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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충혼당에서 제68주기 추모행사 거행(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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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8-14 17:42 조회1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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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충혼당에서 제68주기 추모행사 거행(2022.11.09.)

 

□ 풍양조씨 국립서울현충원 단체 참배

 

img5-2.jpg2022. 11. 9일(수요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우천조완구선생 제68주기 추모제를 거행하였다. 3년 주기로 대종회 신 집행부가 출범하는 첫해는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분향소에서 대종회 주관으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헌화 분향 참배를 마치고, 이어서 충혼당으로 이동하여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충혼당 단체 분향소에서 헌화 분향 후 제향실에서 추도식 겸 우천선생내외분 제향 행사를 거행하게 되어있어 다음 순서대로 추모행사를 진행하였다.

 

 

 

 

img5-3.jpg현충탑 단체 참배- 군악대와 의장대 지원 받아 경건한 행사 거행

 

현 대종회장, 용구 우천선생기념사업회장, 남풍 고문, 경구 고문, 남혁 명예회장을 비롯한 50여명의 종회원이 단체 참배행사에 참석하였다. 10시 45분에 현충문에 도열하여 의장대의 사열과 집례관의 안내를 받고 현충탑 분향소에 입장하였다. 종현 대종회장이 대표로 헌화하고 종현 회장 용구 회장 남풍 고문이 순서대로 분향하고 군악대의 진혼곡에 맞추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하여 단체참배 묵념하였다. 참배행사 후 종현 대종회장은 풍양조씨대종회를 대표하여 현충문에 비치된 방명록에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사를 기록하고 서명하였다. 이어서 본 행사를 지원하여준 국립서울현충원 관계자에게 감사인사 드리고 참배한 종회원들께도 감사인사를 하였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현충원 측의 군악대와 의장대 지원을 받았는데 국연 수요회장이 주선하여 성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국연 수요회장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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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당 분향소에서 우천 조완구 선생 추모행사 거행

 

img5-5.jpg현충탑 참배 행사 후 충혼당 제1관 분향소에 집결하여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조용구) 주관으로 남돈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헌화 분향하였다. 용구 기념사업회장이 대표로 헌화하고, 이어서 용구 기념사업회장, 남성 기념사업회 부회장, 조명숙 유족대표 순으로 분향하고 참석자 전원이 단체 참배하였다. 참배를 마친 후 충혼당 302호실로 이동하여 15열 5단에 봉안된 조완구 선생 내외분 영전에 묵념 참배하고 제향실로 이동하였다.

 

 

 

 

 

 

충혼당 제향실에서 추도식과 제사 행사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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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행사에 앞서 용구 우천기념사업회장 주관으로 추도식을 거행 하였다. 남돈 사무촌장이 우천선생의 약력보고 하고 이어서 용구회장은 직접 지은 우천선생에 대한 추도사를 낭독하였는데 참석자 모두 우천선생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영웅적인 독립운동에 크게 감명 받았다. 추도행사를 마치고 대종회 제례위원회에서 준비한 제사를 봉행하였다. 초헌관은 남풍고문, 아헌관은 농연 한산군파종중회장, 종헌관은 국연 수요회장이 헌작하였고 남형유사의 집례와 남성 제례위원이 집사를 맡아 제사를 진행하였다.

모든 추모행사가 끝나고 남돈 사무총장의 행사결과 보고에 이어 용구 기념사업회장의 감사인사와 조명숙 유족대표의 인사를 끝으로 행사일정을 마쳤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용구회장이 1백 만 원을 찬조하였고 그 외 많은 분들이 찬조 성원해 주었다.

 

 

현충원 만남의집에서 오찬 식사

행사를 마치고 만남의집으로 이동하여 2층 식당에서 우천기념사업회에서 제공하는 오찬 식사를 하며 서로 간 오늘 행사의 뜻을 되새기고 순국선열과 우천선생의 우국충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

 

 

추  도  사

조 용 구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풍양 조문을 대표하는 영웅적인 애국지사이며, 풍양 조씨 초대 화수회장을 지내신 우천 조완구 선생의 6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선생 조부께서는 양석 봉화공으로 이조판서였고, 조모는 정부인 완산 이씨였으며, 이조참판이신 선친 동필 공과 정부인 안동 김씨 사이에서 3남 중 1881년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25세 청년이던 1905년, 서사참봉 현 직급 군수 급으로 근무 중에 을사늑약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노모와 식솔을 뒤로하고, 국권회복이라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결연히 망명의 길로 떠났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지사 분들과 의기투합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 재정부장을 담당하여 일생을 조국의 독립 운동에 바치고, 광복 후 환국하였건만 광복의 기쁨도 제대로 누리시지 못한 채 6.25 동란 중 흉도들에게 납북되어 1954년 10월 27일 74세를 일기로 북녘 땅 평양 용성에서 영면하셨습니다.

선생의 애국정신과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지면과 방송을 통해 발표된 바 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 제84호로 서훈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이만원 작가가 우천 조완구 선생의 생애를 기술한 책 속에 나오는 유명한 별명 두 개로써 선생의 훌륭한 인품을 추모하고자 합니다.

