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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인 통일신라 말엽, 풍양현(豊壤縣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의 "독정이(오늘의 獨井里)"라는 마을 암굴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며 학문과 정신수양에 정진하던 "바위"라는 은자 한분이 계셨다.
때는 국운이 기울데로 기울어진 신라와 망국 백제의 설분을 표방하고 일어난 견훤의 후백제와 고구려의 회복을 내건 궁예의 태봉으로 정립된 이른바 후삼국 시대를 거쳐 태봉의 궁예가 잇다른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그의 막하장이였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라는 국호로 통일고려가 탄생하기 직전으로 신라, 후백제, 고려간에는 하루도 쉴새없이 싸움이 치열하던 시대였다.
어느날 왕건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다가 영해지방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패군을 이끌고 철수하던중 풍양땅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막하의 여러 장수들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꼭 이곳 풍양땅에사는 『바위』도인을 찾아가 왕업을 이룰 계책을 상의함이 좋겠다.
"건의하여 태조 왕건이 몸소 찾아가 제우(際遇)하고 장군을 삼으니 그때 『바위』도인의 보령은 70세였으나 남정에 나서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그 후 고려가 개국하자 고려건국에 지대한 공훈을
『 시조시중공동상 』
세운 "바위"도인은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 오늘날의 총리)에 이르렀고 고려태조로부터『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으시고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셨다. 시조께서는 돌아가신후 생전에 수도생활을 하시던『독정이』 마을 서남쪽 고개넘어 약 5리 정도 떨어진 천마산지맥에 묻히셨다.
이 시중공 묘소가 조선왕조에 와서 한차례 커다란 곡절을 겪게 되어 이 사실

『 시조시중공묘소 』
도 간략하게 소개 드린다. 조선 제14대 선조대왕에게는 공빈김씨(恭嬪金氏)라는 후궁이 있었으며 이 공빈김씨는 후일 조선 제15대 왕이된 광해군의 생모가 되는 분이다.
선조 10년(1577) 공빈김씨가 죽자 그의 묘를 시중공 묘소뒤 30보쯤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당시의 국법으로는 왕실에서 능묘(陵墓)를 쓰게 되면 그 구역 내에 있는 사가(私家)의 묘는 이장하여야만 되었다.
따라서 공빈 묘소가 입장함에 따라 시중공 묘소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선조대왕께서 "그분으로 말하면 과인이나 공빈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터이니 이장은 하지 말라"는 왕명으로 간신히 수난을 면하였다.
그 후 선조 34년(1608)에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자 세자이던 광해군이 조선왕조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임금이 된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인 공빈김씨의 지위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하는 추존사업을 추진하여 마침내 1610년 광해군은 공빈김씨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그 묘소에 성릉(成陵)이란 휘호를 가하고 봉릉도감을 설치하게 이르렀다.
공빈김씨의 묘소가 성릉으로 격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중공 묘소의 이장문제가 대두하게 되었으며 이장은 불가피하게 되여 조정에서는 군신간에 여러 차례 논의가 되었으며 자손들은 이장문제에 따른 비용 염출을 위해 친손만으로는 부족해 외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고 이장 예정지까지 정하였던 상황에서 당시 영의정 이덕형의 의견과 영중추부사 윤승훈, 완평부원군 이원익, 청평부원군 한응인등 여러 신료들과 지관들의 증언으로 광해군은 왕명으로 이장만은 면하되 다만 봉분을 평치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산을 꾸며 치산토록하게 되었으니 자손들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상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한다. 그러다가 광해군 15년(1623)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대왕이 즉위하자 성릉도 따라서 혁파되여 다시 공빈묘로 환원 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조 8년(1630) 자손들의 상소로 시중공 묘소 원상복구의 승인을 받고 그해 10월 많은 자손들이 묘하에 모여 고유제를 올리고 봉분을 짓고 옛 모습대로 복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