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중간보(경자보 1900년)

(아래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통 문

서 문

발 문

범 례

 

 

글자작게 글자크기 글자크게

본문

ma01.png 사중간 서문(四重刊序)

 

간산幹山 병필秉弼1)

우리 조씨는 성姓을 받은지 천여 년 동안에 문호門戶가 번창하고 벼슬이 혁혁赫赫하여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명공거경(名公巨卿; 정승, 판서 등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으로 국내에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조상을 받들고 종족 간에 돈목敦睦하는 미풍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이 모두 따지고 보면 선대에서 대대로 쌓아온 덕업德業이 후손들에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족보는 모두 3회에 걸쳐 중간重刊하였으니 초기에 삼가 알리고 절목(節目)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모두 선배들의 서발문序跋文에 실려 있다. 병술년丙戌年부터 현재까지는 75년이 되는데 역사役事는 엄청나고 역량은 부치는 일이라서 쉽사리 계간繼刊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후대 사람들의 생졸生卒·가취嫁娶·사환仕宦·행적行蹟은 앞으로 문헌으로 밝힐 수가 없게 될까 걱정이다. 많은 종인들은 이를 크게 두려워해 왔다. 이에 전국에 있는 모든 종인들의 중의衆意를 모아 서울과 지방 각지에 통지문을 보냈더니 어느 파도 호응하지 않는 분이 없었다. 기꺼이 종원들은 동참하며 각기 재원을 모아, 다 함께 이 역사役事를 도왔으니 거의 1년 만에 완간을 보게 된다. 전번 족보보다는 몇 권이 늘었다.

 

그동안 널리 숨어 있는 자료를 찾아내어 추가로 보완하고 이어 기록한 것은 마치 한 뿌리의 나무가 가지와 잎을 연결하고, 바다로 흐르는 물이 원천과 지류가 서로 연결된 것과 같이 파의 계통이 상세하고, 종법을 바르게 세웠다. 규모와 제작을 한결같이 전 족보를 기준으로 한 것은 또한 선배들의 정교한 기획을 따르려 함이다.

 

이제 우리 조씨 족보가 다시 전국에 배포가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족히 공경심과 효성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이 어찌 다행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족보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할 자격도 없는 병필秉弼이지만, 모든 종인들의 솔선해준 성의에 힘입어 이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서문序文의 부탁 또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아!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은 그 지성知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성을 실천한다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일상의 도리에 벗어나는 일이 있겠는가? 제통(祭統; 禮記 卷之二十三의 篇名)에서 말하기를「선조가 선행하였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분명分明한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알면서도 이어받아서 전하지 못하면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하였다. 나는 예기를 읽다가 이에 이룰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은 적이 없어 탄식하기를 「위대하도다! 성인聖人께서 인효仁孝의 도를 천하에 넓게 전파하심 이여!」 인仁이란 것은 오덕(五德; 仁·義·禮·智·信)의 우두머리요. 효孝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인데, 부모는 나를 낳으신 분이요. 선조先祖는 부모가 태어난 줄기이니 비록 백대百代가 지난다고 하더라도 관계를 멀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거주居住를 달리하고 파派가 갈려 소원疏遠한 사람들도 맨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이었으니 진실로 우리들의 조상을 받들고 소원疎遠한 일가와 돈친敦親하려면 족보가 아니고 무엇으로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옛날에 사람을 육행(六行;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으로 교육하데 목인睦婣이 효제孝悌의 다음에 자리한 까닭이요. 후세後世에 족보를 만드는 연유緣由가 된다. 무릇 우리의 제종諸宗은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이어받아 대대로 퇴보하지 않도록 하기를 오늘날 이 족보를 단호히 간행하듯이 한다면, 인효仁孝의 도道에 가까워지니 선조는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시경詩經에서 이르지 않았던가! 「효사孝思를 길이 말하여 효사를 법칙으로 삼아라!」 하였고, 또「바라건대 밤낮으로 조심하여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 보책譜冊에 수록된 여러 군자들은 다행히 이를 도모圖謀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자년(1900년) 4월 상순

 

 

[원문]

豐壤趙氏世譜四重刊序

我趙 自受姓以來 千有餘禩門戶繁昌 簪組烜爀 文章道德 名公鉅卿 傑然爲國中之望 其所以尊 祖述 先敦宗厚俗莫非我 先世積累之德 有以啓後裔承述之美 吁其盛矣 族譜凡三重刊 而刱始之勤節目之詳俱載 諸先輩序跋 自丙戌 至今七十五年 役鉅財絀未克繼刊 後生之 生卒嫁娶仕宦行蹟將至文獻無徵 諸宗之庸是大懼者久焉於是乎 遠近諸宗衆議歸一 馳書于京外各派 莫不響應 而樂赴各鳩其財共相是役年 幾週而工告訖視 前譜加增者幾卷 其博訪廣搜 追補繼錄者 有如根柢之木聯其枝葉 朝宗之海匯其源委 派系詳而宗法明 矩模制作一依前譜者 亦遵先輩之精徵也 從此吾趙之譜復將廣布 於世使覽者足以起敬起孝 斯非幸也 哉以秉弼之無能爲役 亦賴諸宗述先之誠得以與聞其事又屬以序事之筆 亦未敢辭 噫人之所以靈於物者以 其有知也 欲致其知 豈有外於彛倫常行之事乎 故祭統曰 先祖有善 而不知不明也知 而不傳不仁也 余讀禮 至此未嘗不惄然歎曰 大哉聖仁之推廣仁孝之道 於天下也 夫人者五德之首 孝者百行之源 而父母者生我者也 先祖者父母之所自出也 雖百世不可忽忘焉 且異居分派之疏遠者 其初則乃亦一人之身也 苟欲尊自出親疏遠 則非譜奚以哉 此古昔所以敎人六行 睦婣居孝悌之次 而後世族譜之所由作也 凡我諸宗含訓事嗣世世勿替如 今日此譜之斷然刊行 則幾於仁孝之道 而有光於先祖矣 詩不云乎 永言孝思 孝思維則 又曰 庶幾夙夜無忝爾所生 譜中諸君子 幸有以圖之也

 

庚子肇夏上澣後正憲大夫前行司憲府大司憲兼同知成均館事秉弼謹書

 

 

 

<>

1) 1835∼1908. 자는 성필(聖必), 호는 간산(幹山). 구영(龜永)의 아들, 1871년(고종8) 황감제문과(黃柑製文科)의 병과에 급제, 이조참의·대사간·좌승지·홍문관부제학 등을 거쳐 1892년까지 병조·이조·형조· 공조의 참판을 역임, 1902년에는 1904년에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었고, 1907년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가 되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