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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운영위원
제 목    회양공 동곡서원 창건약기
회양공동곡서원창건약기(淮陽公東谷書院創建略記)

                작자(作者) : 회강(晦岡) 조보연(趙甫衍)


                번역(飜譯) : 작자의 손자 면희(冕熙)


                                  출전(出典) : <회강집(晦岡集)>


                                                 


  성현의 교훈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것이 스승 된 이의 도리이다. 나라가 어지러움을 당하였을 때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충신의 절개이다. 선현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사당을 짓는다든지 서원을 만들어 오랜 세월 동안 예절을 갖추어 배향하게 하는 것은 사림들의 공정한 의논에 의하여서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 회양공께서는 고려시대 말기에 도덕과 문장이 탁월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당대의 뛰어나고 이름난 학자들이 공경심을 가지고 배움을 청한 이가 한 두 사람이 아니지마는 그 중에도 우리 조선의 태종대왕께서 아직 서민으로 계실 때[龍潛時] 공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공은 대왕의 활달하고 덕성스러움을 늘 기이하게 여기어 남달리 대우하였었다.




  드디어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공은 의리로 보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곧바로 임천군 덕림동(林川郡 德林洞)에 들어가 이름도 바꾸고 숨어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천석연하(泉石煙霞)를 홀로 사랑하고 즐기며 자연 속에 묻혀 살다가 천수를 다하셨으니 세상 사람들 중에 공께서 전시대인 고려조의 구신(舊臣)이고 태종대왕의 스승인 줄 누가 알았을 것인가? 옛날 중국 은(殷) 나라의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산 일과 노중연(魯仲連)이 동해바다를 건너간 일과 지조를 지키려는 의리는 한 가지이다.




 그런데 우리 태종대왕께서 문무를 겸비하신 왕인데도, 옛날 무정(武丁)이 어릴 때 스승인 감반(甘盤)의 은혜를 못 잊어 초빙하던 의리를 가지고 조서(詔書)를 내려 공을 예빙(禮聘)하였으나 공은 이미 돌아가신 뒤이었다. 태종께서는 매우 슬퍼하고 한탄하신 뒤에 옛날 의 은혜를 추념하여 특별히 군인(軍人) 15 명을 차출하여 공의 묘를 수호하게 하였으니 그 한없는 임금의 은혜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태종이 조서를 내려 공을 모시려고 할 때 만일 공이 살아계시었더라도 공께서는 반드시 명예를 생각지 않고 시골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부귀(富貴)를 가지고 달래어도 공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고, 도끼와 창 같은 무기로 위협하여도 공의 뜻을 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태종대왕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공의 정충고절(貞忠孤節)은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실제로 이룬 덕과 뚜렷한 행실은 산수와 청풍과 함께 백대에 없어지지 않아, 높은 그 의리는 반드시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백6 년 전인 병술년(순조 26년, 1826년)에 임천향교(林川鄕校)와 칠산(漆山) · 죽림(竹林) 등의 서원(書院)이 통지문[通章]을 돌려 공을 위하여 함께 서원을 세우고 제향을 모시는 향사(享祀)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사업의 규모는 크고 힘이 모자라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지난해인 경오년(1930년)에 이르러 임천의 사림들이 옛날 향교와 서원을 세우려던 통지문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덕과 의리를 존경해 사모하고 예절이 오래도록 폐지된 것을 한탄하며 모두 이르기를 ‘전 시대 사람들이 뜻한 바를 후인들이 이어 성취시키는 것이 불가한 일이 아니라고 하고, 인하여 두어 줄의 통문과 당시의 통지문을 덧붙이어 유림과 여러 친족들에게 두루 알린 결과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였다.




  마침내 본손(本孫)인 동석(東錫)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재물을 모아 임천의 동곡에 원우(院宇)를 짓고 편액에 동곡서원(東谷書院)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신위에 제(題)하기를 ‘고려회양부사조선생’이라고 썼는데 이렇게 회양공의 영위(靈位)를 안치한 날은 신미년(1931년) 11월 27일 갑자일이었다.




