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 조완구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남권 인사말(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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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4-08-13 17:33 조회116회 댓글0건본문
우천 조완구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남권 인사말
지난 2016년 8월 12일 우천(藕泉) 조완구선생 기념사업회 임시총회에서 저를 회장으로 선임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노구(老軀)에 중책을 맡게 되어 걱정이 앞서지만, 우천선생의 기념사업을 좀 더 내실(內實)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회원들의 염원(念願)을 생각할 때 사양(辭讓)할 수만은 없기에, 미력하나마 저의 남은 힘을 모두 바쳐 봉사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의 국권 침탈(侵奪)로 그들의 강권정책에 의하여 강제합병(1910∼1945)되어, 3천만 민족이 비운(悲運)의 운명을 당하여 비통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우천 조완구 선생(藕泉 趙琬九 先生)께서는 조국의 주권(主權)을 회복하고 자주(自主), 민주 통일된 독립국가를 이룩하고자 결연(決然)히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가문과 가정을 뒤로하시고 70여 평생을 오로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거룩하고 고귀하신 애국정신과 나라를 위하여 일생을 바쳐 헌신하신 구국활동(救國活動)을 영구히 기리고자, 풍양조씨대종회에서는 2002년 2월 28일에 “우천 조완구선생 기념사업회”를 결성, 발족하였습니다.
우천선생께서는 1881. 3. 20일에 서울 계동(桂洞)에서 출생하시어 1902. 3월에 한성법학전수학교를 졸업하신 후 대한제국(大韓帝國) 궁내부(宮內府) 내부주사(內府主事)로 근무 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체결에 울분하시어, 그 직을 사임하시고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庚戌國恥))후에는 독립운동을 결심하시어,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14∼1917년에는 만주(滿洲)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亡命)하신 후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시어,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으로의 정부수립을 기획하시고, 1917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신 후에는 전노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를 결성하시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19년 3월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집결된 애국지사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시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원 및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헌법, 법령, 조직의 운영관리 등 제반사항에 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심으로써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후 일본군의 중국본토에 대한 발악적 침략으로 상해(上海)에서 광동, 가흥, 진강, 장사, 광동, 유주, 기강, 서안, 中京으로의 임시정부청사의 이전과 要人의 안전문제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1932년에는 임시정부 내무장(內務長)으로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김구주석(金九主席) 주관 하에 조직하시어, 윤봉길의사등의 義擧를 수행케 하셨고, 대한민국광복군을 조직하여 중일전쟁(中日戰爭)에 참전토록 하셨으며, 버마전선 등에도 광복군을 파견하여, 대 일본 선전포고와 대 독일선전포고를 하셨습니다.
또한 중국, 미국, 영국, 소련에 대하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우방국(友邦國)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얻어 국위(國威)의 신장(伸張) 선양(宣揚)에도 전력하셨으니, 당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재정부장의 중책을 맡은 임정요인 중의 일원이시었습니다.
1945년 8월 10일에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으로 임시정부는 본국으로 환국(還國)하기로 결의하고 선생께서는 1945년 12월 5일에 中京을 출발하여 상해를 경유 제 2진으로 환국하시었으며, 12월 19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환영대회가 있었습니다.
환국 후에 선생의 가정사는 애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망명 당시에는 부인과 1남 2녀의 가장이시었으나, 배위 홍정식여사께서는 선생이 환국하시기 전인 1945년 2월에 별세하셨고, 독자(獨子)인 남규(南圭)는 당시 한성공업전수학교 요업과 재학 중에 선생이 만주 망명 중이던 1914년 6월 만주 용정에서 행방불명되었으며, 장녀 역시 별세하였고, 차녀인 규은(圭恩) 여사는 아버지이신 우천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고독(孤獨)한 승리(勝利)”라는 책자를 발간한 후에 2004년 7월에 타계하였습니다.
1946년에 선생께서는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 재정위원장(財政委員長)과 최고위원(最高委員)에 선출되시고 민주의원(民主議員)에 당선되시었으며, 1948년 4월에는 남북협상대표 남한 측 대표 8인 중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시었고,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서거 후인 1949년 5월에는 백범(白凡) 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위원장(委員長)으로서 활약하셨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종족(宗族)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가지고 1950년 1월 29일 풍양조씨화수회(豐壤趙氏花樹會)를 창립하시어, 초대회장에 취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50년 9월 18일, 6·25동란 중에 애국지사들과 함께 납북(拉北)되시어, 그 후 생사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9년 3월 1일에 정부에서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하였고,
1991. 10. 1일에서야 선생의 독립투쟁 50주년이 되는 해인 1954. 10. 27일 오후 8시에 북한의 군(軍) 11호 중앙병원 병동(病棟)에서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이시며 민족지도자이신 선생의 추모제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거행하였고 애국지사 묘역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 1단 5호에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우천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11월 둘째 수요일 오후 4시에 대종회관 대회의실에서 선생의 추모제를 거행하여 오고 있습니다.
우리 문중에서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거인이시며, 일생동안 자주, 민주 통일의 조국을 이룩하고자 초지일관 백범(白凡)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도자 동지와 함께 조국 건국을 위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큰 역할을 하신 우천선생의 고귀한 생애와 사상을 영구히 되새기며, 우리 문중의 사표(師表)로 삼아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문중에서는 2003. 5. 6일 독립기념관에 「우천 조완구선생 어록비」 건립과 2005. 4. 10일 남양주시 종산 자락에 「우천 조완구 초대회장 공적비」 건립 후 별다른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였으나, 앞으로 선생의 거룩한 생애에 대한 추모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의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선생의 훌륭한 업적에 대한 선양(宣揚)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칠 계획입니다. 끝으로 우리 기념사업회 운영에 종현님들의 많은 참여와 지원을 기대하오며, 인사에 가름합니다. 여러분 내내 강녕(康寧)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 8월
藕泉 趙琬九先生 記念事業會 會長 趙 南 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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