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옥헌공파종중 풍옥헌 선생 사위 및 제자 종중 방문기(2024. 7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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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1 작성일25-08-13 16:40 조회52회 댓글0건본문
풍옥헌공파종중 풍옥헌 선생 사위 및 제자 종중 방문기(2024. 7 ~ 12월)
풍옥헌공(휘:守倫, 1555~1612)은 회양공파계 한산군의 5세손으로 한성부참군, 예산의 대흥현감, 평택현감을 지냈으며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서천의 건암서원과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우계 학통의 정맥을 이어간 석학이시다.
풍옥헌공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처사공 조척은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을 세웠고, 차남은 서천에서 부친의 유업을 지킨 집의공 조일이며, 삼남 창강공 조속은 석학으로 존경받아 4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화인 이다. 그리고 3녀 중 첫째는 벼슬이 사포인 안동인 권진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고려 충신 문정공 목은의 9대손인 이덕수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의 7대손인 이후재에게 출가하였다.
풍옥헌공파종중에서는 지난해 풍옥헌문집을 발간하고 사위 종중 등에 전달하고자 전주이씨 광평대군파종회와 한산이씨대종회, 안동권씨사포공파종중 및 제자인 만해공 이유겸의 우봉이씨대종회를 풍옥헌공파종중 남돈 고문과 방문하여 400여 년 전 시대 상황을 함께 나누어 보는 뜻깊은 행사를 가졌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전주이씨광평대군파종회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은 당시에는 광주에 속했던 수서동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아 세거지를 형성하였으며 광평대군 묘를 비롯한 700여기의 묘소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광평로에 소재한 종회를 2024. 7. 5일에 방문하여 이원하 이사장님을 비롯한 여러 임원과 이계명 종손의 따뜻한 점심 식사 환대를 받았고, 광평대군 묘소를 참배하면서 자상한 안내를 받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광평대군파종회에서는 방번 왕자인 무안군, 광평대군, 아들인 영순군 세분의 제향을 모시고 있고 풍옥헌공 셋째 따님의 부군 이후재 집안은 광평대군의 둘째 손자인 청안군의 둘째 아들 정안부정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사위 이후재는 정안부정의 고손자인데 조씨 할머니께서는 손자를 8명, 증손자를 20여명 두어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기에 할머니를 각별하게 모시고 있었다.
특히 조씨 할머니는 조선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벗어나 인조반정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여걸로 조명되고 있는데 할머니의 13대 이병무 종손이 소지하여 보여준 『역사에 빛나는 한국의 여성』(1984. 12. 30일 범우사 안충근 엮음)의 책자에 수록된 이후재의 아내 조씨에 대한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부인이 있었다. 첨추 이후재의 부인 조씨는 풍옥헌 조수륜의 딸이오 이형(1603~1655)의 어머니다. 일찍이 여훈(女訓) 등의 여자 행실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옛 예법을 몸소 실천 했다. 부인은 시집을 가서도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한편 모든 일을 민첩하게 처리하였으며 사리에 밝아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남편 이공은 성품이 엄격해서 평생 동안 가벼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그 부인을 현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이공은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부인과 의논 했다.
광해군이 어질지 못해 여러 번 큰 사건을 일으켜 무죄한 신하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냈는데, 부인의 친정아버지도 억울하게 해를 입었다. 부인은 아버지가 비명에 돌아감을 원통하게 생각해 통곡하다가 기절했는데 다시 소생되어 가지고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7일 동안을 통곡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부인의 애통함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반정을 일으킬 뜻을 품고 그날 아우 창강 조속과 이 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한편 시동생 이후원을 통해 김류, 홍서봉, 이서 등을 사귀며 같이 반정할 의논을 계속토록 했다. 부인은 나라를 바로 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이라 생각하고 사당 안에 숨어서 군복 수백 벌을
지어 거사할 때 쓰게 하였다.
후에 이들이 인조를 도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하게 한 데에는 이 같은 조씨 부인의 힘이 컷었다. 공신들은 무슨 일을 처리할 때마다 ‘조 부인께서 이 일을 아시는지 모르겠소.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반정을 거사할 때에 창강과 이후원의 계교도 조 부인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었다. ~ 중략 ~
그리고 오직 외아들 이형을 힘써 길렀다. 후에 대성한 이형은 아들이 여덟이요, 손자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벼슬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 언관을 지냈다.”
이처럼 할머니대 이후에 정안부정 후손들이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번창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전해 듣고 뿌듯함을 많이 느낀 하루였다.
