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ngyangcho
 

 
 
 
로그인 →           아이디 :    비밀번호 :                      
 
 
 


  Total : 2096, 1 / 105 pages  

이 름    운영위원
제 목    보각국사 조혼수(普覺國師 趙混修)와 청룡사(靑龍寺) 3



















































































































우왕 9년(1383) 2월에 조정에서 환암에게  국사(國師)에 명하였다.  이와
함께  찬영(粲英)은  왕사(王師)로 삼았으니  억정사(億政寺)의 대지국사
(大智國師)이다.  환암은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4월1일에 왕은 상신 우
인열(禹仁烈)등에게  어서(御書),  인장(印章), 법복(法服), 예폐(禮幣)를 
받들어 연회암에 와서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오불
심종흥자운비복국리생묘화무궁도대선사정편지웅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
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라 존호하
고 충주의 개천사(開天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해 가을에 서운사로 가니
왕은 안마(鞍馬)를 보내 다시 모셔오게 하였다.
이듬해인 우왕 10년(1384)에 해적(왜구)이 충주를 침범하니 개천사가 위
험할 것을 염려하여 광암사(光巖寺)로 맞아왔다.  환암은 개천사와 광암사
의 두 주지가 되기를  사양하였으나 왕은 개천사를  종신토록 살 곳으로 명
하였다. 우왕 11년(1385) 가을에 50일간 백산개도장(白傘盖道場)을 베풀
고 천지재변을 물리치도록 빌었으며  이듬해(1386)에는 대비 안씨(安氏)
가 공민왕(현릉)의 명복을 빌기 위해  보국사에서 불정회(佛頂會)를 베풀
었으며 왕은 또 수창궁에서 소재(消災)를 주관하였다.
우왕 14년(1388) 왕이 돌아가고 어린 창왕(昌王)이 즉위했다. 왕은 6월에
환암에게 국사(國師)를 다시 명하였다.  여름에 환암이 개천사로 돌아갈것
을 청하니 전임 사자로 특별히 호행케 하였다.
이듬해(1389)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표문(表文)을 봉인하여 
조정에 올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수개월이 못되어 다시 국사(國師)에 
봉하고 사람을 보내어 개천사로 도로 모셨다.
공양왕 3년(1391)  가을에 공양왕이 잠저에 있을때부터 환암과 대장경의 
완성을 염원하였는데 교정이 끝나자  서운사에 안치하고 크게 경회를 베풀
었다. 이때 왕은 내신에 명하여 강향(降香)하고 환암을 증사(證師)로 삼게
하였다.  
1391년 7월에  이성계가 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환암은 표문을 올
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위(位)와 절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인(印)을 함께 보낸 다음 청룡사로 돌아갔다.
태조는 전문과 인을 곧 되돌려 보냈으나 환암은 이를 마음 언짢게 생각 하
였으며 얼마 안되어 이질에 걸려 10여일 동안 낫지 않었다. 9월18일 유서
를 쓰게 하면서 고을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하게 하고 게(偈)를 베푼 다
음 시적하였다. 이때 73세이며 하납(夏臘)이 60세였다.
태조는 애도하는 심정에서  보각(普覺)이라 사시(賜諡)하고 정혜원융(定
慧圓融)이라  탑호(塔號)하고  내신을 보내어 그 유골을 수장하는 일을 감
독케 하고 공인(工人)에게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이듬해(1393년) 12월 23일(甲申)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안치하였으니 
보각국사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이며  1979년 5월 22일에 국보
제197호로 지정보전되고 있다.  태조는 또한 비문을 권근(權近)에게 명찬
케 하고 선사 희진(禪師 希進)에게 입비케하여  태조3년(1394) 3월에 세
우니 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이다. 이 비는 1979년 5월 22일에 보물 제658
호로 지정 되었다.
이상에서  보각국사 환암 혼수(普覺國師 幻菴 混修)의 행장을 중심으로 청
룡사와  연회암에 대한 관련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 볼때 보각국사는 어느
때 창사(創寺)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있어 왔던 청룡사에 들어가서
이웃에 연회암을 짓고 기거의 중심을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초기에 청룡사에 들어가서 이웃에 바로 연회암을 짓고 있으며 이
후에도 연회암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그 말년에 역시 청룡사로 들어왔음에
서 짐작 된다고 하겠다.
비 음기에서 중원부 청계산 청룡사 보각국사 문도라 기록하고 있음에서도
그러하다. 문도의 수 또한 대단하니 내원당(內願堂)을 비롯하여 대선사(大
禪師)가 22명, 선사(禪師)가 35명, 대선(大選)이 138명, 사미(沙彌)가 3
명, 비구니(比丘尼)가 15명, 그리고 우파새(優婆塞)가 50명, 지방호장(地
方戶長)이 4명이나 기록 되어 있다.  이들이 모두 청룡사와 관련이 있다고
는 볼수 없으나 당시 청룡사의 번영도를 측정할수 있는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당시 고려말, 조선초기의 청룡사의 경영면을 알게 한다고 하겠다.
     ***다음에 계속***



  윗   글   보각국사 조혼수(普覺國師 趙混修)와 청룡사(靑龍寺) 4. 운영위원  
  아랫글   보각국사 조혼수(普覺國師 趙混修)와 청룡사(靑龍寺) 2 운영위원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hanroot