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중간보(경자보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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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ma01.png 사중간 발문(四重刊跋)

 

풍선군豐善君 동만東萬1)

무릇 보譜라는 것은 보(普; 넓다)란 뜻으로서, 널리 제족諸族들이 모여서 보첩譜牒을 만드는 것인데, 대개 “친족간에 돈친敦親의 정을 우선으로 쫓는 것에서(追先敦族之誼)” 유래한 것이니 이것이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다.

 

그런데 주周 나라 관가官家에서 소목昭穆을 변별한 것이나, 한漢 나라 사기史記에서 세가(世家; 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지위에 있거나 특권을 누리는 집안)를 나열한 것은 다만 직계만을 칭하고, 그 동족들을 합보合譜하지는 않았다. 진晉 나라의 왕王씨와 사謝씨, 당唐나라의 우牛씨와 이李씨는 비록 거대한 문벌이라 칭하면서도 그 또한 동족(同族)들을 합보하지는 않았고 송대宋代 노천(老泉; 蘇洵)2) 에 이루어서 비로소 소씨족蘇氏族을 합보合譜하였다.

우리나라를 돌이켜 보건대 신라와 고려를 거치기까지는 족보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조선의 중엽中葉 전후에 사부가士夫家에서 간혹 족보를 하더니 지금에 이루어서는 크게 번성하였다. 위로는 근원을 찾고 아래로는 류파流派를 따라 계파系派를 기록하여 언제나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소원疏遠한 사이가 친근하게 되었고, 조상을 받들고 친족 간에 서로를 거두며 풍속風俗을 돈후敦厚하게 하였으니 효제지심(孝悌之心;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友愛)의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고 돈목지의(敦睦之義; 정이 두텁고 화목해야 할 바른 도리)가 자연히 나타났다.

 

무릇 우리 풍양조씨(豐壤趙氏)는 맑은 덕행을 세습(世襲)하고 관면(冠冕; 벼슬)과 훈업(勳業; 큰 공로가 있는 사업)의 자취가 잇대어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가업을 이루었다.

선대의 뿌리가 오래되고, 자손이 번성함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며,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가 나신 것은 선조께서 오래 쌓으신 음덕일 것이니(沙麓之祥由於先庥之積累)3)” 아! 성대한지고! 옛말에 이른바 「덕후유광(德厚流光; 덕이 두터워 광채가 흐르고 즉 자손이 번성한다는 뜻)」이라는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로다. 그런데 만일 세대가 점점 내려가 문헌이 없어 증거를 대지 못하게 된다면, 자못 앞으로 덕박유비(德薄流卑; 덕이 두텁지 않아 자손이 번창을 못한다는 뜻) 한 자들과 더불어 귀착歸着하는 바가 같게 될 것이니, 그 선조들이 수치스럽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 조씨 세보는 창강공(滄江公; 涑)으로부터 창시되고 여러 종장宗丈들의 윤문潤文을 거듭하며 신해년辛亥年에 간행되었다. 경진년庚辰年에 재간再刊되었고, 병술년丙戌年에 3간三刊 되었다. 지금은 병술년으로부터 근 100년이나 흘렸다. 그동안 파가 갈리고 가지가 무성하여 흥興한 가문家門도 많고 쇠衰한 가문家門도 있다. 그러나 편수編修한지 오래되어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가 차츰 잊게 되면 장차 서로 무관하게 보기를 남을 보듯이 할 것이니 그 후손된 자로서 땀이 날 정도로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여러 족인族人이 불현듯 나라가 국난을 당했을 때 의병義兵을 일으키듯, 족보편성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편집하여 집안의 돈독한 역사를 만들었음은 몇 해를 두고 못 하던 일을 이제야 이룬 것이다. 뒤에 낳은 자손들을 갖추어 등재하고, 내세來世에 고신(攷信; 상고할만한 징표)할 근거가 있게 하였으니 이 어찌 오종吾宗의 큰 다행히 아니겠는가! 고심하고 분주하게 노력한 바가 충실했다고 말할 만하다. 더욱이 규모와 절목節目이 전보다 더욱 상세함에 있다.

