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충혼당에 모시고(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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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8-14 17:07 조회123회 댓글0건본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충혼당에 모시고(2019년 12월)
잊혀지지 않는 기억 하나
어느 날 까만 승용차를 가지고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간다고 왔다. 차에 오르려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할아버지 이따 올 때 꽈배기 사가지고 와!” 하니까 그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백원짜리 한 장을 주고 간 기억이 난다. 참으로 철없이 딱하게 보였나보다.
그때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가 한 그 말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나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할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했다.
돌이켜보니 6.25가 터지고 서울에 갇혀 살던 때가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은 1950년 9월 18일, 서울 수복 열흘을 앞두고 임정요인들이 모두 납북되시던 날이란다.
엄마는 늘 이렇게 한탄하시며 서러워 하셨다.
“그 놈들이 하두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두루마기 동정도 못 달아 드리고 보냈구나”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다가 할머니는 광복 6개월 전에 돌아가셨고, 광복 후 또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그렇게 속절없이 헤어진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 연세가 일흔, 그로부터 또 70년이 지나니 나도 칠십이 넘었다. 무심한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그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1954년 10월 27일임을 ‘압록강변의 겨울’ 이라는 책을 보고 알았다.
두 분을 충혼당(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해마다 홍명희 문학제가 괴산에서 열린다. 괴산은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생가이고, 또 우리 할머니의 친정이다. 괴산은 홍범식(홍명희 부친) 생가이기도 하고 홍범식은 우리 할머니(홍정식)와 남매간이시다.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있다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백성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자결을 하신 분이시다. 금산에는 그의 공적비가 모셔져 있다.
할아버지는 동갑인 할머니와 세 살때 약혼(어른들끼리의 약속)을 하고 15세에 결혼을 하여 따뜻하고 좋은 가정을 이루시다가 일본이 우리 민족을 침략하는 바람에 가족은 산산이 깨어져 쑥대밭이 되었다. 나는 10월이면 괴산에서 열리는 홍명희 문학제에 참석한다. 그때마다 할머지 묘소를 찾는다. 풀이 우거진 묘소를 보면서 나는 항상 송구스럽고 마음만 무겁고 방법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평생을 나라를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건 할아버지, 그리고 일본놈들이 구두발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그들에게 가족을 굳건히 지키다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지금 두 분은 서로 다른 곳에 계신다.
2006년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4박5일동안 재북애국지사 후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 ‘애국렬사능’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에 꽃다발을 놓으면서 우리 자매들은 가슴이 벅차면서도 만감이 교차했다. 엄마가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할아버지는 평양 애국지사 묘소에, 할머니는 괴산에 계시니 70여년 세월을 또 그렇게 보낸 것이다. 나도 이제 70이 넘었으니 힘도 없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국가보훈처에 구구절절이 민원의 편지를 보냈다. 그게 작년 6월이었다. 답장이 왔는데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모실 수 있다고 한다. 뛸듯이 기뻤다. 풍양조씨 대종회에 답장을 보내드리고 도움을 청했다. 그분들이 나보다 더 좋아하신다. 할아버지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자손이 없는 분)에 계시니 할머니 묘소를 파묘하여 유골을 모시고 오면 된다고 한다.
괴산군청에 가서 파묘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았다. 파묘날은 2019년 7월 11일로 날을 잡았다. 그런데 그 기간이 장마철이라고 난색을 한다. 아이고 어쩌나! 다시 날을 받아 6월 29일로 정했다. 보훈처로부터 답장을 받은지 꼭 일년만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부처님께 고하고 6시에 괴산으로 향했다. 옛날 6학년 때 가르쳤던 제자가 승용차로 나를 도와줬다. 최준희 고마워요.
비가 부슬부슬 온다. ‘할머니는 슬픔도 얌전하시구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괴산 제월리 묘소에 도착했다. 산신제 지내고 제사 모시고 파묘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두개골 하나와 엉치뼈 2개가 남았다. 무상한 인생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 서럽다. 해가 살며시 뜬다. 이 또한 축복이 아닌가?
청주 화장장으로 가서 유골을 목함에 모시고 다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충혼당에 모실 수 있는 허가증을 들고 충혼당으로... 모든 일을 마치고 나니 오후 6시다. 오늘 하루는 참으로 잘 보낸 날이다.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155]에 두 분을 모시고 나는 속으로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 이제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엄마 나 잘했지?’
“할아버지 이따 올 때 꽈배기 사 와 응” 또 하나의 기억
“김구 선생님 오셨다. 인사드려라” 엄마의 목소리도 들린다.
가난하게는 살았지만 부끄럽지는 않게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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