  나는 공의 후손으로 위패를 봉안하는 날에 배알하기 위하여 먼 길을 달려와 이곳에 도착하니 산천이 빼어나고 원우(院宇)가 날아갈 듯 솟았으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후손들이 뜰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제물의 구비함과 제례절차의 의식이 아무리 옛날 훌륭한 시대와 비교해 보더라도 오늘 이 자리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킬 도리의 부흥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겠다.




  아하! 이 서원의 설립도 하늘의 운수에 관계되는 것인가? 오늘날 세태가 기울어짐이 이와 같은데 사림들이 공의 도덕을 우러러 추앙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또한 현족(賢族)인 동석씨가 앞장서서 주간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성취하였을 것인가?




  나는 여기 이 서원의 설립전말을 대략 나열하여 기술하였다.


            신미년(1931년)             


                            후손 전박사 보연 근찬(後孫前博士甫衍謹撰)        


   




  임천 동곡의 조동석씨에게 보낸 편지




한 해가 바뀌니 때에 따른 그리움은 비록 평범한 지구(知舊)간이라도 절실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우리는 같은 친족으로 두터운 정을 가진 관계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가 묻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매서운데 존체기거 만복하시고 자제들께서도 편안하시며 온 집안이 두루 경사스러우십니까? 삼가 멀리서 우러러 축하드립니다.




  족손인 저도 나이가 한 살 더하니 머리털이 더욱 희어졌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도리인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러운 것은 집안에 큰 탈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릴 것은 지난해 동곡에다가 회양선조의 원우(院宇)를 창설한 것은 실로 그 지방의 유림들이 선현을 사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나 우리 족대부(族大父)께서 성의를 다하여 애쓰시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훌륭히 공사를 끝내었겠습니까? 그 공로에 송축(頌祝)하는 말은 만 사람이 똑 같습니다.




  우리 파의 종중에는 종인의 수도 몇 안 되는데 살아오는 동안 가난한 형편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겨우 3백 금(金)을 모아 부치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펴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지난 번 원우를 봉안(奉安)하던 날에 시제운(詩題韻)으로 내어 주신 ‘동(東)’자운은 감히 졸렬한 생각을 읊은 시와 아울러 소서(小序)를 적고 또 서원 <약기(略記)>를 아울러 받들어 올리니 바라건대 부디 고쳐 주십시오.




  나머지 소식은 다 올리지 못합니다. 귀댁 근처 중산리에 사시는 족대부 인구(麟九)씨도 편안하십니까? 따로 편지 올리지 못하니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안부 전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임신년(1932년) 정월 일  족손 보연(甫衍)




  동곡서원에서 낸 ‘동(東)’자 운에 차운하고 또 소서(小序)를 씀


  


  옛날 주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복하고 기자(箕子)에 도(道)를 물어 8백년의 국운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태종대왕께서 아직 서민으로 계실 때 우리 선조인 회양공에게 학문을 배워 5백 년 국운을 열어 놓으시었다.




  아하! 우리 부사(父師 : 기자)가 도를 동쪽으로 가져와서 임금과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지 지금까지 3천년이 되었다. 뒷날 노래로써 칭송하는 자들은 태산(泰山)을 영명령(永明嶺)에, 황하(黃河)를 대동강에 비유하였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음식물이나 의복들이 모두 기자의 <홍범구주(洪範九州)>와 팔조(八條) 교훈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을 요약하여 몸소 체득한 자는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 고려 말엽에 태어나시어 선성(先聖)의 교훈을 밝히시고 후학을 계도(啓導)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시니 향당의 서당에서 나아가 중앙의 대학인 상서(庠序)에 이르기까지 모아서 가르치니 높은 지위의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의 자식이나 백성의 자식 중에 준수한 사람들이 누구 하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헌묘(獻廟 : 태종)께서도 그 소문을 얻어 들어 배우게 된 것이다.




