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배산서원에 걸려있는 우천 조완구 선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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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작성일24-08-13 17:47 조회123회 댓글0건본문
경남 산청 배산서원에 걸려있는 우천 조완구 선생 글(2018. 11)
藕泉 趙琬九 先生 影幀 |
경남 산청에 있는 培山書院(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호)의 강당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藕泉 趙琬九先生께서 쓰신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우천선생께서 1918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시고 해방 후에 환국하셨으나 6.25 때 납북되셨기에 안타깝게도 국내에 우천선생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이 현판 글은 우천선생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배산서원에 대해 소개하고 이어 이 서원 강당에 걸려있는 우천선생께서 쓰신 글의 내용을 중심으로 우천선생 사상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산청 배산서원 소개
경남 산청의 培山書院은 영조 47년(1771)에 세워진 서원이다. 배산서원의 최초 건립 과정을 보면, 1771년에 道川書院이 사액서원이 됨으로써 이 도천서원에 모셔져있던 淸香堂 李源(1501~1569)과 竹閣 李光友(1529~1619)를 도천서원에 계속 배향할 수 없게 됨에 따라 1788년에 이 두 분을 따로 모실 서원을 설립한 것이 배산서원이다. 이 배산서원의 德淵祠에 배향된 淸香堂 李源은 南冥 曹植, 退溪 李滉 두 대현과 교유하며 학문과 뜻을 같이 하였으며, 명종 1년(1546)에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培山書院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眞庵 李炳憲이 주도하여 서원 성격의 培山書堂 건립에 뜻을 모으고 7년여의 노력 끝에 1923년에 培山書堂을 재건립하면서 文廟, 道東祠, 講堂을 새로 지었다. 이 서원(현재 ‘배산서당’이 아닌 ‘배산서원’으로 지칭됨)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마치 향교처럼 文廟를 세워서 文廟에 孔子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道東祠에는 退溪 李滉ㆍ南冥 曹植ㆍ淸香堂 李源ㆍ竹閣 李光友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일제시대 배산서당 재건과 상해임시정부의 지원
1918년 이 배산서원 재건을 주도한 인물인 眞庵 李炳憲(1870~1940)은 중국의 학자인 캉유웨이(康有爲)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유교종교화운동을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캉유웨이는 1898년 광서제(光緖帝)와 함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強運動)(과거 제도 개혁, 조세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서태후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100여 일만에 변법자강운동에 실패한 뒤 16년간 유랑생활을한 인물이다. 眞庵 李炳憲이 중국으로 건너가 캉유웨이와 접촉하고자 시도할 당시에 상해 임시정부의 金九 先生은 처음에 李炳憲이 일본의 첩자가 아닐까 의심하여 그를 체포하여 며칠간 심문하였다. 金九선생은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일본의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金九선생이 생각하기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조선이 망하게 된 것에는 유교가 상당히 책임이 있으므로 유교적 가치를 타파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유교종교화운동을 추진하는 등 유교를 부흥시키려하는가 였다. 李炳憲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풀기 위해 자신이 추진하는 유교종교화운동이 조선 전통의 성리학적 유교를 일대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추진하는 운동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상해 임시정부의 각료인 白巖 朴殷植, 省齋 李始榮, 白凡 金九, 藕泉 趙琬九 선생은 그의 유교개혁 운동의 뜻(獨奠改良儒敎之義)에 특별히 공감하여 그에게 협조하게 되었으며, 그가 1923년에 곡부에서 공자님의 문묘를 참배하고 강유위를 만나 眞經을 말하고 배산서당 문묘봉안 문제를 협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1923년에 배산서당이 건립되었다. 1923년 배산서당에서 석전문묘행사(釋奠文廟行事)와 도동사행철향의(道東祠行腏享儀)를 진행하던 중에 전통 朱子學을 고수하는 유림에서 聲討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李炳憲 등 배산서당 주도 인물들의 유교종교화운동 및 유교개혁운동에 대하여 영남지역 전통 유림세력의 비판도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산서당 건립 축하문을 통해 본 우천 선생의 사상