 

아아! 덕업德業을 서로 계승하여 백세百世가 되어도 변함없이 길이길이 이어가게 되는 것은 선조先祖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감히 공경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모두 우리 같은 족보에 실린 사람들은 스스로 자조自助하길 바라며, 내세來世의 가르침으로서 추선지성(追先之誠; 조상의 뒤를 잇는 정성)과 유후지도(裕後之道; 후손의 넉넉한 도리)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되고, 우리 선조의 물의 발원지發源地처럼 굳건하고 근본이 있는 뿌리에 대한 보답이 앞으로 쇠락하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보첩譜牒이 이루어지자 여러 종족宗族이 나에게 후세에 소시昭示할 것을 위촉하고자 왔다. 나는 진실로 글 쓰는 일을 못 하긴 하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그 대강의 줄거리를 추려서 말미末尾에 쓰는 바이다.

경신년(광무 4년, 1900) 5월

 

 

[원문]

四重刊跋

夫譜也者 普也 普合諸族以 爲譜牒盖 由於追先敦族之誼 此乃士大夫家 所以修譜者也 周官之辨昭穆 漢史之列世家 只稱繼序 而不譜其同族 晉之王謝 唐之牛李 雖稱巨閥 而亦不譜同族 至宋之老泉 始譜蘇氏之族 若稽東方 則歷羅麗未聞有譜 我朝中葉以來士夫家間或爲譜 至于今大備 其所溯源 沿委列錄系派 瞭然常目 則疏者親遠者近 尊祖收族以 厚風俗 孝悌之心油然而生 惇睦之義自然而著矣 凡我趙氏豐壤 爲貫世襲淸德 冠冕勳業接武隆赫 史乘所載班班可考盖 其源派之久 子姓之蕃 甲於我東 而沙麓之祥由於先庥之積累 於休盛哉 古所謂德厚流光者信不誣矣 若夫世級漸降 文獻莫徵 則殆將與德薄流卑者 同其歸焉 其爲先貽羞何如也 我趙世譜 自滄江公創始 繼之以諸宗丈增潤得以 刊行於辛亥 再刊於庚辰 三刊於丙戌 今距丙戌爲近百年矣 其間 派分枝茂興替多門 編修旣久先懿浸沫 將至如路人之相視 則爲後承者不亦汗顔之甚乎 於是諸族人 慨然倡議 蒐輯成編 以作私門之敦史 幾年未遑之事 今乃克擧 而子孫之後生備載 來世之攷信有據 此豈非吾宗之大幸耶 其苦心勤力可爲健矣 又況規模節目 視舊而加詳者乎 嗚呼德業相承 百世而不替綿綿繩繩者 莫非先祖賜也 敢不敬乎 凡我同譜之人以 是自勗 又以詔來 則追先之誠 裕後之道可爲兩盡 無懷 而我祖 發源固本之報 且將未艾豈不韙哉 譜旣成 諸族屬余昭示後來 余固不文然義 不敢辭撮 其大槩書之于尾

庚子仲秋後孫嘉義大夫前行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豐善君東萬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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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46~  . 자는 군필(君必). 철하(徹夏)의 아들, 1874년(고종 11) 증광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9년 풍선군(豐善君)으로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등과 함께 거국대동(擧國大同)의 논의를 청하였고, 189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영희전(永禧殿)의 제조 등 궁내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왕실의 의례를 주로 담당하였다.

2) 1009~1066. 자 명윤(明允). 호 노천(老泉)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문학자.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졌다. 정치, 역사, 경서 등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으며,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다. 주요 저서에는 『시법(諡法)』,『가우집(嘉祐集)』 등이 있다.

3) 사록(沙麓)의 상서(祥瑞)는 선대의 미덕(美德) 누적되었다는 뜻이다. 곧 이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탄생은 선조께서 오랜 적덕(積德)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사록지상(沙麓之祥)의 사록(沙麓)은 사록(沙鹿)으로도 쓰며,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한 지명인데, 옛날 사록(沙麓)이 무너지니 사관이 성녀(聖女)가 날 상서로운 징조라 점(占)을 친 돼서 후비(后妃)가 난다는 뜻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