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공동상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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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동상조성기侍中公銅像造成記
견성암見聖菴 산영각山靈閣에 봉안된 천마산天摩山 산영탱화山靈幀畵는 예로부터 풍양조씨豐壤趙氏 시조始祖 시중공의 영정影幀이라 일컬어 오는 화상畫像이다. 지난 계축년(癸丑年, 1973) 여름에 견성암에 자주 다니는 자손子孫과 신도信徒들이 화수회花樹會에 찾아와 말하기를 시중공으로 말씀하면 자손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신도들도 숭봉崇奉하는 대상이시니 그 화상畫像을 석고상石膏像으로 조성하여 유서 깊은 석굴石窟에 봉안奉安하고 예봉禮奉함이 어떠냐는 의견을 말해왔고 이 말을 들은 화수회장花樹會長 정구씨鼎九氏는 우리 시조의 일이니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주는 것보다는 자신이 단독 부담負擔하여 동상으로 조성할 뜻을 밝히었다.
이에 그해 가을에 예例에 따라 견성암에서 개최한 화수회 총회 석상席上에서 이 취지를 말하니 모두 찬성함과 동시에 다 같은 자손이라 하여 형편대로 성금을 내고 유기류鍮器類를 거두어 동상銅像 조성을 돕게 되었다.이런 경위經緯로 조성사업이 발족發足된 바 석굴이 낙반落盤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그 이듬해인 갑인년(甲寅年, 1974) 가을에 예방을 위한 구조물을 설치하고 또 그 이듬해인 을미년(乙未年, 1975) 여름에 홍익대학교 미술학도에게 의뢰하여 주조鑄造를 진행하였다. 도상銅像의 원형은 산령탱화山靈幀畵를 모본模本으로 하였는데 고려 시대라는 의상학衣裳學적 고증과 현대 미술학美術學적 안목에서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하였다.
여러 차례의 중지衆智를 모은 교정을 거쳐 6월에 원형을 완성했고 7월에 주조鑄造하여 이번의 광복절에 여러 자손과 승려僧侶 신도 4백 여인餘人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식을 올리고 석굴石窟 안에 봉안奉安하였다.여기에서 한 가지 남기도 싶은 말은 산령각山靈閣의 탱화幀畵가 과연 시중공侍中公의 실상實像이냐는 물음이다. 이에 대하여는 문헌文獻이 무징無徵하니 무어라 단언斷言하기 어렵다.
산신山神을 받드는 전각殿閣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찰寺刹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유심히 여겨봐야 할 점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사찰에 있는 탱화幀畵는 대개 도복道服에 석장錫杖을 짚은 속세를 초탈超脫한 도사풍道士風의 모습인 데 반하여 이 탱화幀畵는 관복官服에 파초선芭蕉扇1) 을 든 덕양德量이 굉원宏遠한 재상풍宰相風의 모습이란 점이다.
우리 시조 시중공께서는 이곳에서 은거隱居 양덕養德하시다가 만년晩年에야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開國에 큰 공을 세우시고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루셨다. 그리고 돌아가셔서는 이 고장의 주산主山인 천마산령天摩山靈이 되셨다는 것이 연면連綿히 이어져 오는 전설이요 신앙이다. 더욱이 그 모습은 자상姿相이 웅위雄偉하고 수염鬚髥이 미호美好하셨다는 창강공滄江公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또 광서년간光緖年間 2) 에 개사改寫할 때에 산령각山靈閣의 화본畵本과 박동가磗洞家 3) 의 화본畵本을 절충折衷하여 그렸다는 선배들의 구전口傳 미루어 생각한다면 가령 실상實像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公의 상像인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지금 우리가 보는 옛날 성현聖賢이나 위인偉人들의 얼굴은 실상화實像畵보다는 후인後人들의 영상映像에 의하여 그려진 상상화想像畵가 더 많다는 것을 첨언添言하면서 이를 조성기造成記로 하는 바이다.
단기 4308년 을묘(乙卯)(서기 1975년) 8월 일
후손 풍양조씨화수회 감사 준구駿九 근기謹記
<註> |
1) 초(芭蕉)의 잎 모양(模樣)처럼 만든 부채. 또는 폭 넓은 파초(芭蕉) 잎을 그대로 구부려 드리운 것. 정승(政丞)이 출행(出行)할 때에 머리 위를 가리는 데 썼다.
2) 光緖年間: 광서(光緖)는 중국 청나라 연호. 현재 산령각에 봉안(奉安)된 화상(畫像)은 광서 8년에 개사(改寫)한 것인데 고종 19년(1882) 임오년(壬午年)이다.
3) 磗洞家: 박동집. 운석공(雲石公) 휘인영(諱寅永)의 가(家)를 지칭하며, 공께서는 서울 박동(현 수송동)에서 살며 유래된 말이다. 영정(影幀) 수집(蒐輯)에 일가(一家) 이루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