선생의 첫 번째 별명은 ‘단벌 신사’였고

두 번째 별명은 ‘기틀 판틀’이었습니다

전자는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는 과정에서 선생은 늘 같은 옷을 입고 검소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고, 후자는 임시정부 시절부터 광복 이후까지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인사들이 선생의 올곧고 강직한 성품에 대해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대의명분과 규율을 중시하셔서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고 고집스러움을 지키셨던 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나 이시영 선생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주요 인사들도 조완구 선생이라는 외골수의 강직함과 충성심 앞에서 혀를 내두르곤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번 해체 위기를 맞이했던 임시정부는 선생의 고집스러움 덕분에 명맥을 유지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즉, 이 분의 존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현재의 헌법 전문에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복 이후 선생이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혈육은 따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외아들 남규 공은 아버지를 찾아 만주 벌판을 헤매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소식을 모른 채 비명횡사하셨고, 노모는 아들을 그리다가 객지에서 운명하셨으며. 아내 홍정식 여사는 머리를 깎고 삯바느질과 품앗이로 생계를 도맡아 두 따님을 훌륭히 키우셨건만 광복 몇 달 앞두고 夫君 우천 선생을 상면하지 못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선생의 행적과 인품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아! 위대하고 거룩한 우국충절의 그 길에 얼마나 애통절통한 사연이 많았겠습니까!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느라 생이별을 하고 살았던 부부가 광복된 조국에서도 함께하지 못하고, 사후에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땅에 따로 따로 묻혔으니 그 누가 천추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으리오마는,

그나마 다행인 일은 국가보훈처, 국방부, 국립현충원, 광복회와 지자체 보훈계통 전문인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019년 6월 29일에 충북 괴산 땅에 홀로 묻혀 있던 홍정식 여사의 무덤을 개장 후 화장하여, 선생의 영패(靈牌)와 함께 여사님의 유골함을 이곳 국립현충원 충혼당 320호실에 합장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오늘이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유족 분, 종중 여러분과 함께 선생의 영전에 조촐한 제(祭)를 올리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금수강산 삼천리 방방곳곳 중 하늘이 점지해 주신 봉황 깃든 땅, 따뜻하고 안락한 여기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존경하는 조완구 선생님 내외분께서 영면하시기를 기원 드리면서 추도사에 갈음합니다.

2022. 11. 9

우천 조완구 선생 기념사업회장 조 용 구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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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 조완구 선생 약력보고

◈ 생애

선생은 1881년 3월 20일 서울 계동에서 부친 吏曹參判 諱 東弼과 모친 안동  김씨 사이에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으며, 祖父는 吏曹判書 諱 鳳夏이다. 1895년 禮曹判書 홍승목의 장녀 홍정식 여사와 결혼하셨다. 슬하에는 1남2녀이며, 독자 남규는 선생이 망명 중이던 1914년 6월 만주 용정에서 실종, 정경부인 홍정식 여사는 1945년 2월 선생이 환국하기 10개월 전에 고국에서 별세하여 끝내 해후하지 못하였다. 장녀는 1977년 사망, 차녀 규은은 2004년 타계하여 망명 애국지사의 가족사는 애통하기 그지없다.

 

◈ 독립운동사

- 1902년 한성법학전수학교 졸업 후 국내부 내부주사로 근무 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울분하여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

- 1914년 북간도에 망명 독립운동단체 결성하였고 그 후 1917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 항일운동 개시.

- 1919년 3.1운동 후 상해에 집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전원위원장에 피선되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함.

-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

- 1926년 임시정부 상해에서 광동으로 이전, 김구 선생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피선.

- 1932년 11.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조완구 명의 이승만 박사 제네바 파견 특명수석 대표 신임장 발급

-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임명, 재무부장 겸임.

- 1945년 김구 주석과 서안의 광복훈련 한미합동작전 참전.

- 1945년 8.15 광복, 동년 12월 환국(31년간 망명 생활)

- 1948년 남한 우익대표로 김구 주석과 남북협상 주석단 일원으로 참석

- 194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후 김구 선생 후임으로 한국독립당 위원장 취임.

- 1949년 11. 24일 효창공원 김구 선생 묘비문 근찬

- 1950년  1. 29일 풍양조씨 대종회(화수회) 초대회장 취임.

- 1950년  6. 25일 동란 발발

- 1950년  9. 18일 애국지사 조소항 등과 함께 납북

 

◈ 서거와 추모사업

- 1954년 10. 27일 북한 군병원에서 서거(1991. 10. 1일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서거 소식 알게 됨)

- 1989년 3. 1일 애국지사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

- 1991년 10. 27일 대전에서 선생 추모제 거행

- 1991년 11. 21일 정부 주최 납북유공자 민족지도자 15위 추모제 거행,국립서울현충원 무후 선열단에 위패 봉안

- 2000년  6.  9일 풍양조씨대종회 주관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 창립

- 2003년  5.  6일 독립기념관에 「우천조완구선생어록비」 건립(기념사업회 주관)

- 2005년  4. 10일 남양주 풍양조씨 종산에 「초대 대종회장 우천조완구선생 공적비」 건립

- 2019년  6. 29일 충북 괴산에 안장된 배위 홍정식 여사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호 15열 5단에 우천선생 위패와 합장 봉안.

- 2019년 11.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내외분 합장 추모제 봉행.

- 2022년 11.  9일 제68주기 추모제 봉행

 

◈ 우천조완구선생 추모 선양 사업계획

-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 사단법인 전환

- 우천선생 서훈 등급 상향 추진

   국가보훈처에 건의하여 현 등급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나 최고 서훈 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상향 추진 계획임.

   ⇒ 임정요인 중 핵심 인사이므로 상향이 타당함.

<보고자 : 사무총장 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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