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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발문(重刊跋) |
영호永湖 엄曮1) 씀
우리 풍양조씨 세보世譜는 창강공에 의하여 창시되었으며, 잇달아 여러 종장宗丈들의 교정을 하여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간행할 수 있었던 전후 사실은 의정공(議政公; 귀록공 현명)의 발문에 상세하게 실려 있으니 우리 종중의 경사스러운 행복이 진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시조 아래의 세계世系의 실전된 대수가 『씨족원류氏族源流』를 상고하여 보면 명백히 고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참고하여 증거로 삼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여 아직도 의문스러운 주제로 남아있다.
엄曮은 이를 한탄스럽게 여겨 종장宗丈 지명祉命씨와 더불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함께 당직하고 있을 때부터 반복 검토하며 다시 수정·간행하려고 한지 오래되었다. 드디어 지난해 봄 마침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로 부임하게 되어 그 뜻을 발문으로 제기했던바 종중의 의견이 다행히도 일치했다. 지명祉命씨와 식견이 풍부한 모든 종인宗人을 결성하여 여러 집안의 구보舊譜를 깊게 검토하여 선계先系를 수정하고 범례凡例를 첨부하여 판본板本을 중간重刊하였으니 이제야 우리 가문의 세보世譜가 완전한 문서文書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십 년간의 노력으로 보역譜役이 재차 완성되어 지난날 의심스러운 것이 이제 명석明晳하게 되고, 전에는 잘못되었던 것이 후에 바로 잡혔으니 종문宗門의 경사가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비록 엄曮과 같이 불민(不敏; 슬기롭고 민첩(敏捷)하지 못함)한 사람도 여러 종친의 힘을 입어 참여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아! 신해년辛亥年에서 지금까지 30년 동안 자손들이 점점 더욱 번창하여 권질卷帙이 자연히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편명編名을 붙이고 정간井間을 나누어 소목昭穆2)이 정연하게 되어있으므로 파계派系를 따라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마치 여러 자손이 늘어서서 선조先祖를 모시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이 족보를 보는 우리 모든 종인들이 진실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孝道)와 형제에 대한 우애(友愛))와 돈목(敦睦; 정이 두텁고 화목(和睦)함)에 대한 마음이 없다면 이는 참으로 자정자子程子3)의 말처럼 이른바 “종족을 어우르고 배려하는 풍속(收宗族 厚風俗)의 의의意義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하였으니, 오직 우리 동종同宗들은 이 점을 서로 부지런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보서寶書가 모두 30권이며, 판각板刻이 모두 909판인데 상주尙州 남장사南長寺 보각譜閣에 보관하기로 한다.4)
영조 36년(1760. 6)
重刊跋 惟我豐壤趙氏世譜 始創於滄江公 而繼有諸宗丈之增潤得以 刊行於辛亥前後事實 詳載議政公跋文中 吾宗之幸固巳大矣 第始祖下世系失傳代數 按氏族源流明有可證 而偶未及考據尙爲疑案 曮爲是之懼與宗丈祉命甫自存桂院伴直反履消詳欲爲重釐而改鋟者久矣 去歲春適忝嶺杲以 此意發文宗中僉議幸得歸一遂會 祉命甫及諸宗之博雅者 旁考諸家舊譜釐正 先系添補凡例重刊板本 今而後吾家世譜庶可爲全書矣 十載經營譜役再完 昔之疑晦者 今焉夬晰 前之訛誤者 後乃得正 宗門之慶容有極哉 雖以曮之不每 寔賴僉宗之力而與有榮焉 噫辛亥距今 三十年之間後姓漸益蕃衍 卷帙自至浩多 而名編分井 昭穆秩然沿 派溯源宛如諸子諸孫列侍先祖 凡我宗人之覽斯譜者 苟無孝悌敦睦之心油然 而生則是眞有負於子程子 所謂收宗族厚風俗之義也 惟我同宗相與勉之哉 書凡三十卷 共九百九板 莊于尙州南長寺譜閣 崇禎紀元後三庚辰季夏後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大丘都護府使曮 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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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1719~1777, 본관 풍양(豐壤). 자 명서(明瑞). 호 영호(永湖). 시호 문익(文翼). 이조판서 상경(商絅)의 아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헌·부제학·예조참의를 지내고,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東萊)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하며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했다. 이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이조판서·제학 등을 지냈다. 문장에도 뛰어나 저서에 『해사일기(海槎日記)』 『해행총재(海行摠載)』 등이 있다.
2) 사당에 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茶禮).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을 목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심. 천자(天子)는 3소·3목의 칠묘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2목의 오묘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1목의 삼묘가 된다.
3) 정자(程子)는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한다. 여기서 자정자(子程子)의 子는‘자신의 스승’또는‘자신이 추구하는 학파의 스승’을 나타내는 경우‘자’를 앞에 더 붙여서‘자정자, 자심자’등으로 쓴다.
4) 신해보(辛亥譜) 때에는 청계사(淸溪寺)에 목판을 보관하였던 것을 이때 남장사(南長寺)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