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행사 및 공지사항

우천 조완구 선생 서거 70주기 추도식(2024.11.13)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24-11-26 16:44 조회177회 댓글1건
글자작게 글자크기 글자크게

본문

藕泉 趙琬九 선생 서거 70주기 추도식

 

h01.jpg

 

2024.11.13일(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1 합동제단 공적비원에서 종현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60여 종인이 참집한 가운데 우천 조완구선생 서거 70주기 추도식을 개회선언, 국민의례, 식사, 우천 조완구선생 약력 보고, 추도사, 헌화 순으로 거행하였다. 3년 주기로 서울국립현충원에서 추모제를 올리고 2번은 대종회 회의실에서 봉행하는데 이번에는 70주기 추도식으로 우천 조완구선생의 공적비 앞에서 지내게 되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추도식은 조종연 수요회 총무의 사회로 조종현 대종회장의 식사(式辭)에 이어 조국연 수요회장의 우천조완구선생 약력 및 추모사업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우천조완구선생 약력]

1881 3.20 서울 출생

1902 한성법학전수학교 졸업

1915 북간도 망명 용정에서 독립운동전개 대종교 포교

1919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독립신문 창간

1921 임시정부 내무차장

1924 임시정부 노동총판 취임

1927 임시정부 노동위원

1928 한국독립당 조직 참여

1930 한국독립군 창설 참여

1935 임시정부 학무장 취임

1940 임시의정원 국무위원 내무부장 겸직

1944 임시정부 국무위원 재무부장 겸직

1945 광복, 12월 환국

1946 비상국민회 재정위원장

1948 남북협상 대표

1949 한국독립당 위원장(김구선생 서거 후)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초대회장

1950 동란 중 납북

1954 10.27 평양에서 별세

1989 3.1 대한민국정부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

1991 11.21 정부주최 추모제 봉행(국립현충원 무후선열단 위패 봉안)

 

[풍양조씨 대종회 우천선생 추모사업]

2000 6.9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 창립

2003 5.6 독립기념관에 우천선생어록비 건립(우천선생기념사업회 주관)

2005 4.10 우천선생공적비 건립(대종회)

2019 6.29 충북괴산의 배위 홍정식 여사 유해 국립현충원 합장 봉안

2019, 2022 국립현충원에서 추모제 봉행(3년 주기)

 

 

이어서 우천기념사업회 조남각 부회장의 추도사가 있었다.

 

 

조완구선생 추도사

오늘 우리는 우천조완구선생 서거 70주기를 맞이하여 유서 깊은 풍양조문의 성지이고 명산 천마산의 합동제단 아래 세워진 우천선생 공적비 앞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그동안 대종회와 우천선생기념사업회는 선생의 고결한 독립운동 정신과 통일염원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여 왔습니다.

 

이번 추모행사는 우리 문중의 발상지에 초대 화수회장이시었던 우천선생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음을 모르는 이에게 알려주고, 선생께서 6.25동란 중 북한군에 의하여 강제 납북되었음에도 한동안 자진 월북 인사로 오인되어 일시나마 선생의 명예가 손상되었던 점을 확실하게 바로 잡고자 특별히 기획하였습니다.

선생의 납북과정과 북한에서 별세하실 때까지의 실상은 선생의 딸 조규은 여사가 1993년에 편찬한 「고독한 승리」 책자에 북에서 납북인사 담당관으로 80년대 중반 망명해온 북한 정무원 부부장 申모의 증언을 토대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6.25 사변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딸과 함께 서울에 계셨던 선생께서는 조소항 등 여러 독립운동 인사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1950년 9월 18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집단으로 강제 납북되었습니다.

 

그 후 휴전이 되었건만 납북인사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생사도 모른 채 가족들은 오히려 월북 인사 가족이라고 사회의 냉대를 받고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증언에 따르면 북에서는 갖은 계략과 회유, 연금과 협박 등 악랄한 수단과 방법으로 신변을 감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었으며 노약한 분들이 한을 품고 비참한 최후를 마치신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임정 요인과 납북정치인들에게 집요한 공작으로 조국전선 가입, 성명서 발표, 대남방송원고 작성, 가족 친지에게 편지쓰기 등을 유도하였으나 대부분 거절하였고 일부 인사는 못 견디고 써준 원고를 방송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완구 선생과 조소항 등 대부분 인사는 이용되기를 거부하고 애국적 민주주의의 정치조직체 구성을 모색하였습니다.

 

특히 조완구 선생은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시던 중 와병으로 1954. 10. 27일 74세의 일기로 철의 장막에서 조국 분단의 한을 품고 소천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선생이 운명하신 후 북한에서 대남방송으로 유족에게 알려주라고 하였는데도 그 당시 이념과 사상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시절 이어서 하나 남은 딸도 38년 동안 부친의 생사를 까맣게 모르고 살았으니 얼마나 기구하고 애통합니까? 다행히 조규은 여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선생은 월북자가 아닌 애국지사로서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게 되었습니다.

