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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세보삼중간서(豐壤趙氏世譜三重刊序) |
이조참의 조경진(趙經鎭)1) 씀
우리 풍양세보豐壤世譜는 창강공(滄江公; 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발행은 여러 원본을 참고하고 수정하여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발간하였다. 이는 나의 선조 동강공(東岡公; 相愚)께서 못다 이룬 뜻을 귀록공(歸鹿公; 顯命)께서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경진년(영조 36년, 1760)에 무주공(茂朱公; 祉命)과 영호공(永湖公; 曮)께서 함께 중간할 것을 발의하며, 이에 덧붙이고 윤문하여 배포하였는데 범례가 바르고 엄격하며, 절목節目이 섬세하여 「많은 가문 중 가장 잘 되었다」는 명성을 얻었다. 양파의 선배들께서 근본을 찾아 돈친敦親을 기한 의의意義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되었으니 이 또한, 후손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경진년庚辰年으로부터 현재 60여 년이 지나지만,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며 생졸生卒, 혼가婚嫁, 과환科宦 등 인사상의 변동사항을 수정할 겨를이 없었다. 또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고증할 자료가 없어지면 중국의 성남두씨城南杜氏2) 같이 실로 혈족血族 간에 왕래가 어렵게 되고, 미주소씨眉州蘇氏3) 와 같이 자기 부조父祖만 숭배하게 될 것이니 많은 종인은 서로 만날 때마다 걱정이 많았다.
이에 여러분의 의견을 집약하였으며, 단자單子를 거두고 재정을 모아 영호공의 손자 인영寅永씨에게 위임하며 주관토록 하였지만, 사업이 방대하고 너무 힘에 부쳐 쉽사리 착수하질 못하였다. 그러나 인영씨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나가게 되자 곧바로 편집과 정서精書를 착수하고 비용을 출연하여 동독(董督; 독촉하고 격려함)하였다. 또한, 옛 규약을 참고하여 세보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롭게 주註를 첨가하여 글의 번잡함을 줄였으며, 너무 상세하고 간략함을 조절하여 궐루(闕漏; 빠져 없어짐)를 최소로 하였다. 이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종중宗中의 행복이다. 이는 경상감사께서 선조의 업적을 이어받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니「능이 그 가문을 빛냈다」라고 하겠다.
우리 세보는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모두 경상감영慶尙監營에서 인쇄가 되었다. 마치 사업이 때를 기다린 것만 같다. 족보가 되고 안 되고는 우리 종중의 성쇠盛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이를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아아! 하나의 생명이 서로 전승되어 종파宗派가 번성하고, 여러 자손이 혜택을 받아 벼슬이 빛나고 있음은 우리 조상께서 적선積善한 음덕蔭德이 아닌 것이 없다. 본관을 같이하는 여러 종인들은 모두 부지런히 노력하여 우리를 낳아준 조상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며, 이를 우리 자손들에까지 물려 주어 계계승승繼繼承承 끊임없이 더욱 번창을 시킨다면 보첩譜牒을 증수增修하는 일도 쇠퇴하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보역譜役이 완료되자 나에게 머리말을 부탁하여 이에 넘치는 일임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개요를 위와 같이 약술하여 거듭 기축祈祝하는 글로서 모든 종인을 위하여 드리는 바이다.
병무년(순조 26년, 1826) 6월 상순
豐壤趙氏世譜三重刊序 我趙氏世譜 自滄江公始 其役至英廟辛亥參互諸本付之剞劂 此吾先祖東岡公未卒之志 而歸鹿公成之 越三十年庚辰 茂朱公曁永湖公 相與倡議重刊 乃添潤而廣布之 其義例精嚴 節目纖悉 號爲諸家之最 兩派先輩 原本敦親之意 於斯益盛 而亦後承所可監法者也 今去庚辰六十有餘年 子姓愈益蕃茂 生卒婚嫁科宦人事之變 有未遑續補者 且世代寢遠 攷證愈晦 城南之杜實 難於通族 眉州之蘇 偏隆於繼禰 每諸宗相對 爲憂滋多 乃以僉議所同 收單鳩財屬 永湖公之孫寅永甫幹之顧 事鉅力綿 未易興役及 寅永甫按嶺節即就 其彙編繕寫者 捐費董工 倣舊規而正其謬 添新註而節其繁 詳簡並至 殆無闕漏 首尾周歲功巳告訖 斯誠宗中之幸 而今嶺伯繼述之美 可謂能世其家矣 是譜也 前後三成 而皆於嶠南觀察營中入梓 事若有待 而譜之成不成若 又與吾宗之盛衰相關 斯豈不尤異乎哉 嗚呼一氣相禪 宗支繁衍 萬嗣流慶 珪組禪爀 莫非我祖先積善之餘庥 凡我同貫之人 交相勉勵 無忝爾所生以 遺我後人 繩繩不絶益熾而昌 則譜牒之增修 亦可勿替而引之矣 譜旣完屬 余以弁卷之文 乃敢不揆僭妄略敍 其槩如右重 以所祈祝之辭 爲諸宗獻焉
丙戌季夏上澣後孫通政大夫前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經鎭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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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1758~ ? , 자 군범(君範). 1783년(정조 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805년(순조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조참의을 지냈다.
2) 중국 당나라 초기인인 두정륜(杜正倫)은 성남에 사는 두씨들에게 함께 족보를 하자고 요구하였으나 두씨들은 거절을 했었으니 선계(先系)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송나라 문장가 소노천(蘇老泉)은 자신이 편찬한 소씨족보서에서 「족보는 소씨를 위하여 만드는데 나의 직계 조상만을 상세하게 하고 또 존칭을 썼으나 다른 사람의 것은 그렇게 해주지 않은 것은 자신(自身)이 하기 때문」이라고 편벽된 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