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때 양진당에 조명강습소를 세우고 신교육을 하다.(201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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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9-12 12:24 조회109회 댓글0건본문
일제시대 때 양진당에 조명강습소를 세우고 신교육을 하다.(2017. 6월)
朝明講習所 설립자 晩堂 趙泰衍
朝明講習所는 晩堂公 諱 泰衍(1877~1934)이 양진당에 세운 학교이다. 조명강습소 설립자인 만당공은 黔澗公 諱 靖의 12대손이다. 만당공의 조부인 依巖公 諱 範九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상주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이 출중하여 영남의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지역에 향약을 실시하는 등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신 분이다. 그리고 만당공의 부친인 雲樵公 諱 南極은 동학난 당시에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관민합동 都監인 召募營의 掌財都監을 맡으면서 농민의 어려움을 절감하여 가난한 농민을 구휼하고자 많이 노력하신 분이다. 만당공은 젊은 시절에 시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조부와 부친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몸소 보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만당공께서 依巖古宅(경북 민속문화재 제153호)의 사랑채를 1912년에 개축하고 그 당호를 ‘逸憂堂’으로 지었는데, 그가 이 逸憂堂記에서 송나라 명재상인 范希文의 岳陽樓記에 나오는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니라)’라는 두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우국 사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에 상주시 낙동면 운평리의 늘미 和樂齋에 洛雲私塾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개설하였다. 또한 그는 雲昌組合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활을 도우면서 그 운영수익을 낙운사숙의 재정기금으로 사용하였다.
朝明講習所의 설립과 개화ㆍ민족교육
낙운사숙 최초의 교사로 부임한 분은 樂齋公 諱 台衍(1886~1945)인데, 하지만 그는 교사 부임 후 이내 농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낙재공이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 전라도 莞島 사람인 小南 金榮炫(1883~1974)을 알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조국 광복을 위하는 길은 민족교육에 있다는 점에서 의기투합하였다. 金榮炫이 1920년에 먼저 출소하게 되었는데, 이때 낙재공은 김영현에게 상주로 가서 신교육을 할 것을 권 하면서 만당공을 찾아가도록 소개서를 써주었다. 만당공은 낙재공의 주선에 따라 김영현을 교사로 채용하였으며 그의 조언를 받아들여 신교육의 핵심 교육과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洛雲私塾을 朝明講習所로 명칭을 변경하고 보다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교사를 화락재에서 양진당으로 옮겼다.
조명강습소를 개설하는 날 영남의 巨儒인 果齋 柳道昇(1876~1942)이 한시를 지어 만당공에게 주었는데, 그 한시는 이렇다.
培養新知貴日新(배양신지귀일신) 신지식인들 길러내어 날로 귀해지니
湯盤非是爲他人(탕반비시위타인) 탕임금 반명이야 남을 위함이 아니로세.
試看窓下寒梅樹(시간창하한매수) 창 아래 겨울 매화나무를 보게나,
貯得諸君肺腑春(저득제군폐부춘) 그대 가슴에 봄빛이 가득하네.
湯임금의 盤銘에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 한 번 새로워졌으면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고 하였으니, 柳道昇은 만당 조태연에게 준 시에서 혹독한 겨울(일제의 압제)을 이겨내고 봄(조국의 해방)을 알리는 매화꽃을 피우게 될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 조명강습소를 개설하여 신교육을 하는 선생을 칭상한 것이다.