1923년에 培山書堂이 설립되게 되는데, 이 당시에 白凡 金九, 藕泉 趙琬九, 白巖 朴殷植 세분은 배산서당 설립 행사에 축하문을 보냈다. 현재 배산서당 강당에는 중국 학자인 강유웨이(康有爲)가 쓴 글과 金九, 趙琬九, 朴殷植 세 분이 보낸 배산서당 낙성축문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세 분이 1923년에 보낸 낙성 축문은, 당시가 일제 강점기인 만큼, 아마도 해방 이후에 현판으로 제작하여 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는藕泉先生의 글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藕泉先生께서 보낸 배산서당 창건 축하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祝培山書堂創建 儒者大敎超倫具足. 僞士亂眞拘學自賊.輾轉羼雜恒病臃腫. 上下二千時輕時重.固執變易動靜塞通. 誤會微言臆斷大同. 悶世憂道厥有培山. 探闡索發德業好還. 闢拘剔腐克講日新. 爰颺先微造功千春. 睠懷往昔此日興感. 獻頌者忱謂文不敢. 藕泉豐城趙琬九謹書
(국역) 참된 선비의 큰 가르침은 출중하여 완전히 갖추어진 것인데, 거짓 학자들은 치우친 학문을 가지고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곧 이리저리 뒤섞어놓아 부스럼 같은 병통을 만들어 놓았다. 유교 발생의 상하 2천년(단군 이래 4천년을 가리킨 듯) 동안 유자의 가르침을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중하게 다루어왔다. 치우친 집착[고집]은 변화를 주어야 하고, 음양의 동정(動靜)에 따라 막기도 하고 틔워주기도 해야 하는데, 성인의 은미한 말씀[微言]은 그르치고, 이상적인 세계[大同世界]를 억측으로 망가뜨려 놓았다. 이렇게 잘못 되어가는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고 사라져가는 도덕을 걱정하는 곳이 바로 배산서당이다. 큰 가르침을 드날리고 찾아서 발전시키게 되면 도덕과 학업이 좋은 쪽으로 돌아올 것이고, 치우친 학문을 제거하고 썩은 사상을 싹둑 잘라버리면 학문의 가르침이 날로 새로워져서 마침내 선인들의 은미한 말씀이 드날리게 되어 그 공적이 천년동안 전해 내려갈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본 뒤 이날에 일어난 감흥을 가지고 칭송하는 마음을 드리려 하지만 글이 모자라 감당할 수 없다. 우천 풍성 조완구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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藕泉 先生께서 보낸 이 축하문을 통해, 우천선생의 사상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천선생은 이 글에서 원래 공자의 사상은 출중한 것이었지만 거짓 유학자들이 치우친 학문으로 부스럼 같은 병통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어서 우천선생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집착(고집)을 버리고 陰陽의 動靜에 따라 막기도 하고 틔워주기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으로써 공자의 은미한 말씀을 그르치고 大同社會 실현을 망쳐놓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培山書堂이 치우친 학문을 제거하고 썩은 사상을 싹둑 잘라버려서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바로잡는 중심 역할을 하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藕泉先生은 역대로 벼슬을 많이 한 명문가에서 태어나신 분이며, 우천선생 본인도 한말에 벼슬을 하신 분이다. 그리고 우천선생은 일찍이 大倧敎에 입교해 1915년 5월 대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북간도 龍井 일대에 가서 수많은 동포를 상대로 약 3년간 선교활동에 종사하신 분이다.
이러한 출신 배경과 그의 종교활동을 두고 추정해 보건대, 藕泉先生은 우리의 전통 유학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여 그 폐단이 누적 심화되었고, 그것이 나라를 잃은 주요 원인중 하나라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면서도 동시에 유교적 가치를 개혁함으로써 大同社會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완전 버리시지는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藕泉先生은 大倧敎라는 민족종교를 개혁적 儒敎에 접목함으로써 당면의 대한독립 목표를 실현하고 나아가 弘益人間ㆍ理化世界의 큰 뜻을 지상에 실현하면서 유교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大同社會 건설을 달성하고자 했을 것이다.
필자 : 趙日熙
先系 : 호군공파 - 사인공파 - 검간공파
▣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외종조부이신 우천 조완구 선생을 회상하는 추모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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