 

이럴진대 우리 후대들은 부디 우천선생의 고결한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함은 물론 혹여 아직도 주변에 우천선생께서 월북자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일깨워 주어 선생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풍양조문의 시조이신 고려개국공신 시중공께서 탄생하신 이곳 천마산 줄기 독정산에 세워진 선생의 공적비를 掃除하며 명복을 빕니다. 이제 선생께서 못다 푸신 그 여한을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2024년 11월 13일

우천조완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조 남 각

 

 

다음으로 유가족 헌화에 이어 참석자 일동 경례로 70주년 추도식을 선생의 뜻을 기리면서 엄숙하게 마쳤다. 추도식에 이어 일평 조남권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있었는데 이번 행사에는 수요회 회원들께서 많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이모저모

 

ha01-1.jpg

<조국연 수요회장 약력보고>

 

ha01-2.jpg

<우천기념사업회 조남각 부회장 추도사>

 

ha01-3.jpg

<조종연 수요회 총무 사회>

 

ha01-4.jpg

<유가족 헌화>

 

ha01-5.jpg

 

 

[ 우천 조완구 선생 공적비](2005년 건립)

 

 

 

藕泉豐壤趙公琬九先生 功績碑

 

풍양조씨의 초대 화수회장으로서 서울 중림동 244번지 大成舍 매입 등 근대적인 화수회 조직을 처음으로 성취시킨 藕泉趙琬九선생은 부친 吏曹參判 東弼과 모친 安東金氏사이에서 1881년 3월 20일 한성부 계동에서 출생하셨으니 殿直公之藺의 24대손이요 淮陽公愼의 18대손이었다. 공은 漢城法學專修學校를 수료하여 六品承訓郞內部主事에 임명되었고 增補文獻備考校正으로 差定되었는데 1905년 乙巳勒約체결에 관직을 사퇴했다. 공을 무마하기 위해 楊口郡守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비밀결사와 大倧敎의 민족의식을 통하여 일제침략에 대한 항거운동을 벌였다. 이윽고 한일합방이 되자 공의 손위 처남인 錦山郡守洪範植이 자결했으며 공은 1914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공은 노령을 거쳐 다시 상해로 망명했는데 金九, 李始榮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國務委員 및 內務部長韓國獨立黨副委員長으로 활약하였고 조국이 광복되어 32년만에 還國할때는 財務部長이었다. 공은 白凡 金九선생과 함께 남북협상때는 남한측 副首席代表로 북의 공산주의와 대화하고 돌아왔으며 白凡선생이 安斗熙의 저격으로 서거하자 韓獨黨委員長에 추대되었으나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 정치적 공백기에 공은 근대적인 화수회를 태동시키었고 풍양조씨 화수회의 初代會長으로 추대된다. 공은 화수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15인 有司會議를 거쳐 준비위원을 선출했고 회칙기초위원에 錫九, 南天, 元衍을 선임했다. 창립총회는 1950년 1월 29일 서울 소공동 상공회의소 대강당에서 254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뒤이어 중림동 가옥매입 계약과 제1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고 대의원회의에서 大成舍의 장학사업방안이 구체화되었는데 전폭적인 찬조금으로 大成舍의 매입등기가 완료될 수 있었다. 특히 이 기간에 태평로에서 지물포를 경영한 鳳九의 헌신적인 공헌이 중심이 되었고 大成舍 매입때는 자신은 물론 아우 龍九총무 南天 등과 함께 거금을 쾌척했다. 그러나 그해 6.25전쟁이 터졌다. 공은 9월 18일 다른 臨政要人들과 함께 납북되어 온갖 고난과 회유에 시달렸으며 1954년 10월 27일 오후 8시 臨政要人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일 통일을 되뇌이며 평양에서 서거하시니 향년 74세였다. 별은 떨어지고 공은 1989년에 가서야 建國勳章大統領章을 받을 수 있었다. 조국광복에 몸바친 공의 가정은 험난했다. 부인 豐山洪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 南圭는 만주에서 일찍 실종되었는데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인은 광복 6개월 전에 부군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충남교육위원 둘째 따님 圭恩이 공의 일대기 「고독한승리」를 저술했으며 獨立紀念館에 공의 語錄碑가 세워졌다. 공에게는 한국근대사의 비극과 청정한 민족정기가 깊게 배어있으며 초창기 화수회를 탄생시키고 근대적인 조직을 개척한 지도력에 대하여 敬意와 함께 追慕의 정을 더하게 하였다. 이에 임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총회의 결의를 거쳐 여기 유서 깊은 豐壤趙門의 祭壇에 功績碑를 건립하는 바이다.

 

2005년 4월 10일

前 大宗會長 趙洸熙 謹撰

書  藝  家 趙庸澈 謹書

豐壤趙氏大宗會長 趙璹衍 謹竪

 

 

 

▶ 찬조금 명세

NO.

성명

금액(원)

1

조명숙(우천선생 외손녀)

200,000

 

200,000

 

 

 

댓글목록

인제방주공파님의 댓글

profile_image 인제방주공파
작성일

참석하신 모든 어르신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