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보(신해보 17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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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ma01.png 창간보 서문(創刊譜序)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

 

풍양조씨豐壤趙氏는 실로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다. 시조始祖는 조맹趙孟이라고 하는데 고려의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개국공신壁上開國功臣이란 칭호를 하사받고 그 지위地位가 상주국上柱國 삼중대광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중공侍中公 이후부터 지금까지 7백여년 동안 자손은 번성하고, 높은 벼슬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세상 사람들은 동방의 손꼽히는 명문으로 칭하였으니, 곡량전(穀梁傳; 유교 경전의 하나인『춘추(春秋)』의 해설)에 이른바 덕후류광(德厚流光; 덕을 많이 쌓으면 그 음덕으로 자손들이 잘된다는 말이 실증(實證)되었다는 뜻)이란 말에 비추어 알 수 있지 않은가.

 

조씨는 옛날부터 보첩譜牒이 있었는데 조공趙公 시정始鼎2) 형제분이 이것을 수정하였으며, 「석정錫鼎도 또한 조씨의 외손外孫」이라며 서문序文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석정은 이를 사양하였지만 끝내 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삼가 몇 마디 기록하는 바이다.

 

일찍이 듣건대 정숙자(程叔子)3)는 말씀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관섭管攝하되 종족宗族을 단결시키고 풍속을 후덕厚德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려면 모름지기 족보族譜의 계통을 밝히고 종법宗法을 세워야 한다.」하였다. 아! 종법을 연구하고 몸과 마음을 닦지 못한지도 오래되었다. 고려 때에는 식목도감式目都監4)이라는 관청이 있어서 씨족의 원류源流를 관장하고 기록하였으나 그 후로는 들은 바가 없다. 근세近世에들어서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날이 갈수록 보첩譜牒을 수정修整하고 밝히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는 아마도 종법을 보존할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조공趙公이 의도하는 바도 또한 이에 있다 하겠다. 분파分派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根源을 찾고, 삶을 즐김에 근본根本을 생각하여야 하며, 옛 분들이 이른바 유명무실有名無實 즉 이름만 있고 실상實像은 없다는 비난을 면免하려면 오직 후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있다 하겠다. 이를 서문으로 가름한다.

숙종 4년(1678. 8)

 

 

[원문]

豐壤趙氏族譜序

豐壤之趙實爲東方大姓 始祖曰趙孟 佐高麗太祖賜統合三韓 壁上開國功臣號 位至上柱國 三重大匡 門下侍中 平章事 自侍中以後迄今 七百有餘載子姓益蕃昌 達官聞人前後相望 世之數東韓門戶之懿者 指不得先趙氏屈 傳所謂德厚流光不其徵歟 趙氏舊有譜 趙公始鼎兄弟就加修正 謂錫鼎亦趙氏外裔屬以敍引之文 錫鼎辭不獲謹以一說申之 嘗聞程叔子有言 曰管攝天下人心 收宗族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 立宗法 噫宗法之不講久矣 勝國時有式目之官 掌記世族源派 後亦無聞 近世士夫家稍稍以修明譜牒爲事 余每喜聞而樂道焉 爲其有宗法之遺意也 今趙公之意其亦有見於斯歟 至於沿流而求源 樂生而返始無墜奕世 家聲免夫古人鐵鑪之譏 則惟在後承之自助焉 耳是爲序

歲著壅敦牂仲秋日   完山 崔錫鼎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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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46~1715, 본관 전주(全州). 자 여시(汝時) ·여화(汝和). 호 존와(存窩) ·명곡(明谷). 시호 문정(文貞).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1697년(숙종 23) 우의정, 1699년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직, 소론(少論)의 영수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8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켰다.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명곡집 (明谷集)』이 있다.

2) 1624~1706, 자 백겸(伯謙), 호 취수정(醉水亭), 첨지(僉知), 평생 동생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시진(始晉)과 함께 보첩 수정에 전력을 다하였다. 아버지는 중소(重素)이다.

3) 정숙자(程叔子) : 송(宋)나라 정호(程顥)로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4) 고려시대의 법제회의기관(法制會議機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