이병무 종손께서 예전에 99칸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어 든 고택에서 필경재(必敬齋)를 운영하면서 옛 모습을 잘 가꾸고 바로 위쪽에 있는 사위 이후재와 부인 합장묘도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참배하면서 감회가 새롭게 다가왔다.
앞으로 풍옥헌 후손들이 단체로 견학을 하는 것도 흔쾌히 좋다고 하고, 제향에도 참석하여 종중간에 다뜻한 정을 나누자는 환담을 하면서 일정을 마쳤다.
한산이씨대종회
한산이씨는 맑고 큰 충의와 절의의 밝음을 해와 달과 다투는 가문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는 고려말의 성리학자이면서 충신으로 절개를 지킨 목은 이색 이하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목한 평이라 할 수 있다. 목은 선생의 9대손 이유당 이덕수가 풍옥헌공 둘째 사위로 풍옥헌문집을 전달하기 위해 2024. 8. 9일에 한산이씨대종회를 방문하였다. 한산이씨대종회는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후문 쪽에 이색 선생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에접해 있으며 이상구 이사장과 이황직 사무처장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장인 풍옥헌공과 사위 이유당의 인연이 이유당 신도비에 잘 기술되어 있다. “공은 1577년 청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597년 왜구가 재차 침입해 왔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천지역으로 피난하였는데, 서천에 피난살이 하며 제자를 모아 강학하던 조수륜이 그의 어짊을 듣고 여러 제자 가운데 공을 뽑아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공은 오랬동안 장인 집에 머물렀는데, 서로의 마음이 맞아 매우 기뻐하였고 1601년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606년에 증광시에 합격하고 160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정자가 되고 1611년 박사로 승진하였으며 당시 동료들이 사관(춘추관)에 가장 먼저 천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612년 장인 풍옥헌공이 무고로 참옥한 옥사를 당하는데 이때 화를 입어 유배되었다. 1621년 사면으로 고향에 이유(怡愉)라는 편액을 달고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가 인조반정 이후 예조좌랑, 사헌부, 공조정랑을 차례로역임하였다. 이괄의 난때 어가를 공주에 호종하여 환궁 후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 순천 현감과 1642년 강원감사를 역임하였고 1645년 예조에 임명되었다.
또한 공의 신도비에 따르면 공은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커서 스스로 부모에게 봉양을 미처 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그것을 형제들에게 베풀고자 하여 시골에서 오래 병을 앓고 있으면 집으로 맞이하여 의약을 지급해 주면서 치료하게 하였고 친척들 가운데 가난하여 살기 어려운 자들의 경우에는 한데 모아 생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재산을 나눠 분가하는 날에는 “천륜의 부모께서 남겨준것이 나에게만 유독 두텁다.”고 하고는 양보하면서 자신의 몫을 받지 않았다. 일가 자손들을 여럿 모아놓고는 뛰어난 자는 나오게 하여 가르치고, 못난 자는 별도로 깨우쳐 주어 모두 성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이르기를, “사람은 제각기 장점이 있는 법으로,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장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봉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자세로 아첨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직분에 다하기를 힘쓰되 하찮은 절개로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인은 풍양조씨로 평소에 훌륭한 덕으로 이름나 일가의 내외 친척들이 모두 존경하여 우러러보면서 아녀자의 규범으로 일컬어졌다고 칭송하고 있다.
한산이씨대종회에서 이유당 평전으로 「이유당 이덕수의 생애와 활동」(2020년 발간) 책자를 주고 많은 업적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는데, 청주에 한산이씨들이 정착해 번영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는 과정에 이유당공께서의 역할이 크셨다고 한다. 특히 활발한 문중의 현양 활동으로 순천에서 1626년 목은집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1643년 강원 감사로 있으면서 한산이씨 최초의 족보(계미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때의 보판이서천 문헌서원에 보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이유당공의 유적으로는 청주시 청원구에 이유당의 묘소와 묘비, 신도비, 이유당 서당터(유허)와 이유당을 제향하는 국계사가 있다.
방문을 마친 후 이유당공파종중 이승복회장과 통화하고 문집 여러 권을 발송하였으며 풍옥헌공 춘향제 때나 이유당공 세일제 때 종중간에 교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석찬 이유당공파종중 감사께서는 청주에서 직접 서울에 풍옥헌공파종중을 방문하여 할머니에 대해 많은 환담을 나누었다.
