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간 발문(創刊跋文) |
귀록歸鹿 현명顯命1)
우리 조씨는 득성得姓한지도 8백년이 지났다. 좋은 평판 사환(仕宦; 벼슬살이)의 울연(蔚然; 울창) 함으로 세상에서 거벌巨閥에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보첩譜牒이 간행刊行되지 못하였으니 정작 해야 했을 일을 그동안 미루고 못 한 것과 같다.
일찍이 창강공 속(滄江公 涑)2)께서 초본草本을 편찬하셨고 그 뒤에 우리 가문家門의 구본舊本과 일가 어른이신 시정씨(始鼎氏; 醉水亭公)의 초본에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이 쓴 서문이 있기는 하였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었다.
지난 숙종 41년(1715)에 막내 할아버지인 의정공(議政公; 東岡 相愚)3)께서 중지를 모아 발문하여 서울 및 지방의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바로 나의 큰형인 간의군(諫議君; 歸樂亭 景命)4)에게 주간主幹하도록 부탁을 하였는데 형님의 평소 성품이 꼼꼼하고 민첩하기 때문이다.
간의군께서 초본을 여러 번 교정하여 3책(三冊; 3권)으로 수정 편성하였다. 이 수정본은 조례條例와 조목條目이 명확하게 갖추어져 근원을 추적하고 분파分派를 찾기에 수월하도록 힘썼으니 그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였다.
그리고 십수 년 만에 초고草稿가 완성되었으나 의정공께서는 먼저 연관(捐館: 사망의 높임말)하였고, 간의군마저도 잇달아 돌아가셨다. 이일은 조카인 진사進士 재건載健이 이어받아다. 선대의 뜻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교정校正과 정서精書를 다 하였다. 최종적으로 종백씨(從伯氏; 사촌맏형 墨沼 錫命)5)께서 관찰사로 있는 강원 감영(監營;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에서 간행하였으니 풍양조씨세보豐壤趙氏世譜가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 일은 의정공議政公께서 처음으로 발의發議하시고 간의군諫議君께서 이루셨으며 마침내 판각板刻으로 하여 오래 전하도록 한 것은 관찰군觀察君 노력의 결과이다. 이는 또한 재건載健이 조상의 하던 일을 끊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계승한 효성孝誠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아! 창강공滄江公께서 처음으로 이에 뜻을 두고부터 현재까지 백 년 만에야 이룰 수 있었으니 우리 종중宗中의 어떤 경사慶事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한편 의정공議政公이 처음 시작한 뜻과 간의군諫議公이 공들인 정성으로 인해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 경사를 함께 하질 못하니 그 슬픔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간행刊行되고 난후 그 판각板刻은 양주楊洲 적성동赤城洞의 시조묘始祖墓 곁에 있는 견성암見聖菴에 보관토록 할 예정이다.
영조 4년(1728. 3)
族譜創刊跋 我趙得姓八百年 蔚然簪組相望 世所推謂巨閥 顧未有譜牒刊行者 盖闕事也 滄江公曾爲編成一本 其後又有吾家舊本及宗丈始鼎氏本 崔明谷所爲序 然其傳亦未廣也 歲乙未 季祖議政公倡議發文 告京外諸宗人 仍屬余伯氏諫議君幹之 謂其詳而敏也 諫議君就諸本增刪之 釐成三冊 條列節目 燦然明備 原源尋派 務便省閱 其用工勤矣 積十數年 草藁甫完 而議政公先已捐館 諫議君繼又奄忽 今者孤姪進士載健 惧先志未克就 遂爲讐校繕寫 入刊於從伯氏關東觀察營中 豊壤譜始將行於世矣 盖是役也 議政公倡之 諫議君成之 其卒能鋟榟而壽其傳 則觀察君之力是賴 而載健繼述之孝 亦有以羽翼之也 嗚呼 自滄江公始有意於斯 而至今百年 然後得以成焉 吾宗之慶 孰大於是 顧以議政公倡始之意 諫議君用工之勤 而不及享其成而同斯慶 可勝悲哉 旣刊 藏其板於楊州赤城洞始祖墓傍見聖庵 跋 戊申季春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 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南學敎授顯命謹跋
|
창간 후발문創刊後跋文 |
귀록歸鹿 현명顯命
영조 4년(1728) 봄 종백씨(從伯氏; 사촌맏형 墨沼 錫命))께서 강원 감영監營에서 간행할 때 현명顯命이 외람되게 창간발문을 썼다. 그러나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반란이 일어나자 종백씨께서 소명 받고 돌아오게 되니 일은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이제 현명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녹봉(祿俸;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곡식(穀食)ㆍ돈 따위를 일컫는 말 )을 덜어 공인工人들을 모집하고 발간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완성하기까지는 수십 일이 소요됐다. 이 일은 숙종 4년(1715)에 시작하여 지금에 이루기까지 17년이 걸렸다. 현명顯命은 당시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은 소년 포의布衣였지만 분에 넘치게 임관任官되어 오늘에 이루었다. 머리카락은 점점 빠져 줄어만 가고 있으니 그동안 죽고, 태어나고, 결혼하고, 과거 급제하는 등 인사의 변동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먼 지방에 계신 분들과 왕래를 하며 교정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판각을 상주尙州 청계사淸溪寺에 보관하기로 한 것은 그곳에 여러 종친이 살고 있어 수호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영조 7년(1731. 2)
族譜創刊後跋 戊申春 從伯氏取刊於關東營 顯命猥爲跋 會獜亮亂起 從伯氏以召命還 事遂已 今顯命忝按嶺節 捐俸鳩工 始刊 數十日 功告訖 自乙未建議 至今十七年 顯命以當日少年布衣 得躋濫至此 顚毛且已種種 則其間死喪生育婚嫁科宦人事之變 可推知也 第其居在遠鄕者 未暇往復爲之釐改 是可欠也 藏板于尙州靑溪寺 以有所居諸宗看護之便也 辛亥 嘉善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水軍節度使大丘都護府使豊原君顯命跋
|
<註> |
1) 1690~1752, 호는 귀록(歸鹿)ㆍ귀록당(歸鹿堂). 자는 치회(稚晦).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영조 4(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공을 세워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군되고, 우의정ㆍ영의정을 지내면서 탕평책을 지지하여 영조의 정책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시조 한 수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함.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문집은 『귀록집(歸鹿集)』이 있다.
2) 1595~1668, 호는 창강(滄江), 경학(經學)과 문예·서화에 전념,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果川)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金堤)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창강일기(滄江日記)』, 가 있다.
3) 1640~1718, 시호 효헌(孝憲), 호는 동강(東岡). 1711년(숙종 37) 우의정이 되었으며,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이르렀고, 남평(南平:나주)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4) 1674∼1726. 호는 귀락정(歸樂亭). 1722년(경종 2) 49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725년(영조 1) 대사간되어 활발한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5) 1674~1753, 1707년(숙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 및 형조판서를 지냈고,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6) 1674~1753, 자 백승(伯承), 호 묵소(墨沼), 아버지는 수찬 등을 역임한 조대수(趙大壽), 1707년(숙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 및 형조판서를 지냈고,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