  학문이 넉넉하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공께서도 벼슬길에 나아가 회양부사로서 우도(牛刀 : 직위에 걸맞지 않는 큰 재능)를 시험하였으나 나라가 망하는 즈음에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임천군의 덕림동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으니 이는 상(商)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주(周)나라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겠다고 한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리하여 공의 유품이 마침내 이곳에 감추어졌는데 이는 또한 제왕(帝王)의 학문이 선비의 지조가 다르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태종대왕께서 마침 정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은 뒤에 옛 학문을 더 배우기 위하여 먼 시골로 사신을 보내어 선생을 찾으라고 하였으나 공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후이었다. 대왕께서 매우 애통해 하고 특명으로 묘를 지키는 군인 15명을 내려 보내 주었으니 특이한 대우이었다.




  그런데 만일 공께서 살아계시어 명령에 응하시었다면 마치 기자가 주(周)나라에 한 것과 같이 성스러운 임금을 높은 자리에 올라 복을 누리는 지역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홍범(洪範 : 書經의 大法)의 주(註) 끝에 또 주각(註脚)을 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후학들이 존경하여 사모하는 대상이다.      




  지나 병술년(순조26년, 1826년)에 본향인 임천향교와 칠산 및 죽림서원에서 통지문[通章]을 잇달아 발송한 것은 공을 위해 서원을 만들어 제향을 받들려고 한 것이었으나 사업은 크고 재정이 모자라 성취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지난해인 경오년(1930년)에 이르러 여러 유지와 선비들이 지난 의논을 다시 살려내었고, 또 이 땅도 공의 장구(杖屨)와 같은 유물을 모신는 일을 피할 수가 없어서 새로 원우(院宇)를 짓고 동곡서원이라는 편액을 단 뒤에 낙성식을 올리고 신위를 안치하고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아하! 공의 은혜가 배어 있는 이 고장[桐鄕]1)에 여러분들이 전시대 사람들의 뜻한 바 선현을 존경하는 도리를 이어받아 성취시켰는데 우리 후손들은 선조를 위하여 조그마한 공이라도 기여하였는가? 이는 동석씨가 밤낮없이 부지런히 애쓰고 경향각지에 흩어진 후손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비용의 반이라도 대는데 참례하도록 독려하였고 또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불러다가 각각 할 일을 맡겨주었으므로 나 보연도 한 마을에 사는 친족인 상구(象九)씨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예절바른 용모와 잔칫자리에서 오붓하게 수작하는 모습이 모두 구비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감동된 느낌을 시로써 수작하여 선조를 추모하는 뜻을 담는다면 유림들로서는 현인을 기리고, 후손들로서는 친족끼리 더 가까이 하게 되어 그 성품에 바른 도리를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짧은 글[小引]로 이 자리에 모인 까닭을 대강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이다.




*‘동東’자 운의 시


士趨有若百川東, 就舊林居起院宮.


敎冑寬剛開素蘊, 罔臣休隱藹丹衷.


水不忍荒仍霽月, 山如仰止又高風.


奉安適在陽初復, 萬歲春光自是通.




*해설


  선비들은 물길이 바다 향해 모이 들듯,


  임천의 옛터에 서원의 건물을 세웠네.




  유생을 가르칠 때는 너그럽고 강잉하게 하지만


  나라 잃은 신하는 숨어 살며 붉은 마음을 보였네.




  물도 황폐해지는 것을 못 참아 갠 달빛을 비추고


  산은 모두가 우러러 보도록 높은 풍모를 보이네.




  신위를 봉안하는 날이 마침 양기가 회복되는 달


  만년 동안의 봄날 빛이 이로부터 탁 퍼질 것일세. 




                임신년(1932년) 정월 16일.


                     후손 전박사 보연 삼가 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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