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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서는 성씨(姓氏) 위에 어떤 정해진 지명(地名)을 붙이는 것을 본관(本貫)이라 하며,
관향(貫鄕) 또는 본관(本貫)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자(姓字)는 같아도 혈통(血統)은 같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그 시조(始祖)가 태어났던 지명(地名)을 붙임으로써 그 『혈통을 구분짓는 방법의 하나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조씨(趙氏)라는 성(姓)을 쓰는 씨족(氏族)의 본관은 모두 210본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지만, 대부분 미고(未考)이고, 풍양, 한양, 함안, 양주, 평양, 임천, 배천, 옥천, 횡성 조씨 등 15본을 대본으로 꼽히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조씨(趙氏)는 풍양(壤)이라는 본관(本貫)을 쓰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 시조 시중공(侍中公)께서 출생하여 사셨던 곳의 지명(地名)이 고려(高麗) 초기에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壤縣)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풍양현(豊壤縣)은 대략 현 경기도(京畿道) 남양주시(南楊州市)의 진건면(眞乾面)과 진접면(榛接面)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地域)의 명칭이었다.
  우리 시조(始祖) 시중공(侍中公)께서는 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松陵) 1리에서 태어나 노년(老年)까지 사신 것으로 되어있고, 묘소(墓所)는 세보(世譜)에 풍양 적성동(豊壤 赤城洞)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이름으로는 송릉 2리이며 산하(山下)에 '적성골'이란 동네 이름이 남아 있다. 이를『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풍양현(豊壤縣)은 주(州 : 楊州 東軒 所在地)에서 동쪽으로 50리 지점에 있었다. 고구려(高句麗)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는데, 신라(新羅) 때에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에는 풍덕(豊?德)이라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양주(楊州)에 귀속시켰다가 그후에 포주(抱州 : 現 抱川)에 귀속시켰으며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 : 1419)에 다시 양주의 소속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사학계(史學界)에서는 광개토대왕비(廣開士大王碑)에 나오는 고리성(古利城)을 『골의노현』의 골의(骨衣)와 발음이 비슷하다하여 진건.진접 일대일 것으로 보는 의견(意見)이 있으니, 그렇다면 진건면 용정리(龍井里)에 있는 『고리개』라는 마을 이름도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골의노현(骨衣奴縣)이란 이름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후에는 큰 변경이 없었던 것 같으며, 지난 1980년 4월 1일자로 이 지역이 양주군에서 분리(分離)되어 남양주군(南楊州郡)이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자로 남양주시(南楊州市)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남권저, 풍양조씨문헌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