(테마피부과), 盛玉(내과의원), 3기에는 昌衍(삼성물산), 南浩(철학박사)씨 등 화려한 성장기록이 보이는 명단 45명이 실렸다. 이것은 당시 풍육회에서 집약이 되는 것에 한하여 수록된 것이다.
장학생들에 대한 풍육장학생회 창립총회(2002.5.11)가 서울 코리아웨딩홀에서 열린다. 이때 제3회 뿌리찾기 테마기행(1박 2일)의 성묘단과 합류하여 상견례도 함께했다. 창립총회에서 회장 徹衍(1기), 부회장 誠鉉(5기, 한전KDN), 사무국장 德衍(10기, 법무법인 인슈로 송무국장) 등이 선출된다. 풍육장학생회 정관도 채택 통과된다.
장학생들에 대한 정리는 「풍양요람」 5집(2009.2.25)에서도 이어진다. 제3부 ‘장학생 현황’을 보면, 사회에 진출한 장학생 261명(1기~23기), 학업에 전념하는 장학생 194명(24기~29기)으로서 총 455명의 명단이 나온다. 총인원은 본래 462명이었는데, 선발무효 또는 자진 포기자 7명이 발생, 455명임을 밝힌다.
「풍양요람」 5집에는 임원 및 정관, 또한 대전광역시지회의 임원 및 회칙도 실려있다. 초대 임원에 이어 2대 임원에는 회장 德衍(10기), 부회장 德熙(3기), 사무국장 南燮(13기, 아크로유비센터), 그리고 3대 임원에는 회장 昌衍(3기), 부회장 德熙(3기), 사무국장 南燮(13기), 4대 임원에는 회장 南燮(13기), 부회장 誠鉉(5기), 사무국장 衍(12기, SKC)씨 등의 명단이 나온다.
대전광역시지회는 중구 효문화마을 세미나실(2008.8.30)에서 개최되어 회칙을 통과시키고, 초대 임원을 선출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 彩衍(4기, CS유통 구매부), 부회장 正熙(7기, GS칼텍스), 誠喜(17기, 직업훈련원 교사), 사무국장 蕙蓮(20기, 경력개발연구소), 감사 文珠(19기, 번역업무), 根沃(21기, 스타벅스 바리스타)씨 등이었다.
장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한 후 형편에 따라 장학금을 내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또 부모들이 권고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리곤 한다. 浚熙(1기), 徹衍(1기)씨 등은 크고 작은 협찬이 이미 많고, 哲雄(6기, 광주)씨는 500만원을 보내왔다(감사장 82호). 기타 장학생들의 성금과 그 학부모의 성금이 잇달으고 있으며 큰 힘이 되고 있음을 밝힌다.
장학생들의 이런 경향은 풍육장학회의 또 하나 밝은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장학금은 소비성의 경향인데, 문중장학금은 ‘갚음의 성격’있는 것 같다. 그것은 불멸의 어떤 빛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풍육장학생들에 대한 추수지도는 무엇보다도 풍양조씨연수원의 입교조치라고 하겠다. 현재 장학금의 반은 대전 효문화마을 대강당에서 열리는 수여식에서 장학증서와 함께 수여되지만, 나머지 반은 여름방학에 열리는 양진당으로 임원들이 가서 수여한다. 장학생들은 4박 5일의 일정을 소화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는 양주의 시조산소와 견성암을 거쳐 해산된다.
지금은 핵가족으로 가정교육이 사실상 어려운 때, 연수원의 일정과 내용은 평생에 얻기 어려운 경험이다. 돈을 주고도 갖기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풍양조씨 역사와 현재의 5대파 계보(보학강의), 계촌(計寸) 따지기, 일반예절 등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는가.
나는 3남매를 한꺼번에 입교 시켰다.
연수 후 큰 아이(딸)는 스스로 서울 고모님댁, 인천 큰아버님댁에 가서 하룻밤씩 자고 왔다. 또 저희들끼리 “우리 시조는 문무겸전하신 분”이니 하는 말을 듣곤 했는데, 요는 아이들의 중심에 돈친우애의 정신이 깊이 스며있다는 사실이었다.
장학생들에 대한 추수지도는 현재도 아직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장학생회 임원이 장학금 수여식이나 풍양조씨 연수원에 몇 사람 나오곤 하지만 장학생회의 무궁한 토양은 이제 첫 삽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풍육회에서 손잡아 일으키곤 했지만, 언젠가는 자력과 자생의 능력이 그 토양에서 자라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사회적 성장기가 안정기에 있을 때라야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 풍양조씨의 이들 선진 그룹은 앞으로 대종회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미구에 그들에 의하여 형성될 것으로 믿는다. 문중의 깊고 거대한 구심점이 그들에 의하여 발전될 것이다.
맺는말
지금까지 풍육장학회가 교육자들의 창업 횃불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펴고, 그 합리적인 자금관리에 힘입어 마침내 우리 풍양조씨의 재단법인 풍육장학회가 탄생되었음을 말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초유의 모금운동, 그것도 푼돈을 모으는 것이어서 실패할 위험성이 있었던 것인데 다행히 성취되어 우리 문중에 어엿한 ‘기관’이 정착된 것이다.
이러한 저력은 누구 한 두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일가의 한 분 한 분들의 뜻과 정성이 모아진 ‘풍양조씨 저력’의 결과인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손을 벌렸을 때, 아무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면박을 주는 일이 없었다. 1차 내고, 다시 2차 내고, 어떤 이는 다달이 내고…50만원을 내고도 다시 내고, 각종 종재를 아껴 거기서 떼어내고, 사실 종재의 비중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국가, 사회, 가정에 모든 발전의 기초는 교육이다. 우리 풍양조씨의 종사 가운데 이처럼 막중한 것은 없다. 대종회의 종훈(宗訓)도 숭조(崇祖), 돈친(敦親), 육영(育英)으로 되어있는 데도 ‘육영’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우리 손으로 우뚝 선 풍육장학회가 적으나마 임무를 다 할 것이다. 장학생도 500명 또는 1천명, 아니 끝없이 뻗어갈 것이다.
현재 우리의 표어는 “좋은 희망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라고 하겠다.
앞장에서 서술하였지만 차츰 수가 많아지는 장학생들에 대한 추수지도가 막중함을 다시 제기하고자 한다. 그들은 상호간의 연락도 안 되고 사회적, 가정적 안정기에 이르지 않았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성취가 있는 법이다. 장학생들 그 집합체는 곧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인 것이다.
이 글은 우리 문중에 드리는 하나의 보고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풍육장학회는 법적 보호 밑에 장기적인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하나의 ‘기관’이다. 성금을 주신 방명록의 연인원 2천여 명을 비롯하여 장학금을 받은 학생 그리고 받고자 하는 학생, 그 학부모, 그리고 유명무명의 수많은 일가어른들께 드리는 보고문인 셈이다. 이러한 우수 성공사례가 더욱 많아졌으면 하며, 우리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빌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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