이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안동권씨 사포공파종중
풍옥헌공의 첫째 사위 사포공 권진은 안동권씨의 생육신으로 홍문관대재학을 지낸 권절의 5대 손으로 1577년에 태어났으며 사포소에서 정6품의 사포를 지냈다. 사포소는 왕실의 밭과 채소를 관리하는 관청이다. 사포공의 세거지와 묘소는 수원에 있었는데 도심이 확장되면서 군포로 묘소를 이전하여 합동묘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풍옥헌문집을 전달하기 위해 안동권씨대종회와 파종회에 연락하여 사포공파종중 권원혁회장을 소개 받아 2024. 12. 8일 군포에 소재한 묘역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환담을 나누었다.
사포공은 82세, 할머니는 90세까지 장수하였는데 할머니 친정 동생인 창강 조속의 「서천구기잡기」에 의하면 “서천의 서지동 산기슭 당산이라는 곳 밑에 풍옥헌 옛터가 있으며 1594년부터 4년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나는 1595년에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수원 누이의 혼례 또한 이곳에서 올렸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첫째 누이는 사포공한테 출가하여 수원에 사셨음을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조씨 할머니는 3남 2녀를 두었는데첫째 권한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정사공신 참판이고 둘째 권유는 첨지 중추를 지냈으며 셋째 권보는 예조참판을 지냈다. 또한 손자도 첫째가 4남 1녀, 둘째가 5남 1녀, 셋째가 1남을 두어 자손이 번성하였다.
사포공파종중에서는 사포공 이하 자손의 묘소를 한곳에 조성하여 2016년 비석을 세우고 후손들도 묘소 아래쪽에 가족묘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포공 선조님의 유지를 받들어 10월에 합동 세일제를 올린다고 한다. 묘소 앞에는 수원 팔달산 묘소에 있던 묘표를 옮겨 세웠는데 「사포권공휘진지묘 의인 풍양조씨지묘」가 또렷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할머니대 이후에 크게 번성하였다는 종중회장 말씀에 감회가 더욱 크게느껴졌다.
우봉이씨대종회
우봉이씨는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을 관향으로 하고 시조 이공정은 고려 명종 때에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공신인데 14세손 만회당 이유겸은 일찍이 풍옥헌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우계 성혼 선생의 학통을 이었으며 당세의 거유가 되었다. 풍옥헌공이 김직재의 무옥에 걸려 광해군의 친국을 받자 군졸 복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의금부에 출입하면서 좌우로 부축하였다. 마침내 형틀에서 운명하였는데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자 몸소 시신을 업고 나와 모든 동문들과 더불어 염빈하여 양주 선영에 장례절차를 주선하였다. 이런 연유로 풍옥헌공파 종중에서는 서천 풍옥헌당에 「만회 이선생 위사 행적비」를 건립하여 의로운 행적을 전하고 있으며 이번에 풍옥헌문집을 전달하고자 2024. 8. 27일 서울시청 뒤에 소재한 우봉이씨대종회를 방문하였다.
이병순 대종회장과 만해공의 종손인 이종무 감찰공 총무와 이홍구 대종회 사무총장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으며 풍옥헌공의 훌륭한 제자로 광해군이 친국하는 상황에서 의로운 일을 하신데 대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만회공께서는 바로 인목대비를 폐출함은 불가하다고 직언하여 죄를 입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신령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풍옥헌공이 신원되었는데 이에도 만해공의 현로가 많으셨다. 그리고 신령 현감 재임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布)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정사를 잘 처리하였다. 그 뒤 공조 좌랑, 함흥 판관 등을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지방관으로재임하였을 때 애민 봉공하는 선정을 베풀었다.
만해공의 세거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지역이며 이곳 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고양시 문봉서원과 순창의 지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만해공은 8남를 두어 자손이 번창하였으며 우봉이씨의 중추적인 계파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감사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방문기를 마치며> 이번 풍옥헌문집 발간에 선대와 형제자매, 자녀, 사위들과 제자의 행적까지 수록하여 풍옥헌공의 시대를 함께 조명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사위 종중과 제자 종중을 방문하면서 그 시대의 상황과 끈끈한 가족 및 사제의 정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풍옥헌공이 무고로 참옥하게 옥사하고 광해군의 폭정에 의거하여 풍옥헌공의 막내아들(창강 조속), 조카(풍안군 조흡), 첫째 따님의 아들(권한), 막내 따님의 부군(이후재)과 시동생(이후원), 아들(이형), 생질 홍봉한이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둘째 사위(이덕수)는 인조반정 직전에 귀양지에서 풀려나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처럼 가문 전체가 참여하여 정사공신이 되고 제자들도 큰 활동을 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어 보람이 컸으며, 앞으로도 선조 대고모님 종중 및 유관한 종중들과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필자 : 조 용 찬(풍옥헌공 16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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