낙운사숙은 상주, 의성, 선산 등의 지역에서 배우고자 온 학생 수가 개설 초기에 50여명이었으나, 1920년 조명강습소로 개칭하고 양진당으로 옮긴 후엔 학생 수가 급증하여 100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 증가하여 1924년에는 학생 수가 2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金榮炫의 회고에 의하면, 조명강습소를 개소하는 날 내빈으로 참석한 상주군 군수와 지역 일부 유생들이 교사 김영현에게 남도의 섬사람이라고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날 김영현이 마지막 연사로 연단에 올라 “여러분의 머리에는 양반으로 가득 차 있다. …… 진짜 명당은 여러분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이 학교가 제일의 명당이니 후손이 발복할 것이요, 여기에서 배우고 닦고 훌륭한 인재가 되면 그 사람이 참다운 양반인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여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조명강습소의 교과 내용은 隆熙學校의 교과 내용과 비슷하였는데, 이는 김영현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문 교원 양성 학교인 융희학교(1908년 설립)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만당공은 운창조합을 통하여 저리융자와 농산물 공동출하 등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그러한 협동조합 운동을 농촌계몽운동 및 조명강습소를 통한 신교육 민족 민족교육과 연결하였다. 소남 김영현은 설립자인 만당공의 후원 하에 조명강습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金榮炫은 3년 동안의 상주 생활에 과로가 겹치고 옥중에서 고문으로 얻은 늑막염이 재발하여 부득이 1924년 고향인 완도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晩堂公께서 이를 몹시 아쉬워하며 김영현에게 쓴 簡札이 남아있다. 김영현은 완도로 돌아가서도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하고 농민운동을 하였는데, 그의 제자들 중에는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많아서 완도는 전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朝明講習所의 敎師들
조명강습소에서 교사를 역임하신 종인으로는 樂齋公 諱 台衍과 白潭公 諱 相衍이 있다. 이 두 분은 교사로 재직한 기간은 짧지만 조명강습소가 강제 폐소된 이후에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이시다.
樂齋公 諱 台衍(1895~1945)은 검간공의 12대손이며 精雲公 諱 南昱의 장자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후 농민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겪었고, 옥중에서 소남 김영현을 상주로 가도록 권유하였다. 옥고를 겪기 전에는 洛雲私塾에서, 출소 후에는 朝明講習所 교사로서 민족운동을 하였다. 1924년 조명강습소가 폐교된 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崔南善, 安在鴻 등과 교우하면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주무관학교 생도모집 및 군자금 모금사건 등으로 구속된 바 있으며, 출소 후 경성보통교원양성소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노동공제회 대표를 맡았으며, 성경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선산직장려계사건 등으로 제령 제7호 위반죄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그는 두 아들을 임시정부로 보내 항일운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1945년 만주에서 운명하였으며, 왜경의 압박으로 화장 후 환국하였다. 선생은 2005년 8.15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白潭公 諱 相衍(1897~1965)은 梅隱公 諱 承洙의 5대 주손이며, 諱 南翼의 아들로 1898년에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독학으로 한학과 일어 등을 수학하였고, 14세에 徽文義塾에 입학하여 현대 학문을 수학하였다. 휘문의숙을 마친 후 상주로 와서 조명강습소에서 1922년에 잠시 교사를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2년 24세 때 만주로 건너가서 金佐鎭 장군의 부관으로 만주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에 밀명을 전달하고 신흥무관학교와 대한독립군 總署 사이를 왕래하며 북만주 및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1923년까지 약 9년간 수행하였다. 1923년 밀령을 띠고 동지 崔在華 등과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던 도중에 만주 안동에서 피검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복역 중에 탈옥에 성공하여 서울로 들어와서 독립운동기금을 모금해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그리고 소련의 독립지사들과 연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金舟治를 면담하여 합동 독립투쟁의 길을 열었으며 또한 만주에서 한국통신중학관을 설립하고 강의록을 출판하여 동포에게 배포하는 등 2세 교육에도 전념하였다.
민족계몽교육의 현장인 養眞堂 건물
조명강습소는 1924년에 설립된 낙동공립보통학교로 강제 통합되었다. 비록 만4년여의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조명강습소를 설립하여 운영한 晩堂公 諱 泰衍과 교사를 역임한 小南 金榮炫, 樂齋公 諱 台衍, 白潭公 諱 相衍 등의 우국적 민족 계몽 교육활동이 이루어진 양진당 건물은 선조의 훌륭한 개화 교육활동이 이루어진 역사의 한 현장인 것이다. 우리는 양진당 건물에 설립되었던 조명강습소에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일깨우신 선현들의 훌륭한 업적을 삼가 옷깃을 여미며 본받아야 할 것이며, 특히 젊은 청년세대들은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는 동량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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